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감 넘치는 살아있는 예배를 위한 실험

전 요즘 온전한 예배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정말 하나님께서 임재해계신 그 체험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과 그 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순종하고 싶고
하나님이 절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온 몸과 마음과 영으로 느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예배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먼저 성도간의 축복과 사랑의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몸풀기 체조를 합니다. 몸과 정신을 각성시켜서 예배에 집중하려고
하는 몸부림이죠. 그런데 이것도 반발이 만만찮습니다.
예배의 경건을 해친다며 하도 말들이 많아서 지금은 아주 간단하게 합니다.

예배 첫 순서에 찬양을 세 곡 이어서 부릅니다.
세 곡 부르는데 15분정도 소요됩니다. 한곡을 몇번 반복해서 부르죠.
찬송가도 부르고, CCM도 부릅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5곡을 불렀는데, 우리 교인들 중 연세많으신 분들이 많아
5곡을 이어 부르는 것은 체력적으로 무리가 있더군요.
그래서 이것도 3곡으로 줄인 것입니다.

찬양이 끝나면 바로 통성기도로 들어갑니다.
그리 크게 소리 높이진 않지만 진지하게 뜨겁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죠.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난 후
여기가 장로교회가 맞냐고 묻는 분도 있습니다.
신선하고 참 좋았다는 분도 있고, 적응이 안된다는 분도 있습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예배를 한 두시간 드리고 싶은데
아마 그렇게 하면 남아 있는 교인들 몇 사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일 주님 앞에 왔는데 왜 그리 시간에 모두 매여 살아가는지..

그래도 하나님과 온전히 소통하는 예배를 위한
실험은 제가 목회하고 있는 동안 계속 될 것입니다.
완벽한 예배 순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전 보다 더욱 진실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는 생동감이 넘치는 예배
그렇게 예배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정은 더욱 커져야 합니다.

오늘도 모든 교회 활동을 마친 후
예배당 청소를 하곤,주님께 물어봤습니다.
“주님, 우리가 드리는 예배 때문에 행복하셨습니까?”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광화문 단식장 유민 아빠를 만나러 간 목사님

청와대 방문하는 유민아빠, JTBC 보도
청와대 방문하는 유민아빠, JTBC 보도

광화문 단식장과 청와대 앞에서 유민 아빠를 보고, 단식장에서 문재인 의원과 함세웅 신부님을 만나 말씀을 나누었다.

연구실로 가던 발길을 돌려 오늘은 꼭 용기를 내어 유민 아빠에게 직접 한 말씀이라도 드리리라 결심하고 광화문으로 갔다. 뜨거운 볕 아래 한참 기다리고 서 있었지만 좀처럼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 빵집에 가서 좀 기다렸다. 다시 단식장에 갔더니 유민 아빠는 안 계시고 문재인 의원과 함세웅 신부님이 유민 아빠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유민 아빠 옆에 계시던 유가족에게 물었더니 청와대 분수대 앞으로 대통령 면담을 위해 가셨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바로 청와대 분수대 앞으로 갔더니 유민 아빠는 뜨거운 볕 아래 사복을 입은 수많은 남녀 경찰과 기자단에 둘러 싸여 지팡이를 짚고 벌을 서고 계셨다. 한동안 지켜보고 섰다가 답답한 마음에 다시 급히 단식장으로 갔다. 문재인 의원에게 상황을 이야기 하고 청와대 핫라인으로 연락을 취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보좌관에게 문의원과 얘기할 수 있는가 물었더니 이제 단식을 하겠다고 하니 조금 조용히 머물게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문의원은 나를 쳐다보았고 귀를 기울일 자세를 취하셨다. 그래서 문의원에게 유민 아빠가 아무 대책없이 기다리게 하지 말고 청와대 핫라인으로 연락을 취할 수 없는지 물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이미 청와대 요인이 다 알고 있다는 대답을 했다.

