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선교사로 20년을 사역한 성원용 목사의 간증

프랑스 선교사라고 하면 좀 생소하게 느낄 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그곳은 기독교국가가 아닌가? 그런 곳에 선교하러 갈 이유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죠.

2003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조사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이 83~88%에 육박하며 개신교 2%, 유대인 1%로 조사된 결과가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의 행정기관인 유럽 공동체 위원회(EC)에서 지원하는 정규 설문, 통계, 조사 기관인 유로바로미터(Eurobarometer)에서 2005년 공식적으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 시민의 34%가 신을 믿는 다고 답하였으며, 32%가 어떤 종류의 영적인 존재나 신등을 믿지 않으며, 27%는 삶의 영향을 미치는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일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2007.1월 카톨릭계 언론인 카톨릭 세계 뉴스(Catholic World News)에서 비공식적으로 조사한 설문 통계에 따르면 약 51%가 카톨릭이며 약 31%가 무신론자이거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약 4%가 무슬림, 약 3%가 개신교, 약 1%가 유대교, 약 10 %는 무응답이거나 기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사례가 있습니다.

프랑스에는 저의 신학교 동기였던 배윤재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곳이기도 해서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로 20년을 사역한 성원용 목사님께서 기독공보에 어떻게 프랑스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는지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 옮겼습니다.


프랑스선교사 성원용 목사님의 가족 사진 @사진 기독공보

나는 선교사로 헌신하여 타문화 권에서 사역을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장신대에서 신학도로 7년을 보내는 동안 늘 기도하면서 소망하고 준비한 것은 오직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는 것이었다. 민족복음화가 나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기 중에도 교회, 직업훈련원, 기도원을 오가며 사역하는 일에 힘썼고, 방학 때는 지리산 전도, 여러 지역의 집회를 인도하며 보냈다. 그러노라면 구두 밑창이 닳아서 구멍이 나곤 했다. 돌아보면 그 때가 내 생애에 가장 뜨겁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신대원을 마치고 전임전도사로 명성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총회파송 프랑스 선교사로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장신대 학부와 신대원 동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선교사가 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 혼란스럽기까지 했지만 돌이켜보면 감사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꿈이 무너뜨리시고 그 자리에 주님의 꿈을 심으셨기 때문이다.

불어 한마디 못하는데다가 제주도가 가장 먼 여행길이었던 나에게 프랑스 파리의 생활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세계인의 로망인 프랑스 파리에서 살면서 날마다 에펠탑을 보고 세느강을 오가며 멋진 카페에 앉아 샹송을 들으며 진한 엑스프레스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다는 기대와 더불어 언어의 장벽, 힘들다고 소문난 유럽 디아스포라 한인목회, 자존심과 콧대가 높은 프랑스인들과의 관계, 유럽이 선교지인가에 대한 확신부족, 유럽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한국목회를 할 수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내심 두려워지곤 했다. 한 마디로 선교사로서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3개월 동안 준비하고 파리에 도착하여 정착하는 5개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시골 어머니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파송예배가 있는 주일 새벽에 시골에 화재가 난 것이다. 어둠의 영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우리 부부의 마음속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확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구나! 유럽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구나!”

프랑스 사역을 시작한 지 1달 만에 결국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부모님들께서는 선교의 길을 떠난 아들을 생각하여 장례를 마친 후에 소식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으신 파송교회 김삼환 목사님께서 비행기에서 편지 한 장을 써서 보내주셔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면 슬픔과 절망으로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사망의 그림자가 엄습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기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네 작은 예배당에 나가서 매일 기도로 주님께 매달리며 부르짖었고 그때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만져주셔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회로 발전했다. 지금은 파리에 있는 6개의 한인교회가 파리 14구에 있는 프랑스 개신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연합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있다. 나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19년 동안 새벽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그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큰 위로와 비전과 능력을 경험하고 있다. 새벽기도는 내 영성의 젖줄이 된 것이다. 고난과 아픔이 축복이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서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부르셨구나!”라는 확신과 더불어 “설익은 곡식과 같은 나를 소제 제물로 받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뜨거운 불로 볶고 갈아서 고운 가루를 만들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프랑스 땅에서 감당해야 할 구체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는 아직 불분명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프랑스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렇게 해서 나는 프랑스 선교사로서의 삶을 출발하게 되었다. 참으로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부르심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 입장에서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일이었지 주님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진행하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우리 부부가 연애하던 시절에 아내는 무지개선교회라는 곳에 나가서 불어공부를 열심히 했고 나도 그것이 부질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번 참석하곤 했었는데, 그 모임이 지금의 불어권 선교회(대표:이몽식 목사)가 되었다. 그분들이 우리 파송예배에 오셔서 격려했고 지금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협력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로 가기로 결정된 후에 우리 부부가 프랑스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하면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가 프랑스로 떠나기도 전에 성령께서 미리 기도로 준비시켜 주신 것이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못한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선교사로 부르시어 이토록 영광스러운 길을 가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도 한 없이 부족한 내 모습에 송구스러울 뿐이다.

-위 내용은 기독공보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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