소망교회에 기독교노동조합이 설립하게 된 배경

서울 소망교회(담임 김지철 목사) 의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다. 소망교회 노동조합은 지난 4월 18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신고하여 필증을 교부받고 ‘대한기독교노동조합’ 으로 출범을 했다.  조합원은 현재 100여명의 직원들 중 50여명이 가입한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교회에 노동조합이 설립한 것을 두고 교회에 노조가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와 이렇게 노조가 설립된 배경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왜 이렇게 교회에 노조가 설립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교회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신앙적인 차원에서 희생을 강요당하거나 자기가 제공한 근로에 대한 적법한 대우를 받지 못한 데 있다. 교회를 직장으로 두고 근무하는 이들에게 교회는 자신이 봉사할 교회이기 이전에 여기서 일하는 정당한 임금을 통해 가정과 생계를 책임져야 할 직장이다. 그러므로 그 근로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지급해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교회는 그러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교회는 교회에서 수고하는 직원들에게 대한 처우개선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인 것이다.

서울 소망교회, 사진=시사in


          다음은 노조위원장 전승문씨의 인사 글

                                존경하는 소망교회 근로자님께 드리는 말씀

 저희 근로자 모두는 그동안 소망교회에 하나님의 전당에 사심없이 봉직하면서 각자 맡은바 소임에 충실 하였고 교회의 모든 행사와 대소사를 헌신적이고 충실하게 한치의 빈틈도 없이 수행하여 왔습니다.

그동안 각자 한명 한명의 성도로서 부족하고 부당한 사측의 일방적 전횡에도 묵묵히 인내하여왔습니다만 한 교인이기 이전에 생활인으로서 불합리한 근로조건과 급여체계 등 보다 발전적이고 원활한 노사 관계를 위하고 화해와 소통의 창구를 만들기위해 노동조합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노조는 교회뿐아니라 교회 근로자들을 위한 화합과 발전을 위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다해 보다 부흥하는 소망교회와 일 할 맛나는 즐거운 일터로 안들어나가는데 매진할 것입니다.

근로자 동지 여러분의 적극 참여를 바랍니다.  소망교회 노조는 여러분의 이익과 부당한 처우에 대해 여러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소망교회노조는 합법적으로 2014년 4월18일설립된 유일한 노동조합입니다.    많은성원 부탁드립니다.

                               대한기독교노동조합 대표.  전승문(010-9004-8905)

제주노회의 신사참배 회개 기도문

한국교회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라면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압력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사참배에 반대해 옥중순교까지 감당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여, 교회가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다. 안타까운 것은 이에 대한 역사적 검증과 반성도 많이 나왔지만, 한국교회가 공개적으로 이에 대해 회개하지 못했다.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 꺼내서 무엇하냐는 식으로 그저 덮어두기 바빴고, 순교한 이들의 업적에 슬그머니 편성하여 마치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처럼 교묘하게 역사의 진실을 왜곡시켜왔지, 아직 이에 대한 통렬한 회개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교단 제주노회에서 신사참배를 회개하는 기도문을 기독공보 광고란에 실었기에 전문을 여기 소개한다.


신사참배 회개 기도문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일제강점기가 오래 지속되고, 폭압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시절, 제주노회는 이를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굴복했습니다. 1938년 4월 26일 회집한 제9회 제주노회는 국법에 순종하여 국민의 의무를 다한다는 명분으로 저항의 뜻을 굽혔습니다. 또한 76년이 지나도록, 이를 바로 잡지 못한 채 회피하여 왔습니다. 늦게나마 이 아픔과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 자리에서 믿음과 양심에 어긋나는 결정을 해야 했던 믿음의 선조들을 현재의 우리가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의 교회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이 제주노회를 구성하는 저희들도 역시 연약한 존재입니다. 오히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여 믿음의 순수함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그들을 비난하지도 못합니다. 다만, 옛날의 잘못을 거울 삼아, 믿음의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게 하옵소서.

