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샘이 막힌 아기 위한 엄마의 40일 새벽기도 그리고 기적

눈물샘이 막힌 아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기적

울 막내를 낳았는데, 3가지 이상 증세를 가지고 태어 났습니다. 하나는 후두연화증이라는 것인데, 후두가 기형으로 아주 좁고 약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숨을 쉴 때마다 호랑이가 어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답니다. 두번째는 아토피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돌이 지나서 꽤 오랫동안 아토피로 고생을 했답니다. 세번째는 눈물샘이 막혔네요. 하지만 감사하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다 고쳐졌답니다.

오늘은 울 둘째 막힌 눈물샘을 다시 뚫은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눈에는 눈물이 나오는 곳과 나온 눈물이 다시 흘러 어가는 곳이 있답니다. 울지 않아도 눈물이 일정하게 나오고 흘러가서 눈을 지켜주는 것이지요. 울 막내 병원에 항상 우는 것처럼 눈물이 밖으로  흘러 나오고. 또 그렇게 눈물이 눈에 항상 고여 있기 때문에 눈에 염증이 자주 생깁니다. 그리고 눈이 아파 보이며, 눈꼽이 자주 생겼습니다. 이럴 때 코와 눈 사이를 잘 내리듯이 만져주면 눈물샘이 저절로 뚫어지기도 한다고 해서 정말 많이 만져주었습니다. 그런데 100일이 지나도 아이의 눈물샘은 뚫리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을 잡아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아이가 이제 겨우 100일쯤 된 날이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정말 눈물샘이 막힌 것이 맞는지 확인을 한다며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더군요. 아이가 움직이면 안된다구요. 저는 그분 말씀처럼 그저 확인만하는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 긴바늘 같은 것으로 아이의 눈물샘을 뚫는 수술을 해버리시더군요. 정말 어이가 없고, 아파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런 저에게 의사선생님, 너무도 태연한 표정으로 100일 지나도 뚫리지 않으면 뚫어야 하는 것이라며 수술을 하셨답니다. 그저 잠이 드는 수면제를 먹였고, 마취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기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정말 경기 들린 아이처럼 피눈물을 쏟아가며 울고 있는데 정말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그나마 수술이 성공했다면 좋았을 것인데, 한쪽 눈은 뚫렸지만 한 쪽은 여전히 막혀있다고 합니다.

수술 한 뒤 우리 아이 잠을 자지 못하네요. 낮에도 밤에도 잠을 견딜 수 없어 연신 고개를 떨구면서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수술할 때 수면제로 잠은 재웠지만 그 고통이 얼만큼 컸겠습니까? 그런 아픈 기억이 남아있어 아마 잠이 들면 또 그런 심한 고통이 올까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수술하기 전에는 밤 10시도 되기 전에 잠이 들었는데, 수술이후에는 새벽 2시가 지나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아니 잠을 참는 것이죠. 그렇게 힘들어 하는 아이를 보며 모두 제 잘못인 것 같아 저는 또 죄책감에 시다려야했구요. 그래서 저는 10시가 지나면 아이를 업고 찬양을 불러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새벽2시가 지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 잠이 들었답니다.

그런 어려움이 계속 되는 순간에도 아이의 한쪽 눈은 여전히 그전처럼 눈꼽이 끼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또 한 마디씩 거들더군요. 그 일 때문에 속상해도 제가 제일 속상한데, 남의 일이라도 왜 그리 무심히 말을 하는지, 정말 아무 생각없이 아이가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하듯이 제 마음엔 그렇게 던져진 말들로 인해 시퍼렇게 멍이 들어갔습니다. 그저 기도만 해주면 좋은데 말입니다.

