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인들이 성경을 읽는 방법

청교도인들이 성경을 읽는 방법

  청교도들은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누리는 가운데,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을 살아갔고, 성경으로 호홉하였다.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전해진 66권의 성경을 성령의 도서관으로 여겼다. 성경은 자신들의 아버지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고, 평생에 믿고 따를 만한 진리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삶을 변혁하도록 성령께서 권위를 불어넣으신 책이었다.   청교도들은 기쁨으로 말씀을 노래했고, 경청했고, 탐구했고, 다른 이들도 … Read more

신약성경은 어떤 과정을 거쳐 27권만이 정경으로 인정되었나요?

질문)

현재 기독교의 성경은 총 66권입니다. 구약성경이 39권, 신약성경이 27권이죠. 그런데 이 외에도 기독교에는 구약성경의 외경이 있고, 신약성경에는 위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경처럼 읽혀지거나 전해져 온 성경이 많이 있다는 것이죠. 지금 정경으로 인정되고 있는 66권은 어떤 경로를 통해 정경이 되었나요?

답변)

초대교회 사도들은 자신의 당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전도에 힘썼지요. 또한 당시엔 예수님의 역사성에 대해 의심할 나위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존을 증명해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시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간직하던 그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자 성경을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복음서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하게 되자 이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야 할 필요가 있어 사도들은 교회에 서신 형식으로 기독교의 교리와 생활 규례 등을 적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이단들이 생겨나 그들의 필요에 따라 사도들의 이름을 빙자하여 많은 글들을 적어 성경처럼 유포하였고, 이것이 교회를 무척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에 새로운 경전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약성경 후보에 해당하는 많은 복음서, 행전, 편지(서신) 등의 문헌들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서 분류하였습니다.

1.사도로 인정되는 이가 직접 기록하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가 기록한 문헌.
2.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고 믿을 수 있는 문헌.
3.다른 문헌들과 모순되는 내용이 없는 문헌.
4.믿음과 직제가 통합된 보편교회(Catholic Church)에서 사용되기에 적합한 문헌.

이에 따른 당시의 결론을 유세비우스의 분류에 따라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호모루구메나(경전성에 의심이 없는 문서) – 4복음서, 바울 서신, 베드로 전서, 요한 1서
2.안티레고메나(경전성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서) – 베드로 후서, 요한 2-3서, 유다서, 야고보서
3.노타(경전성 인정은 어려우나, 잘 알려진 문서) – 베드로 묵시록, 요한 묵시록, 디다케, 바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 등

키릴루스는 이 중에서 호모루구메나와 안티레고메나를 합쳐 26권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이는 현재의 신약성경 구성을 결정하는데 뼈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키릴루스가 ‘노타’로 분류했던 요한 묵시록을 호모루구메나로 보아야 하며, 총 27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관철된 27권의 신약성서 구성은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구약성경 목록과 더불어 27권을 신약정경으로 최종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카톨릭 교회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일부 동방교회는 구약성경의 아포크리파(외경)와 신약성경의 안티레고메나가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논의 끝에 결국 트룰란 에큐메니컬 공의회(692)에서 동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결정 일부를 수용하여 신약성경 목록을 공유하고, 구약성경의 아포크리파는 일단 정경으로 간주하는 개선된 태도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마무리 된 것입니다.

by 코이네 자료실

성경이 맞습니까? 성서가 맞습니까?

성경과 성서는 어떻게 다른가요? 아니면 같은 뜻인가요?