자유를 얻었다고 하나, 아직도 세계 열강의 움직임을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굳어진 민족 분단의 현실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결하는 일에도 교회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각양 차이와 차별의 구도 속에서 대립합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환경에 얽매여 주님이 명령을 좇지 못하 때가 많습니다. 이제 제주노회가 말씀에 따라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화해와 평화의 일꾼으로 서게 하옵소서.

오늘날, 경제의 논리와 문화권력 등이 교회와 신앙인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훨씬 더 강하고 교묘하게 그리고 속속들이 믿음의 바른 선택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더욱 바른 믿음과 다듬어진 소망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4. 4. 29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주노회


늦게나마 이렇게 제주노회가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기도문에 나타났듯이 좀 아쉬운 점이 있다. 먼저 통렬한 회개라기 보다 당시의 상황을 두둔하는 듯한 인상도 있고, 신사참배의 죄에 대한 구체적인 회개 없이 그저 하나님의 긍휼을 먼저 간구하는 태도가 눈에 거슬린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드시도록 정말 우리 한국교회가 무릎꿇고, 재를 뒤집어쓰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할 수 있을까?

미약하더라도 제주도에서부터 시작된 이 회개운동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우리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모든 죄를 회개하며, 온전히 새로워지는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길 기도한다.

by 코이네뉴스

돈이 행세하지 못하게 하라

뱅겔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악의 첫 번째 뿌리는 자아사랑이요 두 번째 뿌리는 돈 사랑이다.” 여기서 돈 사랑이라고 하는 ‘필라르 귀로스’라고 하는 것은 필로스라고 하는 사랑이라는 말과 아르귀로스라고 하는 은을 뜻하는 말이 합쳐진 말이다. 옛날에는 화폐가 은이었다. 돈 사랑이 하나님사랑을 대신하는 사회가 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요, 병든 사회요, 종말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영어시편에 머니탁스라는 말이 있다. 돈이 말한다라는 뜻이다. 요즘은 돈이 말하는 시대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마다 사람들은 돈 돈 하면서 돈에 미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렇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70% 가까운 아이들의 대답이 돈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돈이 행세하고 돈이 지배하고, 돈이 다스리고 돈이 명령하는 사회, 그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사회 그리고 그 지시와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사회가 될 때 진정한 공동체가 만들어 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명령보다 돈의 명령을 더 중시하고 있는 사회가 되고 있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일본의 소설가 나쓰매 소세키라고 하는 작가가 있다. 이 발음을 좀 잘해야 하는데 이 나쓰매 소세키라고 하는 이 작가가 주로 돈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많이 썼다고 한다. ‘마음이나 그 후’라고 하는 그 책을 보면 돈 많은 사람, 돈을 갖고 자만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돈이 인간을 어떻게 철저히 파괴하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 책에서 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얘기하지만 돈을 찬양하는 사람은 아니다. 돈이 그만큼 위력이 있기 때문에 돈을 잘못 쓰게 되면 결국 그 돈으로 인해서 인생이 파괴되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경이 있다. 그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란 말 대신에 돈이라고 하는 말이 배치되어 쓰이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돈을 만드시니라,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믿음 소망 사랑 돈 그중에 제일은 돈이니라” 여러분 웃고 계시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하나님 없는 것보다 돈 없는 것을 더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 아닌가? 하나님 사랑보다 돈 사랑이 더 우선하고 있고 돈 사랑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사회가 오늘의 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돈 사랑에 빠지면 그 돈으로 인해서 우리의 인간성도 파멸되고, 그로인해서 이 세상은 불행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원수 대하듯 해라, 최영장군처럼 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한다. “돌 보기를 돈 같이 하라”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시대 속에 살고 있는가를 꿰뚫어 볼 수가 있어야 한다. 돈 보다 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고, 그분의 은혜를 통해서 진정 행복한 삶을 영해갈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살기 바란다.

by 동래중앙교회 정성훈 목사

기독교 이단 구원파의 정체와 구원파의 분파현황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은 이 배의 선사인 청해진 해운이며, 이 회사는 구원파의 교주였던 유병언씨 소유인 것이 드러나, 세간에는 구원파에 대한 관심이 폭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독교 이단의 대표적인 한 집단인 구원파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으며, 지금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까? 오늘은 그 구원파의 정체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아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교단의 이단사이비 대책위원회 서기였던 이정환 목사님이 이단대책위원회에 보고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구원파의 시작 