의사와 다시 상담을 했습니다. 수술하면 이번엔 확실하게 치료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 의사는 그런 저의 기대를 완전 저버리더군요. 수술을 다시 한다고 해도 뚫린다는 보장이 없다네요. 뚫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아주 애매한 말만 늘어놓고 선택은 저보고 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저는 먼저 하나님과 상의해보자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40일 새벽기도를 작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직접 뚫어 주시든지 아니면 수술을 하더라도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저의 이런 결심은 너무 큰 장애가 놓여 있었습니다. 새벽 5시에 교회에 가려면 최소한 밤10시에는 잠이 들어야 하는데, 우리 아이 그런 엄마의 사정도 모르는 채 여전히 견디다 못해 한계가 와야 잠이 들었답니다. 아이를 업고 재우다가 깜박 잠이 들어 넘어진 적도 몇번 있었구요, 그러게 힘들게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저는 겨우 2-3시간 자고 일어나 새벽기도회에 갔답니다. 저는 정말 잠이 많거든요. 지금 생각해봐도 초인적이었다 싶습니다. 엄마란 게 무엇인지.. 어떨 땐 벨 소리도 듣지 못해 그냥 잠이 든 적도 몇번 있었지만  제 나름으로 온 힘을 기울여 새벽기도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40일이 지났습니다. 40일이 가까워와도 우리 아이 별 다른 변화가 없더군요.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꼽이 끼어있었고, 새벽까지 견디다 잠이 드는 일상이 그렇게 반복되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새벽기도 40일을 거의 채운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눈에 눈꼽이 끼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놀랍고 기쁜 마음에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더니 눈물샘이 뚫렸다네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간에 고생한 것과 또 우리 아기 그렇게 힘들었던 그 시간이 주마등처럼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정말 교회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잠드는 것을 힘들어 했던 울 아기 차츰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이전처럼 정상적으로 잠을 자게 되더군요. 지금은 언제 내가 그런 일을 겪었냐는듯이 아주 밝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올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성경 말씀에 고난과 어려움이 클수록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정말 실감납니다. 네  아이 중에서 제일 힘들게 했던 울 막내이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기쁨과 사랑을 준 소중한 아이거든요. ㅎㅎ 사랑해~~~ ^^

by우리밀맘마

(우리밀맘마님은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교사이며, 블로그 “행복한맘’s”의 운영자입니다.

 

성탄절 선생님께 받은 5원짜리 선물의 추억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 중에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7살때 성탄절 전날 밤이였습니다. 요즈음은 성탄절날에 선물을 줍니다. 그런데 그때는 선물을 받으려고  너무 많은 아이들이 모이기 때문에 적당한 때에 선물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저녁에 선물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때 선물이래야 옥수수튀밥에 건빵 몇개, 굴뚝과자 몇개를 섞은 것이였습니다. 이 과자를 신문지 봉투에 몇 개씩 담아 그걸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땐 정말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도 선물이라고 받으려고 일년씩이나 기다렸습니다. 서로 먼저 받으려고 야단입니다.

마침내 제가 받을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가려는데 선생님  한분이 저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그럴까? 생각하며 따라갔더니, 선생님이 남모르게 신문지봉투의 선물이 아니라 굴뚝과자 한봉지는 뜯지도 않은채주셨습니다. 5원짜리 과자였습니다. 얼마나 기뻤느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뛰는 것같습니다.

왜 선생님께서 그 때 저만 그런 선물을 주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선물을 주시면서 제게 보내주신 그 눈빛의 의미는 항상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선생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언제나  기억했습니다. 이것이 늘 마음에 있었기에 교회를 찾게 되었고 오늘 목사가 되었습니다.

* 이 글은 한 목사님의 간증을 옮긴 것입니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공동기도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작성한 세월호 희생자와 그 가족을 위한 공동기도문

하나님,
모처럼 내리는 봄비가 참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우산도 없이 그 비를 맞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비가 마치 가족을 잃고 슬피 우는 이들의 눈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이 땅의 라헬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팽목항에서 담요를 들고 돌아오지 않는 아들딸을 기다리며
야속하게도 푸른 바다만 바라보는 엄마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계십니까?
이제는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마른 울음을 울다 지쳐 쓰러진 이들을 보고 계십니까?
공포에 질린 채 다가오는 죽음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 했던
그 착하디 착한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채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스러진 꽃봉우리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예수님의 아픈 탄식을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듣고 있습니다.

