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본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고찰 먼저 두 가지 인용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인용문은 아돌프 슐라이터(1852~1938)의 『신약에서의 신앙』(1882)이라는 책에 수록된 것으로 이 책은 여러 차례 중판(重版)과 재판(再版)이 거듭되었다. 슐라이터는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신앙의 형성과정은 결코 심리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심리학적으로는 정상적 과정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도들의 관심은 오직 신앙의 대상이 되는 자가 누구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 … 더 읽기

에라이 배추만도 못한 놈

배추키우며 깨닫게 된 믿음의 원리

몇 년전 김장배추값이 2천원이 훌쩍 넘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부터 도움이 될까하여 텃밭에 배추를 심었습니다. 지금은 은퇴이후 걱정하지 않을정도로 잘 키워냅니다. 비료나 농약을 최소한으로주고 이엠주며 막걸리 치고 길러냅니다.

배추는 아주 어릴적에 벌레를 잘 잡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어르신들중에는 하얀가루로 알고 있는 디디티 가루약을 치며 길러내지만 맹독성이라 몸에는 않좋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는 어릴적에 대가리에도 치고 자라도 잘 자랐는데 하실분 계실줄 압니다.
머리에 이가 생기면 이 잡는다고 농약성분이 가득한 디디티가루를 머리에 바르곤 했지요.

약200포기되는 배추에 벌레를 잡겠다고 매일같이 나가 한 두시간 잡고나면 남이 안시킨짓 하면서 뭔 고생이고 하면서도 김장할 때 도움이되고 이웃간에 나누며 풍성하게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배추속에 아주 여리고 어린 순이 자라는데 그 순에 벌레가 일어 또아리를 틀고 앉아 갉아먹습니다. 초반기에 벌레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냥 주저않게됩니다. 그래서 벌레를 잡다보니 깨달음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에도 사탄이 뿌려놓은 죄악의 씨앗들이 자라면서 영의 깊은곳에서 근본적으로 갉아먹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벌레들이 자리잡은 잎사귀에는 표시가 납니다. 뭔가 시들해보이기도 하고, 잎이 안으로 파고들며 오글오글해집니다. 나 아파요 하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주인이 조심스레 그 잎사귀를 들춰보면 벌레가 들어있습니다. 미처 잡지 못한 벌레들이 자라 거의 번데기 수준까지 자란것도 있는데 그것을 잡아내면 홈런친 야구선수인양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배추가 자라는 과정을 보며 배추들은 하루차이만 나도 크기가 눈에 띄게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초가을 햇살에 하루차이만 나도 크기가 다른배추들을 보면서 나이 한두살 더 먹은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어야 하겠다는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타지에 나와서 사귀는 사람들은 몇 년은 그냥 친구삼아 지내기도 하는데 하면서도 배추도 예를 아는데 사람이 예의를 모르면 안되지 하는 깨달음을 한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예의가 가장 없는 부류가 목회자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안수만 받으면 지나내나 같은 목사라는 생각에 그냥 대충 넘어가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저는 ‘에라이~ 배추만도 못한놈’ 하면서 생각을 합니다.


장로님들 세계나 권사님들도 비슷하지 않는가 봅니다. 교회에서 중직자로 임직을 받으면 그날부터 선배도 없고 어른도 없이 지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때 ‘에라~ 배추만도 못한놈’ 하며 생각을 하시고 웃으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 생각은 배추는 먼저 자란 겉잎이 속에 있는 여린잎들을 감싸안아주며 보호하며 자라는것입니다. 맨가에 있는 겉잎사귀들은 속살 배추들을 보호하다가 나중에는 시들해지며 뽑을 때는 주인이 인정사정없이 뜯어내 버려도 항의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중직자들이 바로 겉잎과 같은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자기는 나중에 신앙생활을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헌신하다가 이름없이 빛도 없이 사명감당하다가 때가되면 사그러 들지라도 감사하며 나를 통해 우리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고 하나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족하다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겉잎사귀가 자기만 자라겠다고 자리를 잡은 배추들은 속이 꽉차지 못하고 병이듭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 감사하면서 자기사명 잘 감당하는 배추에게서 영적인 깨달음을 배우게됩니다.

by 김성칠 목사(칠포교회)

김성칠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경북 칠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중입니다.