나는 문의원에게 유민 아빠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 모른척하지 않고 단식장에 기꺼이 나와 줘서 교황이 유민 아빠 손을 잡아 준 것보다 더 반갑고 고맙다고 얘기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교황보다 더 반갑다는 내 말에 함세웅 신부님의 표정은 조금 의아해 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내 주관적인 해석일 수 있다. 그렇다고 로마주교님이 유민 아빠에게 내민 따스한 손길과 경청을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크게 감사하고 아름다운 분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오늘 여덟 번째 유민 아빠를 가까이서 보았지만, 아직 한 번도 직접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사실 나보다 젊은 분이 60세 노인처럼 주름이 늘어나고 몸이 상한 모습을 보면서 힘드실까 염려되어 감히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문재인 의원과 유민 아빠 옆에 계시던 유가족 분에게는 조금 말씀을 드릴 수 있었다.

문재인 의원은 정말 경청을 했고, 내 얘기 가운데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질문을 했다. 요지는 누구나 바라는 바와 같은 것이었다. 유민 아빠 스스로 “나는 내 할 일을 이제 다했다”고 말씀하셨듯이 그 분은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하셨으니, 단식을 중단하시고 살아남아서 국민과 함께 투쟁하자고 말씀드려 달라고. 정신은 무한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만 인간의 육체는 한계가 분명히 정해져 있는 법, 유민이 동생 유나를 위해서라도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몸이 손상될 때까지 단식을 하시지 말도록 제발 옆에서 부탁드려 달라고. 제발 빨리 의료조치를 받으시게 하라고. 그랬더니 유가족 분이 온 국민이 함께 단식 중단 요청을 하면 그 말을 따를 거라는 말씀을 하셨다.

단식장에서 돌아서는 데 철학과 김정관 선배님(지금은 개명을 하셨지만)이 눈 앞에 서 계셨다. 무슨 일로 오셨나 물었더니 고1 아들이 단식장에서 3일을 단식하고 마치는 날이라 죽을 사 먹이러 오셨다고 했다. 멋진 부자의 모습을 보고 내 마음이 밝아졌다.

손은실교수by 손은실 목사

 

세월호 유가족의 한가지 요구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세월호희생자 합동분향소
세월호희생자 합동분향소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요구를 보면, 그 지향이 분명히 보인다. 우리 아이들은 죽었지만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한 지점에 많은 목소리들이 오롯이 모이고 있다.

재발방지를 위한 첫 걸음은 진상규명이다. 철저한 진상규명 없이 넘어가자는 것은 대한민국을 이런 위험천만의 상태에 그대로 방치하자는 것이다. 수사권 기소권 다 가지고도 거대권력 앞에서 힘을 못쓰는 것이 대한민국의 사법현실일진대, 수사권,기소권을 가진 위원회는 진상규명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이다.

 실질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인 보상 등도 유가족들에게는 주요 관심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자기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또 비슷한 사고를 당할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저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멀쩡히 눈 앞에 보이는 근해에서 아이들이 고스란히 수장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국민들의 아픈 마음을 위한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상식적 노력도 조직적으로 해내지 못하는 정부라는 조직의 무능함과, 그 무능을 떠 받치고 있는 거대악의 잠재적인 희생자인 우리 아이들,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진의가,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은 주장이 심하게 왜곡되어서 이해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언론의 장난을 빼 놓을 수 없으리라. 세월호 참사 때, 가장 추한 민낯을 드러낸 것이 언론 아니던가? 그런데, 국민들은 또 다시 그 가해자인 언론의 장단에 따라 피해자인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이 피해자들이 자신들이 당한 아픔의 피해의식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를 향한 문제의식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세월호 100 일을 맞아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보는 일이 아프지만 유익이 된다면, 그 때 우리가 목도했던, 그리고 이내 그 자취를 감추고 열심히 포장하고 있는 거대악의 실체를 복기해 보는 일이 꼭 포함되어야 한다.

상황은 어렵고, 문제는 복잡하다. 그러나, 목표는 단순하고 선명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by 코이네뉴스

윤일병 구타사망사건과 군대 총격사건에 대한 기독교의 성명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교단에서 육군 제28사단 총기사망사건과 병영 내 구타로 인한 윤일병 사망사고에 대해 성명서를 내었다. 사실 이번 윤일병 사망사건은 내 자식을 군대에 보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한 그런 사건이었다. 아직도 구타로 군기를 잡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우리 군대의 문화, 이제는 이 미개성을 벗고 고쳐야 한다. 군대의 개혁, 이는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사회적 책임이다.