1961년 11월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의 영향으로 ‘죄사함을 깨달았다’는 대구칠성장로교회 목사 권신찬과 1962년 4월 미국인 독립 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을 받은 당시 대구문화장로교회 교인이었던 유병언에 의해 대구에서 시작되었다(권씨와 유씨는 그 후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이로 보건대 구원파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이단이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된 이단이라 할 수 있다.

2. 극동방송과 구원파

이 두사람은 공통적으로 ‘복음과 죄사함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확신’하고 1963년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끊고 독자적인 선교활동을 하다가 1966년 2월 현 극동방송의 전신인 국제복음주의 방송에 방송선교 담당목사로 부임하였다. 방송선교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하던 중 1969년부터 1982년까지 ‘평신도 복음선교회’라는 명칭으로 청취자들을 규합 활동하였다.   1974년 2월 정통교회인 한국기독교장로회를 비롯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대한감리회, 하나님의성회, 구세군, 복음교회가 공동으로 ‘권신찬 목사의 잘못된 설교가 시정되지 않을 경우 극동방송 청취 거부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질의서를 극동방송에 전달하였다. 당시 극동방송을 운영하던 TEAM 선교부는 숙의 끝에 극동방송 탈취음모를 꾸미던 구원파 직원11명을 1974년 7월 30일자로 해고하고 권신찬 목사를 해임하였다.

3.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창립과 유병언의 사업

모임의 구심점을 상실한 이들은 1981년 ‘기독교복음침례회’를 창립하여 교파를 형성하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 초 유병언과 함께 딕 욕의 성경학교 동문인 박옥수목사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설교하며 일찍 독자노선을 선포하고 1982년부터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유병언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삼우 트레이딩이라는 자수회사를 인수하여 사업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1978년에는 이창범목사(인천지부 책임자)가 500명의 교인들을 이끌고 집단이탈 하였으며, 1983년에는 이복칠(이요한)목사가 역시 유병언의 사업을 비판하다가 집단폭행을 당하고 전국적으로 5천명의 교인을 이끌고 이탈하였다.   유병언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주식회사 삼우 트레이딩, 주식회사 세모, 세모 스쿠알렌, 세모관광등의 회사를 운영하다가 1991년 50명의 고소인에 의해 사기죄로 구속되어 1992. 1.30. 8년형을 선고 받았다(송재화 여인을 통해 사업자금을 모으기 위해 사채모집의 사기를 행한 것이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 한국사회를 경악시키고 이단집단의 폐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그러나 아직까지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있는 박순자 여인과 오대양 집단변사사건(1987년)도 구원파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었으나 물증을 확보하지 못함으로 당시 구원파에 몸담고 있던 신자 6명이 위장자수하는 선에서 수사는 종결되었다.

4. 구원파의 분파와 교세 

현재 구원파는 권신찬 유병언에 의해 설립된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여기서 이탈한 이복칠(이요한)의 ‘대한예수교침례회’, 그리고 박옥수의 ‘대한예수교 침례회’등 세갈래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으나 신학적 뿌리가 같으므로 가르치는 내용이 동일하다.

구원파는 1974년 극동방송 탈취음모를 저질렀다가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1983년 신도들의 헌금으로 사업하는 것을 반대하던 구원파 신도 폭행사건으로 5명이 구속되었으며 1987년 오대양 변사사건(32명 살해당함)의 유력한 혐의자로 지목 받았으며 이 사건으로 구원파신도 6명이 구속되었으며(위장자수) 구원파의 기름부음 받은 종 유병언은 사기혐의로 1991년 구속되어 8년형을 선고 받기도 하였다.