주님,
뜻하지 않은 시간에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뜻하지 않은 시간에 가족을 잃은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슬픔의 강물에 떠밀리고 있는 모든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가슴 속에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존자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이땅의 청소년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품으로 안으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십시오.

주님,
인류의 첫 사람을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 유혹하며
기어코 선악과를 따먹게 했던 그 징그러운 뱀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장과 발전 강박’에 사로잡혀 행복의 신기루를 따라 질주하는 동안,
우리는 하늘도, 이웃도, 자기 자신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모두 괴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효율과 경쟁’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인 후 세상은 죽음의 벌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그 시간에,
언론은 죽은 이들이 받을 보상을 계산하는 기민함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적나라한 우리 사회의 민낯입니다.
돈 귀신이 이 땅을 휘젓고 다닙니다.

주님,
돈벌이를 위해 생명을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기업,
관리 감독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무사안일하게 대처해온 관료들,
위기에 빠진 이들을 버려두고 제 한 목숨 구하기 위한 달아난 사람들,
그리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구조의 임무를 방기한 사람들,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비용만 계산하고 있던 사람들,
실체적 진실을 보도하기 보다는 가십거리만 찾는 언론,
마치 남의 말을 하듯 다른 이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무능한 정부,
성급하게 값싼 화해와 용서를 권유하는 교회,
그리고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살아온 우리 모두를 엄히 꾸짖어주십시오.

하오나 주님,
우리는 이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들어간 이들 말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벼랑 끝에서 오히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그들 속에서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위로를 얻습니다.

주님,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세월호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죽음이 헛되이 허비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일을 계기로 우리 문화가 생명중심의 문화로 변화되게 해주십시오.
저들의 억울한 죽음을 망각의 강물 속에 떠내려 보내지 않게 해주시고,
새로운 세상을 위한 주춧돌로 삼게 해주십시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진심으로 찬미할 수 있겠나이다.
에스겔의 해골 골짜기에 불어왔던 생기를 지금 우리에게도 보내주십시오.
아멘.

유대인의 육아법,아기목욕할 때 부모의 기도

우리는 흔히 교육이 백년지대계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실제 교육이 뭔가라고 물으면 참 대답하기 어려워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교육을 해야하는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교육으로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는지 제대로 된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또 머뭇거리게 된다. 사실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어떤 사람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국민적 합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그 어떤 사람에 대해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는 부모가 아기를 목욕시킬 때도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아기를 목욕시킬 때 몸의 부위별로 기도하면서 목욕을 시킨다. 과연 어떻게 기도하며 목욕을 시킬까?

유태인의 아기목욕 기도문

1. 얼굴을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의 얼굴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소망을 갖고 자라게 하소서”

2. 입안을 씻어주면서

“이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복음의 말이 되게 하소서”

3. 머리를 감기면서

“하나님, 우리 아기의 머릿속에는 지혜와 지식이 가득 차게 하옵소서”…

4. 손을 닦아주면서

“이 아이의 손은 기도하는 손이요, 사람을 칭찬하는 손이 되게 하소서”

5. 가슴을 닦아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기 가슴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6. 배를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기의 오장육부는 건강하여 튼튼하게 자라게 하소서”

7. 성기를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기가 자라나 이 거룩한 성기관을 통해 거룩한 백성을 만들게 하옵소서. 결혼하는 날까지 순결을 지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고 축복의 자녀를 준비하게 하소서”

8. 다리를 씻겨주면서

“부지런한 다리가 되어서 온 나라와 민족에 복음을 증거 할 전도자의 걸음으로 인도하소서”

9. 엉덩이를 씻어주면서

“교만한 자리에 앉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 앉게 하옵소서”

10. 등허리를 씻어주면서

“보이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유대인들은 자녀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심이 되고, 거기에 건강하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이 기도문 중 아기의 성기를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기가 자라나 이 거룩한 성기관을 통해 거룩한 백성을 만들게 하옵소서. 결혼하는 날까지 순결을 지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고 축복의 자녀를 준비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니, 아기는 어릴 때부터 바른 성개념을 갖고 성장하지 않겠는가? 참 본받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로 20년을 사역한 성원용 목사의 간증

프랑스 선교사라고 하면 좀 생소하게 느낄 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그곳은 기독교국가가 아닌가? 그런 곳에 선교하러 갈 이유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죠.

