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는 죄’ 발언한 미 연예인에 대해 무기한 방송정지

‘동성애는 죄’ 발언으로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한 미국 유명 연예인 필 로버트슨을 지지하는 온라인 청원서에 25만명 서명, 전통윤리의 역차별 문제 대두

미국의 유명 리얼리티 드라마인 오리왕조(duck dynasty)라는 드라마가 어떤 지 한 번 보고 싶군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필로버트슨이란 배우가 ‘동성애는 범죄’라는 말을 했다가 이로 인해 무기한 방송출연금지 조치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궁금해서 구글 검색을 해보니, 올해 들어 A&E가 그의 방송 복귀를 결정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아직 그의 발언은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구요. 미국은 동성애로 인해 윤리적 혼란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에 금기시하던 것이 소수자 보호라는 측면에서 슬슬 정당화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전통윤리가 역차별 받는 상황에 놓여있네요.

아래는 필 로버트슨에 관련한 기독일보가 번역한 기사입니다.

‘동성애 비판’ 발언으로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한 미국 유명 연예인 필 로버트슨을 지지하는 온라인 청원서에 현재까지 25만 명이 서명하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로버트슨은 귀농한 가족의 삶을 다룬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인 ‘덕 다필로버트슨이너스티(Duck Dynasty)’의 주연으로 활약해 왔다.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전하며 대중적 인기는 물론 기독교인 시청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온 ‘덕 다이너스티’는 미국 케이블 채널 A&E의 시청률 상승에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최근 로버트슨이 GQ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동성애는 죄이며 미국은 회개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자 A&E는 그의 방송 출연을 무기한으로 정지시켰다.

이 같은 조치는 기독교인 시청자들의 항의와 로버트슨의 방송 복귀를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중 하나인 ‘신앙을 따르는 소비자들(Faith Driven Consumers)’ 사이트의 온라인 청원서에는 27일 현재(현지시간) 25만2천 명이 넘게 서명을 남겼으며, Change.org에 올라온 청원서에는 10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이 청원서는 A&E측에 “로버트슨과 그의 가족은 물론, 그의 가치관을 지지하며 매일 그의 방송을 보는 수백만 시청자들에게도 정식으로 사과하며 그가 다시 방송에 출연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신앙 공동체의 상징과 같은 로버트슨에 대한 성급하고 차별적이며 부당한 처사는 우리 ‘신앙을 따르는 소비자들’과 보통의 미국인들에 대한 모욕이다”고도 밝히고 있다.

로버트슨의 사건은 미국 사회가 동성애에 점차 포용적으로 바뀌어가면서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따라 이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금기시되고 있는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프랭클린 그래함, 그렉 로리, 러셀 무어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마이크 허커비, 바비 진달 같은 보수 정치인들도 “신앙인들에게 관용을 요구하면서 정작 신앙인들에게는 관용을 보이지 않고 있다”며 로버트슨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망설이지 않고 있다.

한편, 로버트슨은 지난 주일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나는 나의 길을 포기하거나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며 “이는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고 나는 그 어떤 결과가 온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나는 인간을 증오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이 비록 동성애를 반대하는 발언을 했지만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로버트슨의 교회에는 동성애자 교인들도 있다.   로버트슨은 GQ와의 인터뷰에서도 “나는 (그들에 대해) 판단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며 모든 것은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판단하실 일”이라고도 밝혔다.

by 코이네뉴스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의 창조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성경의 창조사건과 창조과학은 구분되어야 한다.