돈이 행세하지 못하게 하라

뱅겔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악의 첫 번째 뿌리는 자아사랑이요 두 번째 뿌리는 돈 사랑이다.” 여기서 돈 사랑이라고 하는 ‘필라르 귀로스’라고 하는 것은 필로스라고 하는 사랑이라는 말과 아르귀로스라고 하는 은을 뜻하는 말이 합쳐진 말이다. 옛날에는 화폐가 은이었다. 돈 사랑이 하나님사랑을 대신하는 사회가 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요, 병든 사회요, 종말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영어시편에 머니탁스라는 말이 있다. 돈이 말한다라는 뜻이다. 요즘은 돈이 말하는 시대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마다 사람들은 돈 돈 하면서 돈에 미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렇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70% 가까운 아이들의 대답이 돈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돈이 행세하고 돈이 지배하고, 돈이 다스리고 돈이 명령하는 사회, 그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사회 그리고 그 지시와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사회가 될 때 진정한 공동체가 만들어 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명령보다 돈의 명령을 더 중시하고 있는 사회가 되고 있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일본의 소설가 나쓰매 소세키라고 하는 작가가 있다. 이 발음을 좀 잘해야 하는데 이 나쓰매 소세키라고 하는 이 작가가 주로 돈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많이 썼다고 한다. ‘마음이나 그 후’라고 하는 그 책을 보면 돈 많은 사람, 돈을 갖고 자만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돈이 인간을 어떻게 철저히 파괴하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 책에서 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얘기하지만 돈을 찬양하는 사람은 아니다. 돈이 그만큼 위력이 있기 때문에 돈을 잘못 쓰게 되면 결국 그 돈으로 인해서 인생이 파괴되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경이 있다. 그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란 말 대신에 돈이라고 하는 말이 배치되어 쓰이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돈을 만드시니라,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믿음 소망 사랑 돈 그중에 제일은 돈이니라” 여러분 웃고 계시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하나님 없는 것보다 돈 없는 것을 더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 아닌가? 하나님 사랑보다 돈 사랑이 더 우선하고 있고 돈 사랑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사회가 오늘의 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돈 사랑에 빠지면 그 돈으로 인해서 우리의 인간성도 파멸되고, 그로인해서 이 세상은 불행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원수 대하듯 해라, 최영장군처럼 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한다. “돌 보기를 돈 같이 하라”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시대 속에 살고 있는가를 꿰뚫어 볼 수가 있어야 한다. 돈 보다 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고, 그분의 은혜를 통해서 진정 행복한 삶을 영해갈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살기 바란다.

by 동래중앙교회 정성훈 목사

기독교를 중심으로 번져가는 한국의 유산기부운동

유산기부운동과 청지기 정신, 유산기부운동에 참여한 오산침례교회 성도들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산기부운동이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작년(2013년) 10월에 나눔국민운동본부(대표 손병호)가 나눔문화 확산을 위해 행복한 유산기부 운동을 펼쳐 많은 관심을 모았는데, 올해(2014년) 하이패밀리가 주축이 된 “153 유산기부운동”(이사장 송길원목사)이 1월 11일 경기도 광주 곤지암 밸리에서 재단 발족식을 갖고, 목적과 쓰임이 분명한 기부운동을 만들 것을 선포했다.