윤일병 구타 사망사건에 대한 JTBC의 보도
윤일병 구타 사망사건에 대한 JTBC의 보도

 

육군 제 28사단 관련 총회장 성명서

 최근 제 22보병사단 총기사망사건을 비롯한 연이은 병영 내 사망사고들과 특별히 이번 28보병사단 윤 일병 사망사고를 보면서 국민의 한사람으로 신앙인으로 우리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개인과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소중한 한 생명이 폭력에 의해 사라지게 된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 입대 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자식을 봐야 하는 부모의 고통과 좌절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군의 폐쇄적인 구조로 인해 윤 일병이 집단폭행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우리의 무능함에 더욱 분노할 따름입니다. 지금은 윤 일병의 눈물을 닦아주고 윤 일병이 과제로 남기고 간 군대의 구타가혹행위라는 악습을 뿌리 뽑는 과제를 해결해야 할 때입니다.

지난 25년 동안 군은 구타와 가혹행위 등 고질적인 군내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고, 국민들은 군이 부단한 자기개혁을 통해 구타 및 가혹행위 등 악습을 근절한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28사단 집단구타사망사건은 군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뢰를 송두리째 날려 버렸습니다. 이번 사건은 숱한 대책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명백히 보여주었으며, 구타 및 가혹행위가 근절되기는커녕 ‘야만적 폭력’이 음성화되어 가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집단폭력행위를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군이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집단이 아니라 마치 조직 폭력배들의 힘겨루기 마냥 자기보다 아래 사람을 힘으로 제압하는 비인격적 집단으로 보이는 것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이번 사건의 잔혹함에 제대로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에 우리 총회는 다시는 군대 내에서 이번과 같이 추한 악행이 재발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촉구합니다.

1. 군은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의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동시에 군내에 있는 인권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교육을 강화하고, 반인권적인 집단행동을 모니터링 하고, 예방적 조치를 취하는 제도개선이 시급합니다. 윤 일병 사망 전에도 이 부대에서 가혹행위와 폭행이 ‘대물림’ 됐던 것으로 알려진 바, 이번 사건의 진상을 거짓 없이 밝히고 유사 사건이 벌어질 가능성을 차단하는 철저한 구조개혁이 필요합니다.

2. 우리 총회는 가해자들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을 요구합니다. 국방장관도 윤 일병 사망사건과 관련한 군 수뇌부 긴급회의에서 “선임병들의 구타와 가혹행위에 의한 윤 일병 사망사고는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수치스럽고 안타깝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분노와 공분 그 자체임을 군 수뇌부는 명심하고 엄정한 책임적 사후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들에 대해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정서와 여론을 겸허히 수용할 뿐만 아니라, 이런 사건이 병영 내에서 일어난 것은 군 기강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군 지휘계통에 연대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3. 향후 이와 유사한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한 강력한 조치를 촉구합니다. 군내 폭력은 전투력을 훼손하는 중대 범죄인데도 군 수뇌부의 인식은 여전히 안일하게 보입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처벌 수준으로 마무리할 것이 아니라, 병영문화 전반에 걸친 대수술을 필요로 합니다. 군 당국은 지금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는 국민들의 정서와 요구를 잘 살피시고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차원의 재방방지 대책을 조속한 시일 안에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총회는 그동안 군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국가권력의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군선교에 힘써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28보병사단 사고를 보며 이러한 기본적인 신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군은 병영 내 폭력과 가혹행위가 국민들을 얼마나 절망하게 만들고 있는지, 군이 다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결단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똑바로 직시하고, 철저한 진상조사와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 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장 김동엽 목사

 군농선교부장 이상진 목사

교황의 한국 방문 개신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교황의 방문과 한국 개신교회

한국을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족벌주의, 혈족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nepotism 의 어원은 라틴어의 nepos, 영어의 nephew 입니다. 옛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자신의 조카들을 고위직에 앉혀서 기득권을 유지해 가던 데서 생긴 말입니다. 신부들은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가 없었기에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성직자 독신정책이 그 성경적 근거 여부를 떠나, 다행이라 여겨지는 대목입니다. 성속을 초월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교황과 추기경들이 대를 이어 그 권력을 세습했다면 그 타락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개인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며, 탁월한 종교지도자, 세계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귀한 어른 중의 한 분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로마 가톨릭 교황제도를 합리화해주지는 않습니다. 교황 제도가 성경의 가르침과는 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가톨릭 내에서도 교황이라는 명칭과 제도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반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전체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것은 옳지도 지혜롭지도 않습니다.