한편 권신찬은 1964년 대한예수장로회(통합) 경북노회에서 목사직 면직과 출교처분을 받았으며 1984년 예장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으며, 그 후 기독교복음침례교회(구원파)는 대한민국의 모든 기독교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현재도 구원파중 유병언이 이끄는 복음침레교회는 지금까지 지속해 온 포교활동과 사업을 계속하고 있으나 지금은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반면에 박옥수계열은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대형집회 및 방송매체를 활용한 포교활동과 함께 학원선교 및 직장선교에 주력함으로 그 세력이 크게 신장되고 있다.

구원파의 교세는 국내에 약180여개 지역교회와 미국, 캐나다, 독일등 주요도시지역 교회와 남미의 브라질 등 50여개의 해외교회를 두고있으며 방송매체를 이용한 포교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또 현재 중국에 비밀리에 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포교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미국사람들은 자신의 목숨값을 얼마로 계산할까?

사람 목숨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우리는 이런 짓을 너무 쉽게 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가장 먼저 대두되었던 것이 바로 비용 문제였고, 또 가장 쉬쉬하고 있는 것도 비용문제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런 비용문제를 꺼내는 것 자체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분노한다.

공리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비용과 편익분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자동차를 이용하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기고, 그렇게 죽는 사람이 미국에서 해마다 4만명이 넘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자동차 사용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는커녕 제한속도도 낮추는 걸 꺼려한다.

석유파동이 일던 1974년 미국 의회는 전국적으로 제한속도를 시속 55마일(시속 90킬로정도)로 정했다. 이유는 에너지 절약이었지만, 속도를 낮춘 덕에 교통사고 사망자 수도 줄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미국의회는 다시 그 제한을 풀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주에서 제한속도를 시속 65마일로 상향조정하였다.

운전자들은 시간을 절약했지만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늘었다. 당시에는 누구도 비용, 편익분석을 이용해, 운전속도를 높여서 생기는 이익이 목숨이라는 비용을 들일 정도로 가치가 높은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경제학자 두 사람이 이 계산에 도전했다. 이들은 제한 속도를 높여 얻는 이익 하나가 직장 출퇴근 시간이 빨라지는 것이라고 보고, 절약되는 시간의 경제적 이익을 계산한 뒤에 (평균임금을 적용해 시간당 20달러로 계산) 그 이익을 추가로 발생한 사망자 수로 나누었다. 그러자 미국사람들은 운전 속도를 높이는 편의를 위해 사람 목숨의 가치를 사실상 1인당 154만달러로 계산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것은 시속 10마일을 더 빠르게 차를 몰 때 한 사람을 희생해 얻는 경제적 이익이었다.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 중에서)

프랑스 선교사로 20년을 사역한 성원용 목사의 간증

프랑스 선교사라고 하면 좀 생소하게 느낄 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그곳은 기독교국가가 아닌가? 그런 곳에 선교하러 갈 이유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죠.

2003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조사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이 83~88%에 육박하며 개신교 2%, 유대인 1%로 조사된 결과가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의 행정기관인 유럽 공동체 위원회(EC)에서 지원하는 정규 설문, 통계, 조사 기관인 유로바로미터(Eurobarometer)에서 2005년 공식적으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 시민의 34%가 신을 믿는 다고 답하였으며, 32%가 어떤 종류의 영적인 존재나 신등을 믿지 않으며, 27%는 삶의 영향을 미치는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일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2007.1월 카톨릭계 언론인 카톨릭 세계 뉴스(Catholic World News)에서 비공식적으로 조사한 설문 통계에 따르면 약 51%가 카톨릭이며 약 31%가 무신론자이거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약 4%가 무슬림, 약 3%가 개신교, 약 1%가 유대교, 약 10 %는 무응답이거나 기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사례가 있습니다.

프랑스에는 저의 신학교 동기였던 배윤재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곳이기도 해서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로 20년을 사역한 성원용 목사님께서 기독공보에 어떻게 프랑스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는지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 옮겼습니다.