 과학 교과서에 진화론의 상징으로 대두된 부분들이 창조과학자들의 소송에 의해 삭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진화론을 대표하는 증거로 여겨지던 ‘시조새’,  현행 고등학교 과학교과서에 ‘시조새는 파충류에서 조류로 진화해가는 중간 단계의 생물’로 기술돼있습니다.그런데 창조론 단체인 교과서 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는 독일에서 열린 시조새 학회의 발표를 근거로 이 내용이 잘못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조새는 중간단계의 생물이 아니라 멸종된 조류’이거나 ‘깃털이 달린 공룡’ 등으로 수정해야 한다며, 2011년 12월, 교과부에 삭제나 수정을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이에 대해 교과부가 과학교과서 7개 출판사 가운데 3곳은 삭제 방침, 2곳은 단정적 표현완화, 1곳은 고치기 어렵다는 답변을 했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이 가열되었고,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는 여세를 몰아 앞으로 계속해서 진화론의 잘못된 부분을 개정해가겠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 과학계는 진화론과 창조론이 교과서를 중심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성경의 첫 시작은 이 세상의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로 시작되는 이 선언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존재의 근원을 밝혀주는 말씀이며, 이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라는 것을 명시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기에 모든 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 세상의 창조를 아주 리얼하기 그려줍니다. 창조 이전의 세계는 혼돈과 흑암 그리고 공허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런  “무”에서 세상이라는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면  “유”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목적을 아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신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주 계획적으로 질서있게 그리고 그 존재의 목적에 맞게 만드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말씀으로 만드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 창조에 대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의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정말 정교하고 정밀하게 창조되어 있습니다. 그 창조의 원리를 알면 알수록 감탄과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되며, 과학이 발전될수록 그러한 하나님의 솜씨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만하다보니 현재의 과학력이나 이해력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을 “비밀, 신비, 기적” 등의 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숨겨버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 반기를 들며, 성경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해보이겠다는 야심찬 노력이 바로 “창조과학”입니다. 이는 진화론 관점을 주류로 하는 현 시대의 과학적인 흐름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신앙적인 과학을 추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과학은 성경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데 힘을 쏟아, 신화로 치부되어지는 성경의 내용들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증명해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노력의 결실로 성경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많은 이들에게 성경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로 신앙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하였고, 성경을 더욱 진지하게 접근하도록 하는 좋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헌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은 그 한계를 좀 더 명확하게 인정하고, 과학적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새로운 연구 방향을 가져야 신앙인에게도 비신앙인에게도 그리고 과학계에도 더욱 좋은 영향력을 미치며 발전할 수 있습니다.

시조새화석

1. 성경은 과학책이 아닙니다.

창조과학은 이 사실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보여집니다. 지금은 과학적인 사고가 사람들의 의식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어떻게 하든 과학적인 논의를 해야 좀 더 사실적인 믿음을 가지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18세기 문예부흥과 근대화가 시작되고 나서 생겨진 풍조이며, 사람의 의식과 믿음의 양상은 과학의 시대를 넘어갈 수 있고, 또 다른 양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학 만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과학적인 설명이 현 시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과학이 더 발전하다보면 지금 진리라고 받아들여졌던 것이 얼마든지 수정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과학으로 성경의 내용을 충분히 증명하였다고 믿었던 사실이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 또는 과학의 발전에 의해 뒤집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과학적인 변화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접근해가야 창조과학이 신앙에 도움이 되는 학문으로 자리잡을 수 있고, 또 과학의 한 축으로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창조과학의 이론을 지지하는 배경으로 성경을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창조과학은 성경을 현대인들에게 좀 더 현실성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도우미로서 그 역할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 내용에 따라 신앙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때로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창조과학이 점점 발전하다보니 창조과학이 말하는 과학의 내용은 성경적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식으로 역이용되는 수준에 이르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잘못하면 억측일 수 있는 내용이 성경적이기에 더욱 과학적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창조과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지구의 나이를 6천년정도에서 길게 3만년 정도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하면, 아브라함 이전에 살았던 분들의 나이를 추정해서 되짚어 보면 에덴동산의 창조가 짧게는 6천년, 길게 잡아야 3만년을 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진리로 가정하고, 과학적인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지구의 나이를 이 시기에 적당한 것을 찾아내어 그 방법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이 정도가 맞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지구의 나이를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요? 과학자들에겐 미안하지만 성경은 지구의 나이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기원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에 있으며,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성실한 노력에 의해 이 세상이 탄생되어졌다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3. 창조과학은 과학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발전시켜 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창조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발전시켜나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단지 과학 기술의 발전이 아닙니다. 과학기술의 발전만을 생각하다보면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짓을 저지를 수 있으며, 이는 인간 세상에 더 큰 재앙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과학의 윤리성이  더 큰 문제가 되는 시대입니다. 이전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에 대한 논란과 앞으로 계속 발전될 유전자공학의 문제는 과학기술의 발전 이전에 과학 윤리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그 다음 발전 방향이 가름되어지는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무조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인류의 안정과 유익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며, 더 큰 부작용이 있음을 사전에 경고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그 기술을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창조과학자들이 해야할 중요한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학의 발전이 진정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 되도록 성경의 말씀에서 그 길을 찾고, 과학의 발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길을 열어가는 것, 바로 이 시대의 창조과학자들에게 주신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창조신앙과 창조과학은 구분되어야 한다?