2003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조사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이 83~88%에 육박하며 개신교 2%, 유대인 1%로 조사된 결과가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의 행정기관인 유럽 공동체 위원회(EC)에서 지원하는 정규 설문, 통계, 조사 기관인 유로바로미터(Eurobarometer)에서 2005년 공식적으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 시민의 34%가 신을 믿는 다고 답하였으며, 32%가 어떤 종류의 영적인 존재나 신등을 믿지 않으며, 27%는 삶의 영향을 미치는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일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2007.1월 카톨릭계 언론인 카톨릭 세계 뉴스(Catholic World News)에서 비공식적으로 조사한 설문 통계에 따르면 약 51%가 카톨릭이며 약 31%가 무신론자이거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약 4%가 무슬림, 약 3%가 개신교, 약 1%가 유대교, 약 10 %는 무응답이거나 기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사례가 있습니다.

프랑스에는 저의 신학교 동기였던 배윤재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곳이기도 해서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로 20년을 사역한 성원용 목사님께서 기독공보에 어떻게 프랑스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는지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 옮겼습니다.


프랑스선교사 성원용 목사님의 가족 사진 @사진 기독공보나는 선교사로 헌신하여 타문화 권에서 사역을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장신대에서 신학도로 7년을 보내는 동안 늘 기도하면서 소망하고 준비한 것은 오직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는 것이었다. 민족복음화가 나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기 중에도 교회, 직업훈련원, 기도원을 오가며 사역하는 일에 힘썼고, 방학 때는 지리산 전도, 여러 지역의 집회를 인도하며 보냈다. 그러노라면 구두 밑창이 닳아서 구멍이 나곤 했다. 돌아보면 그 때가 내 생애에 가장 뜨겁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신대원을 마치고 전임전도사로 명성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총회파송 프랑스 선교사로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장신대 학부와 신대원 동기생 가운데 가장 먼저 선교사가 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 혼란스럽기까지 했지만 돌이켜보면 감사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꿈이 무너뜨리시고 그 자리에 주님의 꿈을 심으셨기 때문이다.

불어 한마디 못하는데다가 제주도가 가장 먼 여행길이었던 나에게 프랑스 파리의 생활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세계인의 로망인 프랑스 파리에서 살면서 날마다 에펠탑을 보고 세느강을 오가며 멋진 카페에 앉아 샹송을 들으며 진한 엑스프레스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다는 기대와 더불어 언어의 장벽, 힘들다고 소문난 유럽 디아스포라 한인목회, 자존심과 콧대가 높은 프랑스인들과의 관계, 유럽이 선교지인가에 대한 확신부족, 유럽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한국목회를 할 수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내심 두려워지곤 했다. 한 마디로 선교사로서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3개월 동안 준비하고 파리에 도착하여 정착하는 5개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시골 어머니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파송예배가 있는 주일 새벽에 시골에 화재가 난 것이다. 어둠의 영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우리 부부의 마음속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확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구나! 유럽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구나!”

