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상수리 나무

 

이스라엘 헤브론에 가면 아브라함이 장막을 쳤던 상수리나무가 있다.

하지만 이 나무의 수명 많이 잡아봐도 겨우 천 년 정도인데

지금은 너무 늙어 철골조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 아브라함의 상수리나무는 마므레에 있다 했는데, 어떻게 헤브론에 있는 것인지..

정답은 성경에 있다. 창23: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지금은 헤브론과 마므레를 구분하고 있지만 당시엔 같은 지명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브라함의 상수리나무
오래된 고목이라 철골에 의지하여 버티고 있다.

 

상수리나무
상수리나무

신약성경은 어떤 과정을 거쳐 27권만이 정경으로 인정되었나요?

질문)

현재 기독교의 성경은 총 66권입니다. 구약성경이 39권, 신약성경이 27권이죠. 그런데 이 외에도 기독교에는 구약성경의 외경이 있고, 신약성경에는 위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경처럼 읽혀지거나 전해져 온 성경이 많이 있다는 것이죠. 지금 정경으로 인정되고 있는 66권은 어떤 경로를 통해 정경이 되었나요?

답변)

초대교회 사도들은 자신의 당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전도에 힘썼지요. 또한 당시엔 예수님의 역사성에 대해 의심할 나위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존을 증명해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시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간직하던 그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자 성경을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복음서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하게 되자 이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야 할 필요가 있어 사도들은 교회에 서신 형식으로 기독교의 교리와 생활 규례 등을 적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이단들이 생겨나 그들의 필요에 따라 사도들의 이름을 빙자하여 많은 글들을 적어 성경처럼 유포하였고, 이것이 교회를 무척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에 새로운 경전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약성경 후보에 해당하는 많은 복음서, 행전, 편지(서신) 등의 문헌들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서 분류하였습니다.

1.사도로 인정되는 이가 직접 기록하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가 기록한 문헌.
2.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고 믿을 수 있는 문헌.
3.다른 문헌들과 모순되는 내용이 없는 문헌.
4.믿음과 직제가 통합된 보편교회(Catholic Church)에서 사용되기에 적합한 문헌.

이에 따른 당시의 결론을 유세비우스의 분류에 따라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호모루구메나(경전성에 의심이 없는 문서) – 4복음서, 바울 서신, 베드로 전서, 요한 1서
2.안티레고메나(경전성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서) – 베드로 후서, 요한 2-3서, 유다서, 야고보서
3.노타(경전성 인정은 어려우나, 잘 알려진 문서) – 베드로 묵시록, 요한 묵시록, 디다케, 바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 등

키릴루스는 이 중에서 호모루구메나와 안티레고메나를 합쳐 26권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이는 현재의 신약성경 구성을 결정하는데 뼈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키릴루스가 ‘노타’로 분류했던 요한 묵시록을 호모루구메나로 보아야 하며, 총 27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관철된 27권의 신약성서 구성은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구약성경 목록과 더불어 27권을 신약정경으로 최종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카톨릭 교회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일부 동방교회는 구약성경의 아포크리파(외경)와 신약성경의 안티레고메나가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논의 끝에 결국 트룰란 에큐메니컬 공의회(692)에서 동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결정 일부를 수용하여 신약성경 목록을 공유하고, 구약성경의 아포크리파는 일단 정경으로 간주하는 개선된 태도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마무리 된 것입니다.

by 코이네 자료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질문)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 보면 주님께서 성령을 훼방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는 죄는 무엇인가요?

답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유독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이 사함을 받지 못할까요?