윤철민 목사(울산미포교회)는 <개혁신학 vs. 창조신학(CLC)>이란 책을 통해 개혁신학 입장에서 ‘창조과학’을 비평하였다. 개혁신학에서 보는 창조과학, 과연 그는 어떤 시각을 갖고 창조과학을 보고 있을까? 개혁신학 대 창조신학

저자는 먼저 ‘창조신앙’과 ‘창조과학’을 구분하며, 지구 나이에 대한 관점에 대해 “성경은 지구 나이에 관해 가르쳐주는 책이 아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리고,  창조과학자들이 언제나 성경에 호소하고 있고, 그래서 많은 신자들에게 설득력을 갖지만,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있어, 종교개혁자들의 ‘문자적’ 해석과는 다른 ‘겉보기 문자적 해석’을 사용하면서, 문자 안에 담긴 의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남용하여 성경이 주장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도, 즉 자신들의 글과 강의가 무오하며 영감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덧붙인다.

구체적으로 그는 창조과학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는 절대 도그마(dogma), ‘홍수지질학’에 대한 태도를 통해 ‘창조과학’과 ‘창조신앙’을 분리한다. ‘

노아의 대홍수’는 하나님의 심판이자 전지구적인 대격변이고 지질학적 증거를 남겼다는 주장은 옳지만, 창조과학자들의 주장대로 지구상의 화석을 생성시킨 유일한 대격변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 이같은 논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안식교)나 세대주의자들의 교리와 다를 바 없다고 꼬집는다.

또한, 타락 전에는 인간과 동물의 죽음이 없었고 그들이 채식만 했으리라는 ‘네페쉬(nephesh) 교리’에 대해선, “개혁주의는 인간이 순종이라는 윤리적 조건과 상관 없이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미신적인 믿음을 경계했다”고 답한다. 타락 이전 에덴에서 사람은 불사(不死)의 생존이 아닌, ‘행위언약’을 통해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 순종을 통해 영생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언약을 체결했지만, 아담이 이를 어겼기 때문에 무위로 끝났다는 해석이다. 동물의 불사 문제와 창세기 9장에서 파생된 ‘채식주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시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밖에 ‘인류 나이 6천년설’의 근거가 된 창세기의 족보에 대해선 “창조과학의 최대 관심사는 성경을 성경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젊은 지구를 지켜라’ 라는것 같다”며 “창세기 저자들이 먼 과거에 대한 정확한 연대기적 정보를 전달하려 한 게 아니었으므로, 연대기적 사료를 읽는 독법으로 창세기를 읽어선 안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창조과학자들처럼 ‘젊은 지구론’을 믿지 않아도 진화론자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은 ‘젊은 지구 창조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 지구 창조론과 지적설계 운동도 충분히 ‘창조신앙’으로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며,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성경을 백과사전으로 여기는 것은, 성경을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는 끝으로 “창조과학에 대해, 과학은 어쩔 수 없더라도 신학은 얼마든지 비평해 볼 수 있음에도 한국 신학자들이 창조과학의 신학을 방치해 둔 것 같다”며 “신학자들이 침묵하니 목사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 신학자들은 자크 데리다나 미셀 푸코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창조과학 같은 실용적인 신학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신학계에 건의했다.