옳지 않다는 것은 많은 개신교도들이 아는 가톨릭에 관한 지식은 면죄부를 팔던 500 년 전의 것이라는 판단에서 입니다. 그 동안 가톨릭은 상당한 개혁의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우리 또한, 500 년을 흐르는 사이 얼마나 바뀌었나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개신교란 고쳐서 새롭게 했다는 말인데, 그게 언제적 이야기입니까? 오래 전에 “신장개업” 간판을 붙여 놓고, 그 간판이 낡아서 빛이 바랬는데도, 여전히 자신들이 새로운 식당이라고 착각하는 촌부의 모습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경직된 위계구조가 비성경적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메가 처치 위주의 소비자 기독교 문화는 이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교권의 독점과 그 그늘의 폐해도 크지만, 최소한 그들에게는 이근안이나 서세원 같은 사람들, 아직 조폭 때를 못 벗은 이들을 성직자로 세우는 일은 없습니다. 콘클라베가 폐쇄적이라고 하나, 일부 교단의 총회장 선거나 연합단체들이 풍기는 악취에 비하면 청정구역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지금의 교황은 조카를 후임으로 삼는 그런 변칙 세습도 안 합니다.

지혜롭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포용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여러가지 일로 개신교도들이 속좁은 사람으로 비추어지고 있는데, 교황 방문에 대한 반감을 거칠게 드러내는 것은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인해 줄 뿐입니다. 환영을 하던, 침묵을 하던, 둘 중의 하나가 좋겠습니다. 침묵은 가만히 있자는 말이 아닙니다. 고쳐서 새롭게 함이라는 좋은 이름을 갖고 있는 우리가 오늘에 이르러 왜 이렇게 되었는가, 변화의 동력도 갱신의 소망도 상실해 버렸나를 헤아려 보는 기회로 삼자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오늘의 모습에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 최대의 기여자는 종교개혁자들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중세 말의 극단적인 타락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절대 권위의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까지 하면서 맞선 한 수사에 의해 시작된 운동의 충격을 내적으로 소화해 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황의 높은 인기, 가톨릭에 대한 대중의 선호가 개신교도들에게 불편하게 여기진다면, 이를 잘 곱씹는 것으로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약자의 편에 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넓고 깊은 존경을 받을 수 있는가는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물론, 가톨릭의 교리와 제도에 비성경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의 교리도 완벽하지는 않으며, 그 실천에 있어서 많이 모자란 것이 사실입니다. 겸손하게 서로 배우고, 격려하며, 바르지 못한 부분은 냉철하게 지적하며,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형 동생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황의 높은 인기는 그가 담지하고 있는, 약한 자를 위한 메세지의 파급이라는 면에서 기쁘고 반가운 일이지만, 염려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는 본질적으로 진리와 함께 가기 힘든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를 철저히 경계하신 바 있습니다 (요 6:15). 프란체스코 교황 개인은 이 긴장을 어찌 어찌 잘 소화한다 하더라도, 메스 미디어 시대에 셀레브리티 교황의 파워를 실감한 바티칸이 교황 마케팅의 유혹을 거절해 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경직된 교권 구조의 수장이 유명인사의 인기까지 겸한다면, 그것이 한 종교집단의 현실적 이익과연결된다면, 그 부작용 또한 감당하기 힘든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황을 환영하되, 너무 열광하지는 않으면 좋겠습니다. 귀하게 여기되 지나치게 기대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by 박영호 목사

충고의 법칙, 약보다 음식이다

충고로 사람이 변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남에게 충고했다가 관계가 나빠진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충고는 쓴 약과 같습니다.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약을 기꺼이 삼키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충고가 약과 같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약은 식후에 먹으라고 권합니다. 위에 음식이 없이 약만 들어가면 오히려 몸이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충고도 이와 같습니다.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그러나 쓴 약입니다. 음식은 좋은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자주 나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칭찬해 주는 사람이 가끔씩 따끔한 충고를 할 때, 우리는 힘들지만 받아들이려 노력합니다.