프랑스 사역을 시작한 지 1달 만에 결국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부모님들께서는 선교의 길을 떠난 아들을 생각하여 장례를 마친 후에 소식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으신 파송교회 김삼환 목사님께서 비행기에서 편지 한 장을 써서 보내주셔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면 슬픔과 절망으로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사망의 그림자가 엄습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기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네 작은 예배당에 나가서 매일 기도로 주님께 매달리며 부르짖었고 그때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만져주셔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회로 발전했다. 지금은 파리에 있는 6개의 한인교회가 파리 14구에 있는 프랑스 개신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연합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있다. 나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19년 동안 새벽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그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큰 위로와 비전과 능력을 경험하고 있다. 새벽기도는 내 영성의 젖줄이 된 것이다. 고난과 아픔이 축복이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서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부르셨구나!”라는 확신과 더불어 “설익은 곡식과 같은 나를 소제 제물로 받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뜨거운 불로 볶고 갈아서 고운 가루를 만들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프랑스 땅에서 감당해야 할 구체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는 아직 불분명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프랑스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렇게 해서 나는 프랑스 선교사로서의 삶을 출발하게 되었다. 참으로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부르심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 입장에서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일이었지 주님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진행하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우리 부부가 연애하던 시절에 아내는 무지개선교회라는 곳에 나가서 불어공부를 열심히 했고 나도 그것이 부질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번 참석하곤 했었는데, 그 모임이 지금의 불어권 선교회(대표:이몽식 목사)가 되었다. 그분들이 우리 파송예배에 오셔서 격려했고 지금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협력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로 가기로 결정된 후에 우리 부부가 프랑스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하면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가 프랑스로 떠나기도 전에 성령께서 미리 기도로 준비시켜 주신 것이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못한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선교사로 부르시어 이토록 영광스러운 길을 가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도 한 없이 부족한 내 모습에 송구스러울 뿐이다.

-위 내용은 기독공보에서 가져왔습니다.

소설 ‘서초교회 잔혹사’가 한국교회에 날린 돌직구

 최근 발간된 책 한 권이 한국 교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바로 사랑의교회 설립자인 고(故) 옥한흠 목사의 장남 옥성호씨가 펴낸  ‘서초교회 잔혹사(저자 옥성호, 박하 펴냄)’이다. 100% 허구인 ‘소설’로 분류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옥성호 씨가점은 소설의 배경이 최근 수년 동안 사회법 소송전에 휘말리고, 비리 의혹으로 여론에 오르내린 ‘사랑의교회’와 ‘오정현 목사’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소설의 내용은 교회 안에서 벌어졌다고 보기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김건축’ 목사는 아프리카에서 한인교회를 운영하다가 ‘서초교회’ 담임으로 발탁돼 부임한 후 소위 잘나가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교회 내 속임‧협박‧거짓이 난무하는 정치를 시작했다. 서초교회는 그의 구상대로 한 동안 정말 잘나가는 행도를 하다 인터넷 한 언론에 김 목사의 만행들이 제보되면서 큰 갈등에 휩싸인다. 하지만  김 목사는 회개는커녕 오히려 전면전을 선포한다는 내용이다.

서초교회잔혹사 표지

이 책이 발간되자 사랑의 교회는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검토하고 있다 한다. 하지만  저자 옥성호 씨는 사랑의교회를 특정한 것은 아니라며, “ 소설 속의 ‘서초교회’는 서울 강남의 ‘서초동’이 지닌 부유함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라며 “특정 교회를 지칭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저자는 한국 교회의 금기와 성역이 위선과 거짓을 양산하고 있다며, 이걸 깰 목적으로 이 장편소설 `서초교회 잔혹사`를 썼다고 밝혔다.

이 소설에서 집중한 건 ‘비리 목사’의 문제다. 소설 속 김건축 목사는 자신의 영욕을 위해 왕처럼 부목사들을 부리며 부정을 자행한다. 옥씨는 “주변에서 많은 목사님들을 봐왔는데, 요즘 목사님들은 마치 황제와 같은 느낌으로 변해버렸다”며 “결혼식 주례가 들어온 여자를 성추행하고, 헌금을 아들 회사에 갖다주기도 한다. 소설은 현실에 비하면 귀여운 편”이라고 말한다.

`서초교회 잔혹사`는 신도 수 늘리기에 급급한 일부 대형교회와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위선적 태도에 대한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이미 기독교계 안팎에서는 교회의 대형화와 사유화 그리고 지나친 대형 성전 건립 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지 오래다. 이런 가운데 나온 `서초교회 잔혹사`는 한국 기독교의 자성을 위해 돌직구를 날린 것이다.