Louis Berkhof은 이 문제에 대해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나 성령의 역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신 32:39),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 일과 대조하며(레 24:1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인 레위기 24장1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생긴 배경을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곁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주님은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단언하시면서(마 12:22-28), 자신이 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은 인자를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2).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신적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말로 극단적인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을 말하는데(마 9:3-4), 열왕기하에 보면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살 수 있는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엘리야가 그 사신을 만나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느냐고 말하면서 그가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왕하 1:1-18). 여기에 나오는 바알세붑은 불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으로 에그론 사람들은 이 ‘파리의 주인’이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고 믿은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병자를 고칠 때 바리새인들은 그 성령의 사역을 더러운 ‘죽은 파리’(전 10:1)의 신에게 부탁하여 병을 고친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막 3:22).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무서운 반역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회개시키는 성령 자체를 훼방하기 때문에 절대로 회개가 되질 않아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히 10:26-27).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대하여 단순히 의심하거나 무의식중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러한 주님의 이적이 나타나고 내적으로 확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람의 역사인지를 알지 못하여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알면서도 귀신의 역사로 중상 모독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며 경고하던 대상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활동을 믿으며(행 23:6-8),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가르쳤던(마 23:2-3), 이스라엘의 선생(신학자와 목사)들입니다(요 3:10). 사실 이들은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그분께서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분별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알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고 폄하하고, 또 본질을 흐리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도록 방해하였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으로 이루어지는 성령훼방죄,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진리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 거역에서 극에 달합니다.이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신의 길을 따라가기로 선택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결정한 결과입니다.양심은 성령의 감화에 대한 계속되는 거절로 인해 화인 맞고, 따라서 자신이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음을 거의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을 범함으로 양심이 고통 받는 사람입니다.비참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보통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살지 않은 결과입니다.양심이 고통 받는 사람은 둘 중 한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니다.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굴복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잘못을 올바르게 고침으로 성령의 감화에 응답하든지, 아니면 양심에 화인 맞고 성령을 침묵시킴으로 고통스러운 자극을 제거 합니다.

후자의 길을 택하는 사람이 회개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양심이 영원히 무감각해져 회개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그는 고의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못할 곳에 두었습니다.그의 선택을 고집스럽게 악용함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악이 마침내는 선처럼 보이고, 선은 악처럼 보입니다.그것이 바로 죄의 기만성입니다.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눈인 양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비춰진 빛에 순종하는 생애를 계속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경고 장치입니다.그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영원한 멸망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이고 고집스러운 불순종은 마침내 고칠 수 없는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 무시했던 바로가 바로 그 실례가 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용서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한 사람이 용서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훼방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용서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성령의 경고하는 음성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 위해 하늘과의 교통의 줄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평탄한 삶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고난의 귀한 열매

우리 인생에 형통의 때와 곤고함의 때를 겸하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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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이 만약에 소금에 절여지고 냉동에 들어가는 고통이 없다면 썩고 말 것 이라는 어느 시인의 글귀처럼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없다면 사람도 역시 부패하고 썩어지고 말 것이다. 인생에게 저마다 말 못할 고난이 있고 감당해야 할 짐들이 있는데 그것을 마냥 불평하고 감당해 내지를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고난을 통과한 인내의 사람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삶의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있고 그가 감당하여야 할 삶의 무게들이 있다.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나는 단 한 번도 고난을 경험해 본적이 없다”고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 때가 되지 못하였거나 그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지나가는 어떤 삶의 경험이겠거니 라고 생각하는 긍정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일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이런 사람은 고난도 즐길 줄을 아는 대범한 사람이거나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삶의 무게로 짓눌려져 올 때 대처하는 방법을 보면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의 태도를 통해 그 사람을 알아 낼 수가 있다. 주님께서 인생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자녀로 하여금 고통에 빠져 괴로워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인내로 통과함으로 인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심과 또 그 결과물로 얻어지는 열매들을 기대하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바른 길로 성장시키기 위해 사랑의 매를 들듯이 주님도 우리들에게 자녀의 삶을 살고 당신을 향한 바른 뜻을 찾도록 인도하시기 위해 풀무 불에 담그실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과한 자녀에게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빛이 나온다.
금이 불에 연단되어 불순물이 없는 깨끗한 정금이 되어 나오듯이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를 그렇게 다루실 때가 있는 것이다.

삶의 평탄한 길에서는 절대로 얻어질 수 없는 그러한 귀한 열매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우리의 삶이 소금에 절여지고 냉장에 들어간 생선처럼 고통을 통과하면 우리의 영이 썩지 않고 신선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 고통도 없이 평탄하게 살아만 간다면 영은 세상과 타협하여 영적인 타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시편기자는 고백하기를 주님께서 인생들에게 형통의 때와 곤고한 때를 겸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였다. 형통만 하면 썩어질 세상 것들로 인하여 썩어질 것이요 곤고하기만 하면 또 쓰러질 인생들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골고루 섞어서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삶에 주어진 두 길이라면 형통함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고 고난은 기도로 승화시켜 그분의 뜻을 깨닫는 성찰의 시간으로 삼아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얻을수 있는 귀한 체험을 통해 결실을 맺으라는 것이다.

