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이중직 사역에 대한 오해
이중직 사역에 대한 오해 “목사님, 이제 교회도 꽤 커졌는데 언제 다시 전임으로 사역하실건가요?” 주변 목사님들께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목회자들이 이중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교회가 작아서 하는 알바’, ‘돈 안 되는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하는 돈 되는 일’, ‘소명이 부족한 사람의 차선책’ 정도일겁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도 만약 이 […]
코이네 박동진 목사의 칼럼
이중직 사역에 대한 오해 “목사님, 이제 교회도 꽤 커졌는데 언제 다시 전임으로 사역하실건가요?” 주변 목사님들께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목회자들이 이중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교회가 작아서 하는 알바’, ‘돈 안 되는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하는 돈 되는 일’, ‘소명이 부족한 사람의 차선책’ 정도일겁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도 만약 이 […]
우리는 지금 장편영화를 찍고 있습니다 •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오랫동안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차이를 그저 ‘분량’으로만 알았습니다. 짧으면 단편, 길면 장편.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지요. 완전히 틀린 답은 아니었지만, 소설이라는 세계와 그 속에 깃든 삶의 결을 헤아리지 못한 얕은 이해였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단편소설은 ‘사진’과 같습니다. 사진은 한 사람의 긴 인생을 모두 보여주지 않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
네팔-티베트 홍수를 보고 인류가 망했다, 종말이 왔다, 이번 생은 망했다와 같은 한탄들. 이같은 종말론적 관점은 세계의 불평등에 대한 우리의 시야와 분노를 흐릿하게 한다. 결국에 그런 넋두리는 자본주의 재난 체제를 지속시키는 역할에 복속된다. 우리의 애도에는 분노가 담겨 있어야 한다. 네팔의 탄소 배출 누적량은 고작 0.1%다. 또 네팔은 전 세계 기업들이 삼림 벌채에 미쳐 있는 동안, 오히려
그냥 놀러 가면 안 됩니까: 목적 없이 노는 수련회가 필요한 이유 교회 수련회 기획 회의를 떠올려 보십시오. 첫 질문이 무엇입니까? 올해 주제를 무엇으로 할까. 강사는 누구를 모실까. 집회는 몇 번 할까. 결단의 시간은 언제 배치할까.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레크리에이션도 넣어야죠. 애들이 지루해하니까.” 여기에 이미 답이 들어 있습니다. 노는 시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집회를
타인은 지옥이다: 지옥이 되기 쉬운 목회현장 오늘 까지, 이번 달만 세 번째다. 사랑하는 동료 목회자와 사모님이 공황발작을 겪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으며, 정신적으로 무너져간다는 소식이다. “개인의 연약함”으로 치부할 수 없는, 구조적인 신음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자주 오해되는 사르트르의 이 말은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규정하고, 나의 존재를 옥죄어 결국 “내가 나로 살 수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를 때마다 삶의 방식이 바뀌듯, 신앙이 표현되는 양식 또한 때와 장소에 따라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본질과 중심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그 신앙을 담아내는 그릇과 형태는 공동체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환경에 발맞추어 새로워져야 합니다. 성경 민수기 28장에 배치된 제사 규례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전환에 따른 신앙 형태의 재정립’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권력의 찬탈인가, 생명의 헌신인가 어느 시대, 어느 공동체나 지도자의 부재(不在)보다 무서운 것은 ‘거짓 지도자의 출현’이다. 특히 공동체가 위기를 맞이하거나 긴 방랑의 피로감에 젖어 있을 때, 사람들의 상처와 결핍을 파고드는 선동가들은 언제나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성경 민수기 16장에 기록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은 참된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를 구별하는 가장 선명한 영적 시금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거짓
종교가 필요할까? 현대 사회는 철저한 ‘효용과 가치’의 논리로 움직입니다.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 “비용 대비 효율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 종교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던져집니다. 과학이 세계를 설명하고 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는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예배하고 종교적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어떤 실질적인 효용이 있느냐는 회의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인들의 질문은 신선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해야 할 대표적인 죄로 우상숭배를 꼽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나 바알, 아스타롯 같은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 앞에 절하는 모습을 보며 의아해하곤 합니다. ‘어떻게 저토록 어리석을 수 있을까?’ 그러나 성경이 전 역사를 통틀어 우상숭배를 가장 치명적이고 대표적인 죄로 지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과 맞닿아
구약 성경 속 레위기 25장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대한 사상적 충격을 안겨줍니다. 무한 경쟁과 소유의 극대화를 당연시하는 세상 속에서, 성경은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경제적 파국을 맞이한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건져내야 한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바로 ‘고엘(Goel, 기업 무를 자)’ 제도가 있습니다. 고엘 제도는 가난으로 인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기업)를 팔아야 했거나, 심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