2013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3세 이상 인구중 향후 유산기부에 의향이 있다는 비율은 36.6%로 나타났다. 기부문화가 보편화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보면 높은 수치다. 하지만 60세 이상은 18.6%, 65세 이상은 15.8%로 기부의사비율이 급격히 떨어진다. 장·노년층으로 가면 아직도 유산은 자식을 비롯한 남은 가족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53유산기부운동에서는 이런 우리나라의 사정을 고려하여 사전에 기부유산의 1/2을 가족 몫으로 배려하고 있다. 일명 ‘153 유산기부운동’에 대해 송길원 목사는 “유산에서 1은 생애 마지막 십일조로, 5는 남은 가족들 부양 몫으로, 3은 사회복지를 위해 쓰인다는 의미”라며, “장례비용에 충당하고 남은 유산과 아울러 조의금의 10분의 1은 통일시대에 대비하는 비용으로 쓰이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이번 153유산기부운동에 참여한 오산침례교회 김종훈 목사는 기독교인들의 청지기 정신을 강조한다.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 정신은 청지기입니다. 내가 누리고 있고 손에 쥐고 있다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내가 사용할 뿐이고 나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떠날 때 그것을 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고 가야 되지 않느냐는 취지에 공감해 153유산기부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번 유산기부운동재단 출범식에 오산침례교회는 49명의 성도들과 참석하여 153유산기부운동에 동참하기로 서약했다. 이들은 지난달 3주 동안 ‘내 생애 마지막 한 달’이라는 주제로 열린 특별새벽기도에서 “가까이 있는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남은 삶도 바로 살 수 없다”는 뒤이은 성찰에 이번 운동에 스스로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특별새벽기도시간에 자신의 유언장을 쓰면서 유산기부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성도들, 그들은 실제 어떤 마음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유산기증운동에 참여한 오산침례교회성도들

1992년 한국대표로 철인 3종 경기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임석환(72) 씨와 함석희(66) 권사 부부. 현재 암투병 중인 임씨 부부가 유산기부를 결심한 것은 16년 전이다. 당시 임씨는 대한주택공사에서 보상업무를 담당했는데, 몇 백억원씩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이 친척이나 형제간에 재산 다툼하는 모습을 목격하곤 그때부터 기부에 대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대리운전 콜센터에서 15년째 일하고 있는 송영심(54) 권사는 “딸들이 다 커서 제가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건 생각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해 모두 기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한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일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다 언제라도 하나님이 ‘이 땅에서 네가 할 일이 없다’고 했을 때 기쁘게 천국으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이번 유산기증운동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강예은(36) 집사는 “유산기부 하고 싶은데 ‘내겐 가진 게 없는데’란 생각을 했다가, ‘지금은 내가 아무것도 없지만 서약을 하고 나면 그 뒤는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기부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그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더 많이 기부할 수 있으면 더 좋으니까 살아가는 목적이 좀 더 달라지고 명확해졌어요.” 7년 전부터 홀로 두 딸을 키우고 있는 강 집사는 백혈병으로 아들을 잃은 아픔이 있다. 훗날 자신의 기부가 희귀난치병 환우들에게 쓰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결혼한 지 10년차 주부인 고은미(30) 집사는 남편과 재산의 사회 환원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무턱대고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 애들 교육에 쓰거나, 주변에 배우지 못한 아이들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서약 후에는 목적의식을 갖고 돈을 더 벌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중에 기부할 때도 100원보다는 1000원, 1만원을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유산기증운동을 하게 된 개인적인 이유는 다 다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재산을 개인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이웃을 생각하고, 또 자신에게 재산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게 해준다. 그리고 현실에서 내가 왜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 그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조상제사 배척보다는 배려와 이해가 답이다

제사문제에 대한 기독공보의 기사 중 일부입니다.