프랑스선교사 성원용 목사님의 가족 사진 @사진 기독공보나는 선교사로 헌신하여 타문화 권에서 사역을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장신대에서 신학도로 7년을 보내는 동안 늘 기도하면서 소망하고 준비한 것은 오직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는 것이었다. 민족복음화가 나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기 중에도 교회, 직업훈련원, 기도원을 오가며 사역하는 일에 힘썼고, 방학 때는 지리산 전도, 여러 지역의 집회를 인도하며 보냈다. 그러노라면 구두 밑창이 닳아서 구멍이 나곤 했다. 돌아보면 그 때가 내 생애에 가장 뜨겁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신대원을 마치고 전임전도사로 명성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총회파송 프랑스 선교사로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장신대 학부와 신대원 동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선교사가 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 혼란스럽기까지 했지만 돌이켜보면 감사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꿈이 무너뜨리시고 그 자리에 주님의 꿈을 심으셨기 때문이다.

불어 한마디 못하는데다가 제주도가 가장 먼 여행길이었던 나에게 프랑스 파리의 생활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세계인의 로망인 프랑스 파리에서 살면서 날마다 에펠탑을 보고 세느강을 오가며 멋진 카페에 앉아 샹송을 들으며 진한 엑스프레스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다는 기대와 더불어 언어의 장벽, 힘들다고 소문난 유럽 디아스포라 한인목회, 자존심과 콧대가 높은 프랑스인들과의 관계, 유럽이 선교지인가에 대한 확신부족, 유럽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한국목회를 할 수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내심 두려워지곤 했다. 한 마디로 선교사로서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3개월 동안 준비하고 파리에 도착하여 정착하는 5개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시골 어머니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파송예배가 있는 주일 새벽에 시골에 화재가 난 것이다. 어둠의 영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우리 부부의 마음속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확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구나! 유럽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구나!”

프랑스 사역을 시작한 지 1달 만에 결국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부모님들께서는 선교의 길을 떠난 아들을 생각하여 장례를 마친 후에 소식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으신 파송교회 김삼환 목사님께서 비행기에서 편지 한 장을 써서 보내주셔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면 슬픔과 절망으로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사망의 그림자가 엄습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기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네 작은 예배당에 나가서 매일 기도로 주님께 매달리며 부르짖었고 그때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만져주셔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회로 발전했다. 지금은 파리에 있는 6개의 한인교회가 파리 14구에 있는 프랑스 개신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연합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있다. 나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19년 동안 새벽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그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큰 위로와 비전과 능력을 경험하고 있다. 새벽기도는 내 영성의 젖줄이 된 것이다. 고난과 아픔이 축복이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서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부르셨구나!”라는 확신과 더불어 “설익은 곡식과 같은 나를 소제 제물로 받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뜨거운 불로 볶고 갈아서 고운 가루를 만들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프랑스 땅에서 감당해야 할 구체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는 아직 불분명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프랑스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렇게 해서 나는 프랑스 선교사로서의 삶을 출발하게 되었다. 참으로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부르심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 입장에서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일이었지 주님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진행하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우리 부부가 연애하던 시절에 아내는 무지개선교회라는 곳에 나가서 불어공부를 열심히 했고 나도 그것이 부질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번 참석하곤 했었는데, 그 모임이 지금의 불어권 선교회(대표:이몽식 목사)가 되었다. 그분들이 우리 파송예배에 오셔서 격려했고 지금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협력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로 가기로 결정된 후에 우리 부부가 프랑스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하면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가 프랑스로 떠나기도 전에 성령께서 미리 기도로 준비시켜 주신 것이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못한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선교사로 부르시어 이토록 영광스러운 길을 가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도 한 없이 부족한 내 모습에 송구스러울 뿐이다.

-위 내용은 기독공보에서 가져왔습니다.

팔금도 오지 섬마을에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김승일 목사

전남 신안군 팔금도에 위치한 본교단 해양의료선교회 소속 팔금선교센터에는 34살의 김승일 목사가 홀로 사역하고 있다.