그 진리가 깨달아 지는 사람은 그것을 삶에 적용시키고 반드시 그것을 통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 확신해본다. 우리의 영이 썩지 아니할 인생을 살아가도록 우리 삶에 허락하신 그 고난의 때를 허락하신 주님을 기뻐하고 그 분이 허락하신 인생을 감사하며 내게 주어진 시간만큼 최선을 다해 그 시간들을 살아내는 인생이 되어야 함을 또 다시 깨달으며 하루의 시작의 문을 감사함으로 열어본다….
우리 인생에 형통의 때와 곤고함의 때를 겸하여 주신다….

이미례by Mirye Lee

이미례님은 플로리다선교리포트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떠나야 성공한다

사람은 가까이 갈수록 실망이 더욱 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런 결점과 실망스런 모습을 보고 실망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도울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긍휼의 마음을 갖고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약점을 비난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하기에 서로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떠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요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내가 떠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 즉 버려야 하는 것, 가지고 가지 않고, 두고 가야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새로운 목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의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거하는 것은 갈대아 우르 지방으로 우리가 잘 아는 문명의 발생지이고, 엄청나게 비옥한 땅이어서 농사도 잘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족장정도의 지위를 가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 그리고 안정되고 높은 지위가 보장된 그런 곳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 두고 가야할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얻을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다른 부연 설명이 없습니다. 그냥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 땅이 얼마나 비옥하다느니 가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느니 그런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났습니다.

자기 주도형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할 때 내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사명이 주어지면 일을 한답니다. 친화형의 사람들은 누구와 함께 하는가? 예를 들어 가나안 땅에 네가 좋아하는 누구도 간다더라 그러면 간답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일을 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은 옆에서 세게 이끌면 간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령하시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 땅이 얼마나 좋고 거기서 살면 지금보다 어떻게 좋다는 것이 아니라, 떠나면 내가 네게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첫째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왜 떠나라고 하시나요? 여기 머물러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 바로 큰 민족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땅으로 널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즉 네가 복이 되어서 너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이 너때문에 복을 받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종의 안보협약을 맺으십니다. 널 축복하면 내가 그를 축복할 것이요, 널 저주하면 그 저주가 저주한 자에게 돌아가도록 손봐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겠다, 하나님의 뜻인지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스스로 속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주저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안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야 해볼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이 있으면 그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순종하며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더욱 깊은 신뢰의 관계를 쌓으세요. 더욱 깊고 성숙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인생을 장막을 걷는다는 표현으로 하고 있습니다. 장막이란 텐트입니다. 한번 쳐놓으면 사시사철 눈이 오고 비가 오더라도 그대로 있는 집이 아닌, 때가 되면 걷어서 옮겨야할 것이 장막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이런 장막에 묘사하며 때가 되면 옮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사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움직일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무엇이냐? 잘 옮길 줄 아는 것입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성경이 맞습니까? 성서가 맞습니까?

성경과 성서는 어떻게 다른가요? 아니면 같은 뜻인가요?