비기독교 가정에서 설 명절을 보내야 하는 기독교인들이 ‘제사 문화’로 고민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풍습에 따라 비기독교 가정의 대부분이 ‘조상 제사’를 지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적 혼란에 빠져 있다.얼마 전에는 기독교인 가정주부가 제사 치르기를 반대하다 이혼을 당하기도 했고, 법원에서는 가정의 분란을 초래했다며 이혼사유에 해당된다고 봤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전문가들은 절충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사 음식을 차리는 일은 돕더라도 절을 할 때는 선 자세로 묵상을 하는 식이다. 숭실대학교 문화선교연구소장 김명배 교수는 “제사 문제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고 오히려 반감을 일으킬 수 있다”며 “당사자가 먼저 집안에 양해를 구하고 배타적이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협점이 되는 방안을 내세우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에 대해 예장통합교단의 증경총회장 박종순 목사(충신교회 원로)는 한 칼럼 기고를 통해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다. 박종순 목사는

“효의 기본정신은 죽은 조상보다 생존해 있는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부모 생전에는 온갖 불효를 하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묘역을 만들어 형식을 벗어나지 못한 제사를 반복하는 것은 효와는 무관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가족공동체를 외면한다던가 따돌림을 받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평소에 제사행위 자체 외에는 모든 면에서 ‘예수님 믿는 ㅇㅇㅇ가 최고’라는 평을 듣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지키면서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돌봄, 섬김과 나눔에 있어선 으뜸이 되고 칭찬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 조언했다.


추도예배제사 문제가 기독교인에게 고민이 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바로 제사의식이 우상숭배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해석을 내려놓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저런 대책을 내놓은 것은 잘못하면 신앙혼합주의를 수용한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우리의 제사문제에 대해 처음에는 우상숭배라고 결론을 지었고, 이 때문에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조선말에  ‘사화’라는 말이 붙은 난은 대부분 제사문제와 관련된 천주교의 탄압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엄청난 수의 신자들이 이 때문에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이러한 천주교의 결정은 당시 동양의 효사상과 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결정이었고, 천주교인들은 조상에게 효를 다하는 것을 배격할 이유가 없다 하여, 당시의 결정을 번복하여, 조상제사를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문에 현재 천주교인들은 조상제사로 인해 더이상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

개신교는 제사문제에 대해서 이전 천주교와 같이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였고, 그 때문에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배척하고, 추방해야 할 잘못된 문화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제사문화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 효와 가족이 함께 모여 화목을 이루는 것은 권장해야 할 좋은 요소이기에, 제사 형식을 예배형태로 바꾼 추도예식으로 대체하기를 권해왔다. 그런데 이 추도예식은 온 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일 경우에는 좋은 방법이지만, 비신앙인이 함께 하긴 이질적인 요소가 크다는 것이 문제이며, 제사 때문에 겪는 가족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여전히 갖고 있다. 도리어 제사의 형식이 둘로 나뉘는 문제가 생겨, 한 자리에 모여야 할 명절이나 추도일에 종교에 따라 가족이 따로 모이는 볼썽사나운 현상도 일어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제사는 우상숭배이므로 절대 해서도 안되며, 그 자리에 참석해서도 안된다는 율법주의적 입장을 고수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제사문제로 인한 가족간의 갈등은 여전할 것이며, 기독교인들은 효도 모르는 후레자식으로 욕을 먹을 것이다. 또한 그런 배타적인 자세는 가족 간의 관계를 멀어지게 할 것이며, 가장 먼저 해야 할 가족의 구원을 내팽개치게 될 것이다.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켰더니, 네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배척해버리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지속될 것이다. 무조건적인 배척이 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제사를 드리는 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면 어떨까? 이런 말을 하면 혹 우상숭배하는 것에 동조하겠다는 뜻이냐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조상 제사는 우상숭배의 요소도 있지만, 실제 제사를 주장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이다. 즉 제사는 효도의 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비신앙인들의 제사의식을 무조건 배척하기 보다는 부모에 대한 효의 전통으로 존중해주고, 제사의식에서 기독교인으로서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부분(차린 상에 절을 하는 행위 등)을 제외하곤 함께하는 것이다.