사회선교를 위해 특별한 시설이 없는 이곳에서 팔금선교센터의 사역은 ‘가물에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는 필리핀에서 온 협력선교사들이 함께 사역을 하며 활기를 띤 적도 있었지만,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 팔금선교센터에는 김 전도사 홀로 남아 다문화가정 상담 및 자녀들의 영어학습 지도, 독거노인 돌봄 사역 등의 사역을 진행하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이들이 하교하는 오후 4시쯤 되면 김 목사는 섬에서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들,특히 가정 형편이 어려운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의 집을 매일 방문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최근 방문 대상 어린이 및 청소년들이 19명으로 늘어나자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어 6명은 지인에게 위임 지도시키고 현재 13명의 아이들을 방문한다.

섬마을에서 아이들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승일목사

김 목사는 영어학습 지도 이외에도 독거노인을 돌보고 섬 목회자들의 목회를 지원하는 일도 하고 있다. 독거노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십일조로 농산물을 구입해주고 그것을 팔아 용돈을 벌어드린다. 그리고 판매수익금이 모이면 꼭 필요한 곳에 기부를 한다. 지난해 필리핀 타클로반에 태풍이 불어닥쳤을 때 말린 고구마를 팔아 필리핀 재해구호를 위해 전달하기도 했다.

2012년 한일장신대 신대원을 다니던 중, 한 교수가 팔금선교센터 사역을 추천으로 이 사역을 시작한 김전도사는 2년간 사역하기로 하고 해양의료선교회와 계약을 맺었지만, 만 2년이 지나는 시점인 지금 앞으로 2년을 더 머물기로 했다고 한다.

“2년간 제가 이곳에서 받은 것이 너무 커서 지금 떠나면 나의 잇속만 챙기고 떠나는 것이 너무 미안해요.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떠날 수가 없어요. 저는 여기 목사님들과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사랑을 받았어요. 2년간 더 사역하면서 고학년이 저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스템을 만들고, 또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 영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김일승 목사는 지난 22일(2014.4) 목포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by 코이네 뉴스

노란리본 무속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신학자의 반박

세월호가 침몰한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아직 배안에 있을 생존자의 무사귀환을 위해 노란 리본을 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노란리본이 무속적인 것이며, 반기독교적인 것이라며, 노란리본 달기를 거부하는 운동을 하는 글을 퍼나르고 있습니다. “노란 리본” 이를 신학자의 눈으로 봤을 땐 어떨까요? 서울장신대의 정병준 목사님의 글입니다.


 논쟁-정신병리학적(또라이적) 종교신념과 우익 이념의 이상한 조합

먼저 노란리본에 대한 반대글 일부를 소개합니다.

사실 근조를 나타내는 노란 리본은 나비죠 무속에 노란 나비는 저승으로 가는 영혼이랍니다. 이것을 확인하시려면  노근리 평화공원을 가보시면 금방 알 수 있어요 무수한 나비를 형상화했고 영상으로 나비가 날아오르는 것을 상영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비 리본은 주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 혼합주의에 빠져 귀신을 부르는것이므로 이러한 행위는 잘못된것임을 알려드립니다 . . .카스에도 사고소식을 이제는 그만 올리시는게 도움이될 듯 합니다. 고통과 슬픔에 힘들어 하시는실종자 가족과 유가족을 위로하고  기도하는일은계속하자구요 . . .

노랑리본

위의 글은 SNS에 떠돌아 다니는 ‘노란리본’을 비판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 글쓴이의 숨겨진 의도가 쉽게 엿보인다.

첫째. 국민적으로 확산되는 노란리본을 노란나비로 해석하고 무속행위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신학자인 내 눈에 ‘노란나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피조물이다. 그것이 저승으로 가는 영혼으로 보이지 않는다. 뭐가 문제인가?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보는 삐뜰어진 눈이 이상하다.

둘째 종교혼합주의라는 비논리적 억지주장이다. 혼합주의란 한종교와 다른 종교의 내용을 섞는 것이다. 노란리본이 무슨 다양한 종교적 의미를 섞어서 담았다고 혼합주의라고 강변하는가?

셋째 여기서 한국전쟁에서 불행하게 학살당한 노근리 주민들의 이야기는 왜 갑자기 튀어나오는가? 무슨 근거로? 이 글을 쓴 사람의 정신 세계 들어있는 이념이 비정상적 종교관과 뒤섞여 튀어나온 것이다.