코이네도 이 책의 저자와 일맥상통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기독교인인 오바마 미대통령 왜 성탄절에 교회가지 않았을까?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이번 성탄절 때 교회에 가지 않은 것이 구설수에 올랐다.

그가 공무 중인 것도 아니고, 고향이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인데도 그는 성탄절에 교회에 가질 않았고, 이 때문에 보수 기독교인들이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있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은 교회 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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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독교인 창조론에 대해 얼마나 믿고 있을까?

인간의 창조와 진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 미국인들은 창조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퓨리서치센터의 최근 조사(2013.7)에 따르면, “사람과 생물들이 태초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했다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미국인의 60%가 ‘아니다’ 라고 대답했으며, 33%는 그렇다고 대답하여 진화론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조금 세밀하게 살펴보면, 응답자의 32%는 무신론적 진화론 입장에서 “진화는 자연선택과 같은 자연스런 과정을 거쳐 일어났다”고 보고 있어, 인간은 신의 개입 없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이나 절대자가 진화에 개입했다”고 보는 유신론적 진화론자가 무려 24%나 되었다. “절대자가 사람과 생물들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존재하도록 진화의 과정을 이끌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표면적으로는 진화론을 수용하는 이들이 60%이지만, 인간의 모습에 대해 신이 개입했거나, 신이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이들 또한 60% 라는 것이다. 즉 신의 창조와 진화의 중간지대에 있는 이들이 1/3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_진화론_미국인

이런 결과는 응답자의 종교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였다.

백인 개신교 복음주의자는 64%가 창조론을 믿고 있었고, 흑인 개신교인은 50%가 그러했다. 주류 백인 개신교인은 15%만이 창조론을 믿고 있었고,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는 31%, 백인 가톨릭 신자는 26%가 창조론을 믿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진화했다는 주장은 백인 개신교 복음주의자의 27%, 흑인 개신교인의 44%, 주류 백인 개신교인의 78%,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의 53%, 백인 가톨릭 신자의 68%가 믿고 있었다.

재미난 부분은 진화를 믿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유신론적 진화를 믿는 사람과 자연적 진화를 믿는 사람에 대한 조사였다.

백인 개신교 복음주의자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압도적이었다. 100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백인 개신교 복음주의자 가운데 8명, 흑인 개신교인 가운데 17명, 주류 백인 개신교인 가운데 36명,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 가운데 27명, 백인 가톨릭 신자 가운데 33명은 하나님이 현재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들지 않았으며 진화에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즉 이들은 기독교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다는 대답을 하였다.

또 하나 주목할 사항은, 여성들이 창조론을 더 잘 믿는 경향이 있었다.여성의 38%가 창조론을 믿는 반면, 남성은 28%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릴수록, 고학력자일수록 진화론을 믿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18세에서 29세는 68%가 진화론을 믿고 있었으나, 30세에서 49세는 60%, 50세에서 64세는 59%, 65세 이상에서는 49%로 점점 줄어 들었다.

반면, 창조론은 18세에서 29세는 27% 뿐이었으나, 30세에서 49세는 33%, 50세에서 64세는 35%, 65세 이상에서는 36%로 점점 늘었다.

대학을 졸업한 경우는 72%가 진화론, 24%가 창조론을 믿었다. 대학 재학의 경우는 62%와 33%, 고등학교 이하는 51%와 38%로 각각 나타나 고학력자일수록 진화론, 저학력자일수록 창조론을 믿는 경향이 뚜렷했다.

정치적 성향에 따른 차이를 보면 민주당원의 67%와 무소속의 65%는 진화론을 믿는 반면, 그리고 공화당원은 43%만이 진화론을 찬성했다.

미국인들이 진화론을 믿는 경향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2004년에는 단지 13%가 인간은 오직 자연적 과정을 통해 진화된 존재라고 믿고 있었고, 2008년에는 단지 15%가 믿고 있었다.이번 조사에서 미국인의 33%는 인간은 하나님 없이, 수십억 년에 걸쳐서 진화된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남자의 가슴을 뛰게 하는 교회

소토교회

교회여 남자의 심장을 뛰게 하라, 남성의 박진감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두둑한 교회

연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대 교회에 여성과 장년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렇게 장년층 특히 여성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그들을 끄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남자들과 청년들은 그들의 가치를 무시당하거나 나쁘게 보기 때문에 교회에 오길 꺼려한다고 한다는 말이 된다.