이만재교수가 말하는 교회가기 싫은 77가지 이유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는것일까? ‘막쪄낸 찐빵’으로 유명한 칼럼리스트이자 숙명여대 교수인 이만재교수가 그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는 교회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 교회 가기 싫은 이유 39가지와 교회 경험이 있는 젊은이들의 교회 가기 싫은 이유 38가지를 열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기싫은이유“신세대 젊은이들한테 그 좋은 하나님 사랑 얘기를 해주자면, 그러자면 우선 내 자신이 신세대를 알아야 하는 것이 순서였다. 저들의 의식성향을 알아야 하고, 저들의 행동양태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저들이 왜 교회를 멀리하려 하고, 왜 교회를 떠나려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기 때문이다.

오랜 기도와 숙고 끝에 나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 세세한 사연들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이 책 내용 각 항의 화두로 삼기로 했다. 신앙심이 이미 깊은 경지에 들어가 있는 기신자보다는 늘 초신자의 시각과 초신자의 언어로 다른 초신자와 다른 비신자를 만나고 싶었다.

책을 읽는 동안 느꼈겠지만 그래서 나는 자칫 정형화도기 쉬운 교회식 논리나 율법처럼 들리기 쉬운 성경적 어법을 가급적 피하고자 하였다. 어떻게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디 뜻과 섭리를 보다 쉬운 생활언어와 피부언어로 바꿔서 닫힌 마음의 저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면서 아프고 뜨겁고 곤혹스러운 화두들 앞에 조심조심 접근하곤 했다.”

교회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들은 왜 교회가기를 거부할까?

1. 노방전도의 모습이 싫다. 2. 여유가 없다. 3. 말 많은 전도사가 싫다. 4. 부자 교회가 싫다. 5. 믿을 건 나 자신뿐이다. 6. 술 담배도 아예 못하는 것이 싫다. 7. 종교가 미신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8. 타종교 타종파에 대해 너무 배타적이다. 9. 종교 없이도 별 불편함이 없다. 10. 부모님이 반대하신다. 11. 조용한 교회가 없다. 12. 교인 아니면 다 사탄인가? 13. 기독교는 외래 문화이다. 14. 광신도들의 광적 행태가 무섭다. 15. 허황된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믿겠는가? 16. 팔자 편한 사람들의 교회지. 17. 동정녀 마리아 잉태가 이상하다. 18. 건축헌금이 무섭다. 19. 세상 문화를 사탄으로 매도하다니. 20. 무교회 종교론에 공감한다. 21. 꼭 교회에 가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22. 광란의 기도원 풍경이 혐오스럽다. 23.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는 거짓말이 싫다. 24.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못 믿겠다. 25. 종교생활로 말미암는 각종 제약이 싫다. 26. 교회의 요구사항이 뻔하다. 27. 무전여행 때 냉대 당했다. 28. 목사 결혼 세속적이다. 29. 현찰로 돈 내면 천당서 갚는다고? 30. 유흥업 하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있겠는가? 31. 부흥회 가보고 어이 없었다. 32. 형제 자매 장로 집사 호칭이 싫다. 33. 가정 파괴 광신도를 봤다. 34. 세무 조사 반대 이해할 수 없다. 35. 양보 모르는 압력집단이다. 36. 죽은 후 천당에서 영생한다고? 37. 붉은 십자가가 너무 많다. 38. 개척 교회의 과잉 경쟁이 싫다. 39. 신체 장애 때문에 안 간다

교회 경험이 있는 젊은이들은 왜 교회 가기를 싫어할까?