또한 절을 하지 않는 것도 조상에 대한 효가 없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죽은 자에 대한 경배를 금하고 있어, 예를 차리는 형식이 다를 뿐이라고 잘 설명해서 오해를 불식하고, 불화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도 경험하는 것이지만 모든 다툼은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고, 예의와 배려가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예의바르게 먼저 믿지 않는 가족을 배려하고, 양해를 구한다면, 불필요한 분쟁은 많이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것 분명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겠는가? 바울처럼 우리도 이전에는 너희와 같은 죄인이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아직 예수의 구원을 알지 못해서 저지르는 잘못 무조건 미워하고 배척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이들도 우리와 같이 구원받은 백성이 되게 할까? 좀 더 넓은 마음으로 품어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생각한다.

by 코이네 박동진 목사

동성애 극복한 이요나 목사의 간증

동성애서 전향한 이요나 목사 이야기

“동성애가 선천적이라고요?… 동성애는 죄였습니다”

최근 입법예고된 동성애 차별금지법안을 바라보는 이요나 목사(58)의 심정은 착잡하다. “지금 반대해서 비록 입법이 되지 않더라도, 저는 언젠가 이 법이 통과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법안 제정은 현재 세계적인 추세라며 씁쓸해 했다.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각계각층에 이미 동성애자들이 상당수 포진돼 있어 이러한 흐름을 막을 수 없다고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동성애자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지난해 7월 출연했던 한 케이블채널 토론 프로그램에서다. 그는 패널로 나와 동성애자들과 ‘맞장 토론’을 하면서 자신도 과거 동성애자였다고 ‘커밍아웃’했다.    “저는 동성애자 출신이라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아요. 목사가 과거를 부끄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그가 당당하게 밝힌 덕에 지금도 동성애 성향으로 고민하지만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던 사람들, 특히 크리스천들이 그와 터놓고 상담할 수 있게 됐다.

황제가 어쩌지 못한 하나님의 사람 크리소스톰

교부 크리소스톰의 아름다운 이야기

크리소스톰은 로마황제로부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엄명을 받았으나, 그 는 죽어도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하며 맞섰다. 그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로마황제는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후 신하에게 이 렇게 지시했다. “크리소스톰을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게 고독한 개인감방에 집어넣어라” 그러자 그 신하가 울상을 하며 대답했다. “황제님! 크리소스톰은 크리스챤입니다.” 황제가 고 함을 질렀다. “크리스챤이면 별놈이냐? 빨리 집어 넣어라!” “황제님은 모르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사람을 거기다 가두어 넣더라도 혼자있는게 아닙 니다. 하루종일 싱글벙글 웃으면서 중얼중얼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 한답니다. 그러니까 혼자두면 그에게 좋은 일만 하는 셈입니 다.” 그래서 황제가 다시 명령했다. “그러면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가 고개를 흔들어댔다. “황제님. 그건 더욱 안됩니다. 그사람은 오히려 전도할 기회가 생 겼다고 매우 좋아할 것이며, 얼마있지 않아 그 안의 사람들은 모조리 크리스챤이 되고 말 것 입니다. 그사람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 극악무도한 악질죄인도 변화시켜 오히려 상급을 받 게 해주는 일입니다.”

황제가 노발대발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당장!” 신하가 사색이 되어 다시 말했다. “어이구!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그사람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중에는 처형당할때 두려워하거나 우는 사 람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한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제일 좋은 것을 안겨주는 셈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면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앙? 아이 구 — “

우리 크리스챤들은 사방으로 에워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 질그릇속에는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은 세상사람들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고 있는 두려움의 대상인 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천만의 말이다. 뇌물 몇푼에 양심을 팔고, 수입 몇푼에 신앙까지 도 팔아치운다면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황제와 크리소스톰이 만나 이런 대화를 하였다.

황제 : “네가 만일 예수를 배반하지 않으면 멀리 귀향을 보내겠다”
크리: “이 세상은 어디나 아버지의 집이니 어디 간들 상관이 있겠는가?”
황제: “그러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
크리:  ”나의 생명은 예수 안에 있으니 폐하가 능히 죽이지 못할 것이요”
황제: “그러면 네 재산을 빼앗아 버리겠다”
크리: “내 재산은 하늘에 있으니 빼앗기가 힘들 것이요”
황제: “너의 친구들로부터 너를 떼어 놓겠다”

이런 대화 끝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내보냈다고 한다. 신앙은 참 멋지다.                                            인생을 멋있게 하고, 멋지게 살게 한다.

