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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네 박동진 목사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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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공경은 왜 신앙의 척도인가? 레위기 19:32이 말하는 영적 질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새로움’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시대입니다. 기술의 수명은 짧아지고, 어제의 지식은 오늘의 유물이 됩니다. 이러한 효율성의 논리 속에 ‘오래된 것’은 자연스럽게 ‘낡은 것’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세속적 가치관은 교회 담장 안까지 침투하여, 성경이 그토록 강조해 온 ‘노인 공경’의 가치를 단순히 도덕적인 권면이나 구시대적인 예절 정도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9:32은 우리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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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결혼의 위기: 깨어진 환상 너머, 성숙한 소명으로 가는 길

현대 사회에서 결혼은 더 이상 당연한 풍습이나 안정적인 정거장이 아닙니다. 급변하는 가치관과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결혼의 기초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으며, 수많은 부부가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든 밀물처럼 밀려드는 갈등과 스트레스에 직면합니다.  1. 현대인의 취약성과 결혼에 대한 비정상적인 기대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무한한 야망과 현실의 한계 사이에서 깊은 존재론적 상처를 입고 살아갑니다. 과거에는 신의 섭리나 공동체적 가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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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의 재를 치우는 손길, 그곳에서 영성은 완성된다

성막의 아침은 거룩한 분주함으로 시작됩니다. 밤새 타오른 번제물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나면, 제단 위에는 거뭇한 ‘재’가 남습니다. 구경꾼들의 눈에는 화강암처럼 단단한 화력과 화려한 불꽃이 예배의 절정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그 불꽃이 꺼진 뒤의 ‘뒷정리’를 제사장의 가장 세밀한 직무로 명하셨습니다. 레위기 6장에 나타난 ‘제단의 재 처리의 영성’은 오늘날 우리에게 세 가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첫째, 거룩함은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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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허물을 덮는 붉은 은혜: 부지중의 죄와 속죄제

우리는 흔히 ‘죄’라고 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의도적으로 저지른 악행만을 떠올립니다. 남을 속이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탐욕에 눈이 멀어 행한 ‘알고 지은 죄’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 특히 레위기 4장의 속죄제 규정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또 하나의 치명적인 영역을 조명합니다. 바로 ‘부지중(unintentionally)에 지은 죄’입니다. 모르고 한 잘못도 ‘죄’인가? 레위기 4장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나 족장, 혹은 평민이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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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밖, 수치의 골짜기에서 피어난 영광의 꽃

영문 밖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성 안’을 지향합니다. 성벽은 안전을 보장하고, 성 안의 질서는 안락함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진영 안(Inside the Camp)은 하나님의 임재와 공동체의 보호가 머무는 거룩한 구역이었습니다. 반대로 ‘진영 밖’은 부정한 자들이 격리되고, 오물과 재가 버려지며, 저주받은 죄인의 처형이 집행되던 소외와 수치의 공간이었습니다. 레위기 4장의 속죄제 규례는 이 장소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제사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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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진영 밖 배설물 버리는 곳을 ‘정결한 곳’이라 한 이유

역설적인 표현, ‘정결한 곳’ 레위기를 읽다 보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표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레위기 1장 16절은 새를 번제로 드릴 때 모이주머니와 그 속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를 버리는 곳에 던지라고 말하며, 그 재가 옮겨지는 장소를 뜻밖에도 ‘정결한 곳’이라고 부릅니다(레위기 6장 11절). 타고 남은 재와 찌꺼기가 모이는 장소를 왜 성경은 ‘정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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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위에 놓인 것은 ‘제물’이 아니라 ‘나’였습니다

성막의 뜰, 자욱한 연기 사이로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비명 섞인 소리가 들립니다. 레위기 1장을 읽다 보면 현대의 세련된 예배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거칠고 잔인해 보이는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안수를 하고, 목을 따고, 피를 뿌리고, 가죽을 벗겨 각을 뜨는 과정들. 우리는 흔히 이 장면을 보며 하나님께 드리는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레위기의 제사 의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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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수건을 벗고, 영광을 대면하는 삶

출애굽기 34장에서 마주하는 모세의 얼굴은 경이롭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40일을 대면하고 내려온 그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광채가 감돌았습니다. 얼마나 그 빛이 강렬했던지, 백성들은 그를 가까이하기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그들과 대화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이 ‘수건’은 거룩한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배려하는 ‘자비의 도구’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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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악한 바로와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

꺾이지 않는 고집인가, 길들지 않은 야생인가 : 바로와 이스라엘   성경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그분의 뜻에 저항하는 인간의 상태를 묘사할 때 매우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출애굽의 거대한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두 부류, 즉 이집트의 제왕 바로(Pharaoh)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입니다. 성경은 바로를 향해 ‘완악하다’고 진단하고,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목이 뻣뻣하다’고 꾸짖습니다. 이 두 표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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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의 영성: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피어오르는 향기

성막의 뜰은 언제나 북적였습니다. 제물을 끌고 온 백성들로 활기가 넘쳤고, 번제단에서는 제물을 태우는 연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된 제사’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이 두꺼운 휘장을 열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풍경은 완전히 바뀝니다. 그곳은 고요합니다. 두꺼운 덮개로 가려져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은은한 등불과 자욱한 향기만이 가득합니다. 이곳에는 구경하는 관객이 없습니다. 박수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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