40. 각종 모임 참석에 대한 강요가 많다. 41. 기업화된 교회의 위화감이 싫다. 42. 빈민 구제를 외면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43. 교회에 쓸 만한 총각이 없다. 44. 감사할 줄 모르는 탐욕 메카니즘이 싫다. 45. 교회에서 진짜 신앙인을 보지 못했다. 46. 교회는 또 하나의 계급 사회이다. 47. 교회는 고리타분하다. 48. 양보없는 일등주의 세속성이 싫다. 49. 세상과 타협하는 기회주의가 싫다. 50. 교인들은 재미가 없다. 51.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겁준다. 52. 헌금 명단 공표는 속보인다. 53. 일요일에 늦잠 잘 수 없다. 54. 자유로운 모험 정신을 억압한다. 55.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56. 목사 수준이 낮은 것 같다. 57.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나? 58. 교회의 종파 분쟁을 이해할 수 없다. 59. 이중 인격자가 많아 싫다. 60. 헌금따라 사람 대접이 달라서 싫다. 61. 교회의 단순 논리는 사고력을 퇴행시킨다. 62. 마음 터놓을 깊은 친구가 없다. 63. 진화론을 부인하는 교리를 믿을 수없다. 64. 교회에서 연애를 많이 한다. 65. 엉터리 목사가 많다. 66. 뭔가 달라야 한다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67. 교회 비판 함구는 불문율인가? 68. 사기꾼 목사를 봤다. 69. 예수는 좋지만교회는 싫다. 70. 능력 이상의 직분을 강요한다. 71. 꼴보기 싫은 사람들이 많다. 72. 이성 교제 제약 받는다. 73. 음치라서 찬양이 재미없다. 74. 지옥 협박 고립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75. 자신의 이중생활이 가책스럽다. 76. 아전인수 자기합리화 도구. 77. 신분차별 때문에 벽을 느꼈다.

이 책이 발간한 해가 1997년이다. 그 내용을 보면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내용들도 있고, 몰라서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당시 그가 관찰한 내용들은 그 당시로도 이미 오랫동안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지적받았던 내용이다. 안타까운 것은 1997년의 문제가 2014년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17년동안 한국교회는 자신의 문제를 개혁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약점이 더 깊어졌다는 것에서 그 심각성이 더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한국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목회관부터 바뀌어야 한다. 말씀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고, 이 말씀으로 그 삶을 변화시켜나가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본질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개혁이며, 우리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인 것이다.

by 코이네 뉴스

기독교의 절기, 사순절은 무엇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四旬節). 올해는 오는 5일부터 4월 19일까지다. 이 절기는 예수부활 46일 전인 ‘재(참회)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시작해 부활주일 전야까지 40일간을 말한다.

올해 부활주일은 4월 20일이다. 이 기간의 주일(모두 6일)을 제외하면 꼭 40일이 되기 때문에 사순절이라고 한다. 이 절기는 특히 예수 고난과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독교 교회사에서 사순절을 교회의 주요 절기로 지키기로 한 것은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였다. 이후 수세기 동안 교회는 금식 기도를 드리며 엄격히 지켜오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사순절의 주요 절기들

한국교회도 매년 사순절이면 묵상집 등을 펴내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지내도록 독려하는가 하면 교회 별로 특별새벽기도회, 금식기도 기간을 선포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다. 또 성도의 불필요한 소비는 없는지 점검하고 구원 및 부활과 관련한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도왔다.

사순절을 통해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며, 자신의 내면을 살피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가족과 함께 가까운 교회의 새벽기도나 금식기도, 심야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도 좋고, 성경읽기나 성경쓰기, 성경 암송 등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리고 TV 시청하지 않기, 인터넷과 핸드폰 등의 사용을 절제하는 문화금식 운동, 사랑의 헌혈과 장기기증, 소외이웃 돌보기, 북한과 국내외 결식아동 돕기 등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이하며, 이웃을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것도 사순절을 잘 보내는 방법이다.