먼저 대한성서공회의 공식 답변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聖經)”이라고 부를 것인지, “성서(聖書)”라고 부를 것인지, 가끔 논란이 됩니다. 거룩할 “성(聖)” 자에 경서(經書) “경(經)” 자를 쓰면 우리의 경전을 높여 부르는 이름인 것 같고, 거룩할 “성(聖)” 자에 책 “서(書)” 자를 쓰면 그 경전을 조금은 폄(貶)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서 굳이 성서라고 하지 말고 성경이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약전서와 구약전서를 거룩한 경전이라고 하든 거룩한 책이라고 하든 그것이 그렇게 예리하게 의미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경전을 다만 중국 전통에서는 성경이라고 불러오고 있고, 일본 전통에서는 성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전통을 융합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란 말도 쓰고 성서라는 말도 쓰고, 「성경전서」라고 하여 경과 서를 절묘하게 융합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성경이든 성서이든 그것은 일반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일컫는 보통명사입니다. 기독교가우리나라에서 우세한 종교가 되면서 그 용어를 기독교가 사유(私有)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성경이라고 하지 않고 성서라고 하는 것은 일본에서 불경을 성경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과 구별하려고 한 것 같다는 말을 전 일본성서협회 총무 사토 목사에게 들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정도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용어에 “성경대(聖經臺)”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불경을 놓고 읽는 독서대(讀書臺)입니다. 이제 “성경”은 “성경전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 두 자를 취한 것입니다. “성서”는,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만, “성경전서”의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 다가 다 경전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경이나 서에 가치판단의 구분은 없습니다. 예언서들은 으레 예언서/선지서라고 부르지 절대로 예언경/선지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야고보서 라고 하지 로마경 고린도전후경 야고보경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경전의 이름은, “성경”도 “성서”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의 고유한 이름은 “언약서/계약서”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약”과 “신약”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들과 공유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기독교의 경전의 성격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일면을 밝혀주기도 합니다. 계약서로서의 경전입니다. 무슨 고전으로서의 경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갑(甲)이 되고 우리가 을(乙)이 되고 중간에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증인이 되시어서 맺은 언약/계약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경전입니다. 고전적 가치나 철학적 가치로 말하자면 불경이나 유교의 경전이 성경보다 못하겠습니까? 성경이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그것이 최고의 고전이라거나 최고의 철학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은 계약서이기 때문입니다. 계약서는 계약 당사자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고전으로 읽지 말고, 하나님의 요청과 우리의 마땅한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계약서로 읽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 종교가 소원성취를 우선적으로 발생한 것인데 반하여 기독교는 “내 뜻 이루어 주십시오”의 종교가 아니라 “당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는 종교입니다. 신약과 구약이 합쳐 있는 성경전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청이 들어 있는 계약서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갈림이 이 계약을 지키느냐 어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고, 너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w박영호목사by 박영호 목사

*박영호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미국 시카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시카코에 있는 ‘약속의 교회 PNF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청소년 내면세계도 더욱 건강해져

교회생활에 나름 충실한 아이들의 내면세계는 어떨까? 한국성결신문과 서산교회(담임 이기용)가 전국 중고등부 학생 14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다.

이번 조사에 임한 학생들 중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고 응답한 아이들이 89.2%엿고, 5년 이상 교회에 출석한 학생들 비율도 76%에 달했다. 다시 말하면 이번 조사에 응한 아이들 대부분이 그래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꽤 충실히 하고 있는 아이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아이들에게 우울증에 관한 질문을 하자 조사 대상 학생들 가운데 19.7%가 “자주 우울하다”라고 대답했으며, “가끔 우울하다”가 38.7%였다. 절반이 넘는 58.8%가 평소 자주 우울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절반에 육박하는 41.8%의 학생이 “자살충동을 느낀 적 있다”고 대답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교회 청소년들 역시 우울증, 자살충동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있다. 아이들의 신앙에 대한 태도의 정도에 따라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느끼는 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신앙이 (삶에 있어) 매우 많이 중요하다”고 54.1%가 대답했는데, 이들은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거의 없다”라고 대답한 비율이 63.3%였고, 우울함과 슬픔의 감정에 대해 “거의 없다”라고 대답한 비율이 42.4%였다.

반면 신앙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1.5%) 혹은 중요하지 않다(0.5%)라고 대답한 학생 가운데 우울과 슬픔을 자주(39.3%) 혹은 매우 자주(34.3%) 느끼는 것으로 분석됐다.

가출경험에 대해서도 신앙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학생들은 신앙의 중요성을 모르는 학생들보다 비율이 덜 높았다. 또 인정 받고 사랑 받는다고 스스로 느끼는 학생들일 수록 덜 우울한 감정에 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외에 흡연과 음주운전, 음란물 시청 등도 신앙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 비혀 현격히 낮은 응답을 보였다.

신앙이 좋을 수록 좋지 못한 생각과 품행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로 신앙이 아이들의 일상생활과 내면세계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BY 코이네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