좋은 음식을 지속적으로 먹으면 약 먹을 일이 줄어 든다고 하지요. 심지어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 눈에 들어오고 충고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마다 생각하세요. 약보다 음식이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세요. 그러면, 내가 그렇게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그냥 지나가면서 한 말도 그 사람이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by 박영호 목사
w박영호목사박영호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미국 시카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시카코에 있는 ‘약속의 교회 PNF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었냐고 질문을 할까?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저 혼자만 받는 건 아니겠지요.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얘기는
선악과를 먹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선악과를 먹지 않는 수준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느냐고 원망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 수준이 되어야 하는 자기의 책임을 도외시하는 것이죠. 도리어 하나님께 자기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지 않은 상태가 되도록 해주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됩니다.

또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잠깐 에덴동산을 상상해보시겠습니까? 어떻게 상상했습니까?
맑은 시내가 흐르고,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토끼와 다람쥐가 뛰노는 곳으로 상상했나요? 그러면 에덴동산의 크기는 어느 만하게 상상했습니까? 잠실운동장? 여의도광장?

성경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네 강이 발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입니다.서울을 중심으로 강 네 개를 꼽으면 한강, 임진강, 소양강, 한탄강입니다. 네 강이 발원한 것과 같은 얘기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에덴동산이 상당히 넓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아담, 하와가 평생을 돌아다녀도 한 번도 안가 본 곳이 있을 만한 규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평생 받아누려도 다 받아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곳 중에 왜 하필이면 선악과나무가 있는 곳에 갔을까요? 에덴동산이 잠실운동장만한 크기였으면 자기들 의사에 관계없이 늘 선악과나무를 봐야 했습니다만 에덴동산은 그 정도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평생 그 근처에 갈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갔을까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나 엄마와 아이는 서로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체 왜 그렇게 잔소리가 심한지, 자기가 공부를 안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공부할 마음이 아니니까 게임 잠깐 하고 공부하겠다는데 왜 잠시도 못기다리고 안달복달인지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체 왜 그렇게 공부하기를 싫어하는지, 지금 공부를 잘해두면 평생 유익한데, 왜 한사코 놀려고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결국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수준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왜 먹는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먹으면 죽는다고 했고, 뱀은 죽지 않는다고 했으니 둘 중에 누구 말을 믿어야 합니까? 대체 무슨 정신으로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뱀이 하는 얘기를 듣는단 말입니까? 아담, 하와는 대체 IQ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그런데도 아담, 하와가 왜 선악과를 먹었는지는 궁금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는지만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요? 보나마나 뻔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와 한통속이기 때문입니다.

강학종by 강학종 목사

강학종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하늘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사울과 바울, 사울이 회개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난 후에 이름이 바뀐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창 17:5), 사래는 사라가 되었고(창 17:15),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창 32:28). 예수님께서 시몬을 만나시고는 그가 게바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2).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지요.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은 교회 내에서 거의 일반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이 된 것 같이 우리도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울은 큰 자, 바울은 작은 자”라고 주장합니다.정말 성경에는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일까요?

1. 바울은 사울이 회개한 후 새롭게 지어진 이름?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은 잠시 접어두고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이 되었다.”라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사울이 회개한 이후에는 바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사울이 다메섹(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돌이킨 것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로 돌이킨 후에 담대하게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22에서 우리는 그가 여전히 사울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한 바나바도 그를 사울로 불렀으며(행 11:25), 사도행전 12장에서도 그는 여전히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행 12:25). 13장에는 성령님께서도 그를 사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행 13:2)

만약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식과 같이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이 되었다면, 그가 회개한 이후에는 바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울은 회개한 후에도 여전히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사울이라는 이름과 바울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였으므로 이런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이 나오다가 사도행전 후반부에 가서는 바울이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는 것을 보고 무엇이건 연결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울에서 바울로의 변화”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게다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울이라는 이름은 회개하기 전의 부정적인 뜻을 가진 이름이고, 바울이라는 이름은 회개한 후의 좋은 이름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모양입니다.

2. 바울은 세계 선교를 위한 이름

그러나 실상은 사울에게 바울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으며(빌 3:5), 동시에 로마 사람이었기에(행 16:37), 사울이라는 히브리 이름과 바울이라는 로마 이름을 둘 다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9을 보면, 사울이 “바울이라고도”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 13:9)
Then Saul, (who also is called Paul,) filled with the Holy Ghost, set his eyes on him.