현대 교회는 부드러운 아내, 엄마와 같은 포근함, 섬세하고 정적인 현모양처와 같은 그런 여성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교회는 불안하고 긴박한 세상 속에서 그 인생을 잡아주는 영혼의 닻이며, 안전과 평안과 안위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여성 중심적인 교회에서 남성들은 혹 편히 쉴 수는 있을 지언정 그들의 가슴을 뛰게하며, 그리스도에게 헌신적인 사람이 되게 하긴 어렵다.

남자들은 도전 지향적이며, 짜릿함을 원한다.뭔가 자신이 주도적으로 일을 벌이고자 하는 기회를 찾고 있으며, 그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때로 위험도 과감히 받아들인다. 다른 남자들이 모험으로 사는 모습을 보면거기에 뛰어들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땀흘려 올라가서 깃발을 꼿고 싶은 저 높이 보이는 정상이 필요한 것이다.

미래지향적인 교회는 이런 남자들의 마음을 뛰게 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비전을 꿈꾸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큰 모험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큰 배를 저어가며, 서로 도전을 주고, 모험하도록 격려한다. 남자들은 이러한 배짱 두둑한 교회로 몰려드는 것이다.

남자들이 깨어나야 교회의 양적인 성장도 이루어진다. 왜냐면 남성들은 가족을 교회로 이끌고 오기 때문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엄마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 가족들의 17%가 엄마를 따르지만, 아빠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즉각 93%가 따라간다고 한다.

기독교의 가장 큰 역설 중 하나는 기독교의 가치는 여성적이지만, 삶은 공격적이고 남성적인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이제 교회가 그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남성들이 자기 위치를 찾아서, 남자들의 타고난 재능이 교회를 위해 드려지도록 남성적인 목소리를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예수님을 사형선고한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인가?

예전에 성경에 있는 인물들이 과연 실제 인물인가 하는 논란이 많이 있었다. 그 중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선언한 본디오 빌라도도 그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 외에는 그 인물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디오 빌라도 그는 정말 실존인물인가? 오늘 그 정체를 밝혀본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 「디베료·가이사」치하에서 유대지역의 로마 5대 총독(AD26-36)으로 임명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예수님의 재판을 직접 주관하였던 인물로서 성경에 언급되어있다. 사도신경에서도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suffered Under Pontius Pilate)라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아그립바」 1세가 말하는 빌라도는 천성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고 굽힐 줄 모르는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규탄하였다. 빌라도와 유대인들 간에는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원한과 감정으로 대립되었다고 한다.

역사가 필로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특별히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휘장을 사용하거나, 빌라도와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방패를 걸어 놓음으로서 유대인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또한 빌라도는 성전의 보물들을 압수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필로와 요세푸스는 빌라도를 강탈자와 포학자로 묘사하고 있다. 눅13:1에 의하면,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극악한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하기 전에 그의 총독직을 위협하는 민중봉기를 두 번이나 당했다. 첫 봉기는 로마군을 투입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세속화시키려고 시도한데서 발생했다. 유대인들은 즉각 폭동을 일으켰다. 빌라도는 5일만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두번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궁전에 세운 「로마」기념비를 제거하라고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피에 굶주린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아내의 청원은 그로 하여금 예수를 석방시키도록 용기를 주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는데 용기가 없었다. 그와 같은 그의 성격은 군중들의 압력 때문에 예수에 대한 판결을 바꾸어버리는 성경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마리아의 거짓 선지자가 그리심산에서 성전보물을 찾아내겠다고 주장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심산으로 몰려 들었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빌라도는 군중들이 갑자기 모임으로 인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유대인들 몇 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화근이 되어 사마리아 지방에서 격렬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 사건 때문에 빌라도는 AD 36년에 로마로 소환 당하고 총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가「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항상 예수의 비극의 순간을 잊을 수 없었으며, 그로부터 수년 후에 칼리쿨라 황제때에 유배를 당하여 고심하다가 자살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주장에 의하면 네로황제 때에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가 후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의 아내와 함께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특히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던 그의 아내는 프로쿨라라고 알려져 있는데, 에디오피아교회에서는 빌라도와 그의 아내가 추앙을 받고 있으며, 희랍정교회는 그의 아내 프로쿨라만이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성 니콜라스에서 시작된 산타가 음료회사 CF모델이 되기까지