동성애 극복한 이요나 목사의 간증

동성애서 전향한 이요나 목사 이야기

“동성애가 선천적이라고요?… 동성애는 죄였습니다”

최근 입법예고된 동성애 차별금지법안을 바라보는 이요나 목사(58)의 심정은 착잡하다. “지금 반대해서 비록 입법이 되지 않더라도, 저는 언젠가 이 법이 통과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법안 제정은 현재 세계적인 추세라며 씁쓸해 했다.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각계각층에 이미 동성애자들이 상당수 포진돼 있어 이러한 흐름을 막을 수 없다고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동성애자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지난해 7월 출연했던 한 케이블채널 토론 프로그램에서다. 그는 패널로 나와 동성애자들과 ‘맞장 토론’을 하면서 자신도 과거 동성애자였다고 ‘커밍아웃’했다.    “저는 동성애자 출신이라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아요. 목사가 과거를 부끄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그가 당당하게 밝힌 덕에 지금도 동성애 성향으로 고민하지만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던 사람들, 특히 크리스천들이 그와 터놓고 상담할 수 있게 됐다.

창조신앙과 창조과학은 구분되어야 한다?

윤철민 목사(울산미포교회)는 <개혁신학 vs. 창조신학(CLC)>이란 책을 통해 개혁신학 입장에서 ‘창조과학’을 비평하였다. 개혁신학에서 보는 창조과학, 과연 그는 어떤 시각을 갖고 창조과학을 보고 있을까? 개혁신학 대 창조신학

저자는 먼저 ‘창조신앙’과 ‘창조과학’을 구분하며, 지구 나이에 대한 관점에 대해 “성경은 지구 나이에 관해 가르쳐주는 책이 아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리고,  창조과학자들이 언제나 성경에 호소하고 있고, 그래서 많은 신자들에게 설득력을 갖지만,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있어, 종교개혁자들의 ‘문자적’ 해석과는 다른 ‘겉보기 문자적 해석’을 사용하면서, 문자 안에 담긴 의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남용하여 성경이 주장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도, 즉 자신들의 글과 강의가 무오하며 영감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덧붙인다.

구체적으로 그는 창조과학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는 절대 도그마(dogma), ‘홍수지질학’에 대한 태도를 통해 ‘창조과학’과 ‘창조신앙’을 분리한다. ‘

노아의 대홍수’는 하나님의 심판이자 전지구적인 대격변이고 지질학적 증거를 남겼다는 주장은 옳지만, 창조과학자들의 주장대로 지구상의 화석을 생성시킨 유일한 대격변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 이같은 논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안식교)나 세대주의자들의 교리와 다를 바 없다고 꼬집는다.

또한, 타락 전에는 인간과 동물의 죽음이 없었고 그들이 채식만 했으리라는 ‘네페쉬(nephesh) 교리’에 대해선, “개혁주의는 인간이 순종이라는 윤리적 조건과 상관 없이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미신적인 믿음을 경계했다”고 답한다. 타락 이전 에덴에서 사람은 불사(不死)의 생존이 아닌, ‘행위언약’을 통해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 순종을 통해 영생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언약을 체결했지만, 아담이 이를 어겼기 때문에 무위로 끝났다는 해석이다. 동물의 불사 문제와 창세기 9장에서 파생된 ‘채식주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시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밖에 ‘인류 나이 6천년설’의 근거가 된 창세기의 족보에 대해선 “창조과학의 최대 관심사는 성경을 성경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젊은 지구를 지켜라’ 라는것 같다”며 “창세기 저자들이 먼 과거에 대한 정확한 연대기적 정보를 전달하려 한 게 아니었으므로, 연대기적 사료를 읽는 독법으로 창세기를 읽어선 안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창조과학자들처럼 ‘젊은 지구론’을 믿지 않아도 진화론자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은 ‘젊은 지구 창조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 지구 창조론과 지적설계 운동도 충분히 ‘창조신앙’으로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며,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성경을 백과사전으로 여기는 것은, 성경을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는 끝으로 “창조과학에 대해, 과학은 어쩔 수 없더라도 신학은 얼마든지 비평해 볼 수 있음에도 한국 신학자들이 창조과학의 신학을 방치해 둔 것 같다”며 “신학자들이 침묵하니 목사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 신학자들은 자크 데리다나 미셀 푸코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창조과학 같은 실용적인 신학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신학계에 건의했다.

코이네도 이 책의 저자와 일맥상통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