넷째 아주 그럴싸하게 유가족과 실종자를 위해 기도하자고 한다. 글쓴이가 이 말을 진정으로 하고 싶다면, 쓸데없는 정신병적 망상으로 인터넷을 어지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자가 볼때, 이 글의 배후는 정치적 우익인 광신자이거나 광신자를 가장한 정치적 우익이 국민적 슬픔이 정치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싶은 동기 때문에 이런 엉뚱한 짓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글로 혼란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by 서울장신대 정병준 교수

세월호 침몰 친구 구하려 다시 배로 돌아간 양온유양이 남긴 감동 메모

절체절명의 순간에 요한복음 15장 13절의 말씀을 실천한 단원고의 고 양온유 학생. 오늘 강의 마치고 연구실에 돌아와서 이 아이의 이야기를 읽다가 통곡을 멈추기 어려웠다. 한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 아이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별처럼 살아 있기를 바라며 관련 기사를 붙인다. 고 양온유양을 통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가슴 시리게 실감한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던 지난 16일 오전 10시쯤 양봉진(48)씨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지인의 전화가 걸려 왔다. 경기도 안산 명성교회 관리집사여서 평소처럼 교회 서류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인이 시키는 대로 TV를 켜보니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단원고 2학년인 딸 온유(17)가 탄 배였다.

온유는 오전 7시쯤 엄마에게 ‘배에서 자고 일어났다’는 문자를 보내온 터다. 양씨는 곧바로 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후 1시간 동안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전화기 버튼을 눌러댔고 끝내 연결되지 않아 10시56분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온유야, 아빠다. 너를 위해 모두 기도하고 있다. 이럴 때 침착해야 하는 거야. 친구들에게도 동요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면 구조될 거라고 용기를 주렴….’

이 문자에도 답이 없던 온유가 그때 뭘 하고 있었는지 양씨는 닷새 뒤에야 알게 됐다. 딸이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지난 20일 비통해하던 그에게 구조된 딸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온유는 갑판까지 나왔다가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어요. 방에 남아 있는 친구들 구한다고.”

친구들은 양씨에게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온유는 사고 직후 갑판까지 올라왔다. 계속 갑판에 남아 있었다면 헬기로 구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래쪽 선실에서 터져 나오는 친구들 울음소리를 듣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다시 선실로 내려갔다고 한다.

23일 교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양씨는 “걔는 그럴 줄 알았어. 친구들이 배 안에 있는데 그냥 나올 애가 아니어서…”라고 했다. 그는 딸에 대해 한마디씩 할 때마다 감정을 추스르느라 안간힘을 썼다. “문자를 보내면서 ‘차분히 기다리면’ 구조될 거라고 말했던 게 가장 후회됩니다. 지금 드러난 상황을 보니 어른들 믿고 기다려선 안 되는 거였는데.”

온유는 아버지, 어머니, 세 동생과 함께 교회 사택에서 지냈다. 재주가 많아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우더니 중학교에 들어가선 새벽기도 반주를 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지난해 12월부터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친구들이 학원에 가는 오후 7∼11시가 근무시간이었다. 편의점 주인은 성실하고 손님에게 상냥했던 직원으로 온유를 기억했다.

단원고 양온유 양온유는 음악으로 환자를 치유하는 음악심리상담사가 되겠다며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2학년이 돼선 2반 반장을 맡았다. 지난해 1학년 학년대표였고 올해도 2학년 대표 선거를 준비했는데 친구가 출마한다는 말에 양보했다. 그러더니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친구를 위해 생존의 기회를 과감히 내던졌다.

영결식이 열린 22일 단원병원 장례식장에는 ‘너랑 있으면 항상 좋은 기운이 넘쳤어’ ‘천국에선 마음껏 뛰어놀아’ ‘너는 나를 기억 못할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항상 밝고 쾌활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어’ 등 온유의 죽음을 애도하는 친구들의 쪽지가 가득 붙어 있었다.