산타의 유래와 정체, 산타는 어떻게 성니콜라스 주교에서 코카콜라의 CF 주인공이 되었는가?

드디어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성탄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산타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없는 산타, 그러면서 성탄절의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산타는 누구인가? 산타의 정체를 파헤쳐봅니다.

산타

1. 산타란 누구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Santa는 아마 북부 추운 나라 어딘가 에서 탄생했을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Santa는 Turkey의 중앙, Anatolia 지방의 남쪽 Myra라는 곳, 그러니까 추운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막지형에 가까운 곳에서 기원전 4세기에 일생을 보낸 실존 인물 St.Nicholas가 원조입니다.   당시 그 지역의 주교로 있던 성니콜라스는 어린이를 특히 좋아하였고, 또 많은 선행을 행했습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사는 세 명의 자매가 구혼자가 있음에도 가난해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자 이들을 몰래 도와 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저녁에 그 집 지붕에 몰래 올라가 금 주머니를 굴뚝으로 떨어뜨렸는데, 공교롭게도 그 금 주머니가 벽난로에 걸어 두었던 양말에 들어가게 되었다네요.그래서 성탄절 전날에 아이들이 선물을 받기 위해 머리맡에 양말을 걸어두는 풍습이 생긴 것이라 합니다.

그후 12세기 초 프랑스의 수녀들이 니콜라우스의 축일 (12월 6일)의 하루 전날인 12월 5일에 과거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을 기념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고, 그 풍습이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17세기쯤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성 니콜라우스라는 이름 대신 산테 클라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산타클라스는 뉴욕에서 자본화, 상품화의 연금술사 미국인들에 의해 지금 모습의 Santa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재탄생된 산타클로스는 그 정체마저 다시 세탁이 되어 터키의 성자 니콜라스가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전설적인 인물로 각색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산타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어디에 산타 본부가 있다고 여겨져 매년 전세계 어린이들이 자신의 소망과 받고 싶은 선물을 적은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칸디나비아에 있다고 알려진 Santa 는 원래 이 지역에서 구전되던 말을 타고 선물을 나눠줬다는 바이킹의 신 Odin과 염소를 타고 비슷한 일을 했다는 그의 아들 Thor의 전설이 미국식 Santa와 결합된 것이라고 하네요.

그러니까, 터키에 살았던 St.Nicholas와 염소를 타고 다녔다는 바이킹의 신이 미국에서 만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지금도 아이들의 동심에서 살아, 성탄절의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Santa 할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산타_성니콜라스 주교

그래서 제가 산타는 짬뽕이라고 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슬프기까지 한 전설의 우여곡절이지만 그 모든 것이 섞이고 무쳐 오늘날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핵심은 바로 St.Nicholas의 인류애와 박애정신이 지금의 Santa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배불뚝이 빨간 옷의 산타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런데 성니콜라스의 화신이라는 산타, 그 산타는 어떻게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하고 배가 불룩할 뿐 아니라 기분좋게 “호! 호! 호!”하고 웃는 흰 수염이 있는 싼타클로스 할아버지로 캐릭터화 되었을까요?

그리고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면서 “호~ 호~ 호 메리크리스마스” 하고 달리는 싼타클로스의 모습은 1822년 성탄절 이브에 미국의 신학자인 클레멘트 무어라는 분이 쓴 시인 “성 니콜라스의 방문”에서 처음 등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호주에서는 산타의 ‘호~호~호~’라는 웃음소리가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를 가졌다하여, 법적으로 산타에게 이렇게 웃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웃음 소리인 Ho-Ho-Ho에서 ‘Ho’와 비슷하게 들리는 ‘Hoe’가 ‘매춘부’라는 뜻의 단어 ‘whore’의 속어이기 때문이라네요. 산타는 호주에선 또 다른 웃음을 개발해야 감옥에 가지 않겠네요.