먼저 대한성서공회의 공식 답변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聖經)”이라고 부를 것인지, “성서(聖書)”라고 부를 것인지, 가끔 논란이 됩니다. 거룩할 “성(聖)” 자에 경서(經書) “경(經)” 자를 쓰면 우리의 경전을 높여 부르는 이름인 것 같고, 거룩할 “성(聖)” 자에 책 “서(書)” 자를 쓰면 그 경전을 조금은 폄(貶)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서 굳이 성서라고 하지 말고 성경이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약전서와 구약전서를 거룩한 경전이라고 하든 거룩한 책이라고 하든 그것이 그렇게 예리하게 의미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경전을 다만 중국 전통에서는 성경이라고 불러오고 있고, 일본 전통에서는 성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전통을 융합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란 말도 쓰고 성서라는 말도 쓰고, 「성경전서」라고 하여 경과 서를 절묘하게 융합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성경이든 성서이든 그것은 일반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일컫는 보통명사입니다. 기독교가우리나라에서 우세한 종교가 되면서 그 용어를 기독교가 사유(私有)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성경이라고 하지 않고 성서라고 하는 것은 일본에서 불경을 성경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과 구별하려고 한 것 같다는 말을 전 일본성서협회 총무 사토 목사에게 들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정도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용어에 “성경대(聖經臺)”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불경을 놓고 읽는 독서대(讀書臺)입니다. 이제 “성경”은 “성경전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 두 자를 취한 것입니다. “성서”는,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만, “성경전서”의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 다가 다 경전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경이나 서에 가치판단의 구분은 없습니다. 예언서들은 으레 예언서/선지서라고 부르지 절대로 예언경/선지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야고보서 라고 하지 로마경 고린도전후경 야고보경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경전의 이름은, “성경”도 “성서”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의 고유한 이름은 “언약서/계약서”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약”과 “신약”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들과 공유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기독교의 경전의 성격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일면을 밝혀주기도 합니다. 계약서로서의 경전입니다. 무슨 고전으로서의 경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갑(甲)이 되고 우리가 을(乙)이 되고 중간에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증인이 되시어서 맺은 언약/계약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경전입니다. 고전적 가치나 철학적 가치로 말하자면 불경이나 유교의 경전이 성경보다 못하겠습니까? 성경이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그것이 최고의 고전이라거나 최고의 철학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은 계약서이기 때문입니다. 계약서는 계약 당사자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고전으로 읽지 말고, 하나님의 요청과 우리의 마땅한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계약서로 읽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 종교가 소원성취를 우선적으로 발생한 것인데 반하여 기독교는 “내 뜻 이루어 주십시오”의 종교가 아니라 “당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는 종교입니다. 신약과 구약이 합쳐 있는 성경전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청이 들어 있는 계약서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갈림이 이 계약을 지키느냐 어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고, 너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w박영호목사by 박영호 목사

*박영호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미국 시카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시카코에 있는 ‘약속의 교회 PNF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었냐고 질문을 할까?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저 혼자만 받는 건 아니겠지요.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얘기는
선악과를 먹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선악과를 먹지 않는 수준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느냐고 원망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 수준이 되어야 하는 자기의 책임을 도외시하는 것이죠. 도리어 하나님께 자기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지 않은 상태가 되도록 해주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됩니다.

또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잠깐 에덴동산을 상상해보시겠습니까? 어떻게 상상했습니까?
맑은 시내가 흐르고,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토끼와 다람쥐가 뛰노는 곳으로 상상했나요? 그러면 에덴동산의 크기는 어느 만하게 상상했습니까? 잠실운동장? 여의도광장?

성경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네 강이 발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입니다.서울을 중심으로 강 네 개를 꼽으면 한강, 임진강, 소양강, 한탄강입니다. 네 강이 발원한 것과 같은 얘기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에덴동산이 상당히 넓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아담, 하와가 평생을 돌아다녀도 한 번도 안가 본 곳이 있을 만한 규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평생 받아누려도 다 받아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곳 중에 왜 하필이면 선악과나무가 있는 곳에 갔을까요? 에덴동산이 잠실운동장만한 크기였으면 자기들 의사에 관계없이 늘 선악과나무를 봐야 했습니다만 에덴동산은 그 정도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평생 그 근처에 갈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갔을까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나 엄마와 아이는 서로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체 왜 그렇게 잔소리가 심한지, 자기가 공부를 안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공부할 마음이 아니니까 게임 잠깐 하고 공부하겠다는데 왜 잠시도 못기다리고 안달복달인지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체 왜 그렇게 공부하기를 싫어하는지, 지금 공부를 잘해두면 평생 유익한데, 왜 한사코 놀려고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결국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수준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왜 먹는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먹으면 죽는다고 했고, 뱀은 죽지 않는다고 했으니 둘 중에 누구 말을 믿어야 합니까? 대체 무슨 정신으로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뱀이 하는 얘기를 듣는단 말입니까? 아담, 하와는 대체 IQ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그런데도 아담, 하와가 왜 선악과를 먹었는지는 궁금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는지만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요? 보나마나 뻔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와 한통속이기 때문입니다.

강학종by 강학종 목사

강학종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하늘교회 담임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