교회에서 헌금하는 이유 네 가지 유형

교회의 헌금, 교회에 헌금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유형과 바람직한 모습


소토교회 본당의 풍경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은 헌금도 더 많이 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결과에 보면

일주일에 4일 이상 성경을 읽는 사람은
Giving financially to a church 교회에 헌금 +416%
Memorizing scripture 성경 암송 +407%
Discipling others 제자 삼기 +231%
Sharing their faith with others 복음 증거 +228%
Giving financially to causes other than their church 교회 외에 후원 +218%

였다고 하네요. 아쉬운 것은 이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 아니라 미국 교회의 조사결과입니다.

그런데 전 이렇게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헌금도 더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그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삶이 헌신적으로 변하게 되지 않습니까? 신앙이 깊어질수록 돈에 구애되거나 구속되지 않고, 돈을 다스리게 되니, 돈을 좀 더 가치 있는 일에 쓸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에서 이렇게 성경의 말씀에 감동되어서 그 삶이 이타적으로 변화되어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과는 달리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 이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해보았습니다.

 첫째, 투자형입니다.

때로 교회에 사업성이 뛰어난 분들이 등록을 하거나 교회를 옮겨올 경우가 있습니다. 이분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무엇을 해야 단시간에 정착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돈을 잘 씁니다. 헌금도 많이 할 뿐 아니라, 목사에게 환심을 사려고 선물도 하고, 교인들에게 지지를 얻는데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 대부분 교회에 빨리 정착하고 또 자신의 입지를 빨리 굳혀서 단시간에 교회의 중직이 되거나, 교회의 활동에 자연스레 참여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거기서 그친다는 것이죠. 그건 신앙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데 말이죠.

둘째, 협박형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심 때문에 헌금을 많이 하는데, 그 내면을 살펴보면 정말 이것이 신앙 때문인가 싶은 모습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그 심성이 여리고, 또 미래에 대한 무서움증이 많습니다. 그래서 협박에 잘 넘어갑니다. 안하면 벌받을 것 같고, 뭔가 우려스런 일이 생길 것 같고, 그래서 목사가 설교나 기도로 협박하면 무서워서 헌금합니다. 분명 신앙적인 이유로 헌금하는 것 같은데, 그 내면은 두려움 때문에 헌금하는 것이죠. 이 분들은 때때로 하나님을 조폭두목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헌금은 많이 하는데, 신앙은 자라지 않고 도리어 더 큰 두려움에 잠기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는 것이죠.

세째, 뇌물형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 뇌물로 헌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소원이 있어서 이걸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뇌물조로 헌금하는 것이죠. 그래도 이 분들은 양심이 밝은 분들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좀 해주어야 체면이 서는 것이죠. 나는 아무 것도 안해주면서 하나님보고는 이것저것 다해달라고 한다는 것은 도둑심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원하는대로 되면 다행인데, 그렇게 되지 않으면 큰 시험에 듭니다. 이 분들이 뜻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것 저것 다해드렸는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라는 것은 참 다스리기 힘든 존재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우상의 자리에 있는 것이 돈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지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람의 회심을 3단계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변하이고, 두번째는 행실의 변화이며, 세번째는 돈이 든 지갑의 변화라구요. 그 돈지갑까지 변화되어야 진정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돈을 잘 다스리는 것은 신앙의 큰 과제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성경을 정말 많이 읽고, 제대로 공부하고, 은혜 받아서 헌금도 잘하는 성도들이 되길 기대하고 또 기도합니다.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교인들 헌금 많이 내게 하려고 성경 많이 읽히는 것 아닙니까? ㅎㅎ 일단 저부터 좀 더 깊이 성경을 읽고 체험해보겠습니다. 목사도 다른 성도와 마찬가지로 똑 같이 헌금한답니다. (*)

by 코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