그리고 원래 날씬 했던 산타가 흰 털이 달린 빨간옷과 검은 벧트를 두르고 긴 고깔모자를 쓴 뚱뚱보가 된 것은 미국 만화가 Thomas Nast가 1863년에 그린 만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20년동안 잡지에서 산타의 캐릭터를 계속 발전시켜왔다고 하네요.

Tomas nast의 산타

그러다가 1931년, 미국의 음료 회사 코카콜라가 겨울철 콜라 제품 판매량이 급격히 감소하자 이를 막기 위해 홍보 전략으로 코카콜라의 상징적인 색, 붉은 색을 산타클로스에게 입히면서, 백화점 홍보에 나선 이후 이 모습이 크게 유행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제 산타의 정체를 아셨죠? 제 생각에는 예수님을 닮은 성니콜라스처럼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하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이번 성탄에 선한 일을 하신다면 (물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것도 포함해서요) 그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산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Merry Christmas ~~~  행복한 성탄 되세요.

개신교 정통교단들도 선거부정과 현 정부에 대해 비판해

개신교 정통교단들도 현 시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국선언을 해

한국의 대표적인 정통교단이라 할 수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이 이번 성탄절을 앞두고 현 정부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교단 총회장의 목회서신 형식으로 발표하였다. 천주교의 박근혜 대통령 하아 발언으로 정부와 종교가 첨예한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개신교 정통교단이 여기에 가세해 정부를 비판한 것이라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다음은 예장통합 교단 총회장 명의의 목회서신 전문이다.

2013년 대림절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 총회장 목회서신

김동엽목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우리는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이 땅을 회복시키신 메시야를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게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였던 것처럼(눅4:18),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은 자로서 우리의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기며(막10:45)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마5:9)으로 대림절의 참된 소망을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총회는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 이웃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각 시대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하며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위한 사회적 책임을 기꺼이 감당해 왔습니다.

먼저 우리 총회는 지난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과 국방부사이버사령부의 개입으로 인한 국론분열, 정치권의 비정상적 국회운영, 민생문제의 소외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중히 지켜온 민주주의 원칙과 국민의 주권을 무시한 행위입니다.

또한 정부가 성직자의 말씀선포사역에 대해 감시, 고소 및 수사를 하는 행위는 자유로운 종교활동과 언론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총회는 이 일에 중심에 있는 책임 있는 당국자들의 사과를 요청하며, 재발방지를 위한사후 대책을 제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총회는 IMF 경제 위기 당시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신앙각서”를, 2,000년대를 시작하면서는 “새 천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신앙과 경제생활”을, 세계에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경제 정의, 생태정의에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표하고 성서적 경제관를 바탕으로 청지기적 경제정의 실천운동을 해왔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구조화된 빈부격차 속에서 청년취업문제, 비정규직 문제, 고용불안과 실업문제, 여성노동자 차별문제, 장애인고용문제 등으로 신음하고 있지만, 정부는 이들의 요구에 응답하기보단 대기업 친화적 정책으로 경제정의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총회는 정부가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을 기반으로 안정과 성장의 동력을 만들어 가기 위해 경제정책의 민주적 전환을 요구합니다.

 또한 우리 총회는 지난 WCC 제10차 총회에서 채택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성명서”가 증언한 바 대로 분열, 전쟁, 고통은 충만한 생명을 바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모순됨을 고백합니다. 지속되고 있는 북한의 인간적 삶의 위기를 고려할 때, 국제사회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재개하고 북한의 지속가능한 개발 프로젝트를 실행하며, 유엔이 한반도에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윤리적이며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대북 경제제제와 금융제재의 해체를 고려할 것을 요구합니다.