빈소를 찾은 한 친구는 “온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비타민’ 같은 친구였다”고 말했다. 이웃 주민은 “제일 예쁜 친구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 온유는 얼굴도 마음도 다 예뻤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명성교회 김홍선 담임목사도 평소 신도들에게 “온유와 얘기하면 대학교수랑 얘기하는 느낌”이라며 “참 어른스러워 배우는 게 많다”고 말하곤 했다.

온유의 빈소에는 1500명이 넘게 찾아왔다. 학교와 교회의 친구와 선후배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집안의 희망이던 큰딸을 잃었지만 부모는 오히려 조문객들을 위로하고 아직 자식을 찾지 못한 다른 실종자 가족들을 걱정했다.

지난 20일 열린 명성교회 부활절 예배는 눈물바다였다. 주보의 십일조 헌금자 명단에 온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편의점 알바로 번 돈을 쪼개 수학여행 떠나기 전 헌금한 사실이 이날 주보에 실린 것이다. 온유의 시신은 22일 발인 후 단원고와 교회를 거쳐 화장한 뒤 납골당에 안치됐다. 명성교회는 실종자와 희생자를 위해 매일 저녁 8시 기도회를 열고 있다.”

*온유양의 메모

“겁내지 마라.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기죽지 마라. 끝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 슬퍼하지 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조급해하지마라. 멈추기엔 이르다. 울지 마라. 너는 아직 어리다.” -양온유(안산 단원고2)

by 장신대 손은실 교수님의 페이스북에서 옮겨왔습니다.

교회건축의 새로운 트랜드 이제는 지역사회와 소통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교회 건축도 활발하게 변화되었다. 처음에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이 중심이 된 건축에서 주차공간을 많이 확보하는 것으로, 그리고 비전센터라고 이름하는 교육과 사회봉사를 위한 공간으로 인식이 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하든 교회가 지역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건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울 면목동에 있는 성심교회(담임 목사 김신일)는 지난 2012년 11월 18일 새 성전에 입당하였다. 처음 상가교회로 시작한 이 교회는 지역 사회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기에, 공사기간이 좀 길어지더라도 지역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세워진 이 교회는 몇 가지 특색을 갖고 있다.

첫째, 건축 단계에서부터 지역 주민을 위한 공간을 고려했다.

건축할 때 가장 중요한 목적이 ‘외부 개방’이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식당은 지역 주민들이 돌잔치를 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지하 교육부실도 동네 학원이나 어린이집에서 발표회를 할 수 있도록 개방한다고 한다.

성심교회의 자랑인 다모아 어린이 도서관

또한 교회 2층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다. 이름은 “다 모아 도서관” 교회의 자랑이자 이제는 면목동의 명소가 된 ‘다모아’ 도서관은 교인들이 직접 지은 이름으로 세상에 있는 엄마(母)와 아이들이 다(多) 모이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담겨있다. 다모아 도서관은 월요일만 휴관하고 평일(오후 1~6시)은 물론 주일에도 운영하며, 상근 직원을 두고 자체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 중이다. 특히 목요일은 교인들의 섬김으로 간식을 제공하는 ‘야미야미데이’로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의 방문이 가장 많은 날이라고 한다.   둘째, 선교사나 시골교회 목회자들을 위한 게스트룸을 만들었다.

5층에는 입출입이 자유로운 독립 공간으로 게스트룸을 만들고, 수저, 이불에서부터 드럼세탁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구비해 놓았다. 선교사나 시골교회 목회자들에게 조건 없이 내어주는 곳이라 한다.

셋째, 이 교회의 모든 공간은 ‘열린 교회’를 지향하여, 공간의 투명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교회는 폐쇄된 공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문마다 길고 네모난 구멍을 만들어 밖에서 안이 잘 보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대상의 위치를 회중석 보다 낮게 만들어 ‘섬김의 리더십’을 시각화한 점도 특징이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김신일 목사는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성심교회라고 할 때 기억나는 한두 가지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만으로도 교회가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의미가 충분할 것 같다”고 말한다. 교회가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 이 시대 교회가 꼭 간직해야 할 목회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by 코이네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