총회는 분단체제를 유지하는데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의 부담감과 핵무기를 포함한 전쟁의 위험을 떠안고 살아왔던 지난 60여년의 반생명적 분단 상황이 너무 길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총회는 정부가 평화통일을 향해 가는 민족공동체의 사회적 통합과정을 수립하고, 평화협정체제를 포함한 구체적인 일정표를 제시하여 평화통일의 길을 적극적으로 열어 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끝으로 무엇보다 가슴 아픈 현실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역할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하므로 사회적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기초한 사회적 책임과 참여와 봉사에 대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도외시하고, 이웃과 소통하지 못한 채, 여전히 교회의 벽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총회는 이 대림절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교회와 세상이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화평의 주님이 오셔서 한국교회가 불의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세상에 흩어진 모든 교회들과 민족들에게, 특별히 고통 가운데 있는 북한 동포들에게 중동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에게 의와 화평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평화.

2013. 12. 5

총회장 김동엽 목사

제자교회의 판결로 본 교회의 재정 부정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제자교회의 판결로 본 교회의 재정 부정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제자교회 재정부정을 규탄하는 시위

서울남부지방법원 제12형사부(재판장 김용관)의 제자교회 관련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측의 검사는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과 이를 반박하는 피고인측 변호인들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진행되었다.

검찰측은 교회의 재정을 제자교회 내규와 절차에 따라 집행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재정을 선교비라는 명목으로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주장한 반면, 변호인측은 경우에 따라서는 내규와 절차와 상관없이 교회의 일반적인 관행으로 선교비를 지출할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이 서로 맞선 것이다. 

본 건과 관련해서 대법원의 종교단체의 횡령죄의 판례를 보면 

▲위탁받아 보관하고 있는 교회 재정이 사라졌을 경우 그 행방이나 사용처를 설명하는지의 여부,

▲피고인이 주장하는 사용처, 즉 선교비에 사용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는 자료의 존재유무,

▲피고인이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는 신빙성 있는 자료를 반박하지 못하는 경우

한결같이 불법영득의 의사로써 횡령한 것이라고 추단하는 취지로 판단하고 있다(대법원 2000. 3. 14. 선고 99도457 판결).

또한 사용처에 대한 입증뿐만 아니라 재정집행에 대한 정당한 절차가 내규와 내규가 없을 경우 교인총회를 통해 정당한 절차에 따라 집행했느냐를 판단한다.

교회의 재정은 교회의 재산이다. 기독교 단체인 교회에 있어서 교인들의 연보, 헌금 기타 교회의 수입으로 이루어진 재산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교회 소속 교인들의 총유(總有)(지분권 없는 공동재산)에 속한다. 따라서 그 재산의 처분은 그 교회의 정관 기타 규약에 의하거나, 그것이 없는 경우에는 그 교회 소속 교인들로 구성된 총회의 결의에 따라야 한다. 비법인사단인 교회의 대표자는 총유물인 교회 재산의 처분에 관하여 교인총회의 결의를 거치지 아니하고는 이를 대표하여 행할 권한이 없다(대법원 2009. 2.12. 선고 2006다23312 판결)고 판시하고 있다.

즉 교회의 재정은 교회의 내규에 따라 집행해야 하며, 그러한 내규가 없다면 교인총회라 할 수 있는 공동의회에서 예산ㆍ결산의  승인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교인총회에서 결의해 준 예산항목이 없으면 지출할 법적 근거가 없으며, 이를 어길 경우 지출행위는 불법행위가 된다. 마치 국회가 예산 승인을 해 주지 않으면 행정부가 집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목동제자교회  횡령에 관한 검찰 조사 결과, 정 목사는 2008년 10월부터 2010년 2월까지 32억여 원의 교회 헌금을 횡령했다. 정 목사는 2011년 12월 2일 열린 1심에서 징역 4년, 이듬해 5월 30일 열린 2심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정 목사와 공모한 서 아무개·홍 아무개 집사도 각각 징역 1년 6월과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2013년 8월에 정삼지 목사는 가석방되어, 지금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과 함께 하고 있고, 아직까지 교회는 그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