“사울은 바울이라고도 한다.” 라는 표현은 그가 회개하고 나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부터 그는 두 가지 이름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사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바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는 뜻입니다. 즉 사울의 또 다른 이름이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평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로마 시민권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자기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여기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울에게는 바울이라는 로마 이름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사도행전 후반부로 가면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내세우며 바울이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성령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 선교 여행을 떠난 후부터입니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의 이름은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로 소개되었습니다(행 13:9). 그리고 사도행전 13:13에서는 사울이라는 이름 대신에 바울이라는 이름이 단독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울 일행을 핍박하고 대적하자, 그는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 사역에 나설 것을 선포합니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되어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너희에게 먼저 말할 필요가 있었으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너희 자신을 영존하는 생명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판단하므로, 보라, 우리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그가 이방인 선교사가 되어 활동하는 데는 사울이라는 히브리 이름보다는 바울이라는 로마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더 편리했을 겁니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목사님들이나 선교사님들 중에도 한국 이름 외에 영어식 이름을 하나씩 더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목사님이 회개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그 후에도 사울이라는 이름이 몇 번 나오긴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총독 앞에서 자기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간증할 때 과거를 회상하면서 사용한 표현입니다(행 22:7,13, 행 26:14).

그러므로 사울이 회개하여 바울이 된 것이 아니라, 본래 그는 사울이라는 이름과 바울이라는 이름을 둘 다 갖고 있었는데,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3. 사울과 바울 이름의 뜻은 큰자와 작은자?

다음으로, 과연 “사울은 큰 자, 바울은 작은 자” 라는 뜻일까요? 그래서 큰 자, 교만한 자가 회개하고 낮은 자, 작은 자가 되었을까요? 이것 역시 근거없는 주장입니다.

바울(파울로스)이라는 이름에는 ‘파울루스'(작은 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사울은 ‘큰 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 이름인 사울은 “묻다, 요청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솨알에서 파생된 ‘샤울’에서 나온 것으로 “요구하는, 구걸하는, 걸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부모가 주께 묻고 간구해서 얻은 아들이라고 하여 사울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따라서 “스스로 큰 자라고 하는 교만한 사울이 회개한 후에 사람이 변하여 겸손하고 작은 자 바울이 되었다”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by코이네 자료실 (http://koinedata.tistory.com)

권리포기, 모세에게 네 발의 신을 벗으라 하신 하나님

 출 3: 1-5 , 권리포기
권세보 목사 설교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능력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때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이라는 거죠. 그래서 악한 사탄 마귀는 종종 우리에게 <권리>를 주장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약4:7에는, “사탄마귀를 대적하라 그가 능히 너를 피하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의 삶과 선교의 역사에서, 권리 포기는 하나님의 역사를 여는 문이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풍습에는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노예라는 표시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신발을 벗으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었인지 금방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도 신발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5:15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때에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이 쓰신 위대한 사람들은 사실 이렇게 신발을 벗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류살렘을 떠날 때 그는 신발을 벗었습니다. 이때 신발을 벗었던 그 경험이 하나님앞에서 그를 영적으로 더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에 의하면 그 모든 사람들 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그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권리를 포기하셨습니까? 인간이 되기 위해 하늘의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출생할 수 있는 권리도 포기했습니다. 육신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공생애를 위해 홀어머니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의 보금자리를 가질 권리도 포기했습니다. 돈에 대한 권리도 포기했고, 명예도 포기하고, 사생아, 갈릴리 사람이라 불리웠고, 종교지도자들은 그분에게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분의 생명도 포기했습니다. 그분은 그 많은 권리에 대한 포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어떤 것을 포기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다른 교회에서 목회할 때, 한 자매를 기억합니다.그분은 30이 넘도록 결혼을 못해서 안절부절 했고, 급기야는 그로인해 영적인 침체와 함께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때 그녀는 고전 7장에서 바울이 독신으로 지낸 것이 하나님의 은사였다고 배웠고, 바로, 결혼에 대한 그의 권리를 하나님의 제단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때 그분은 그 분안에서 놀라운 자유함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하나님께 포기하기를 거부합니다. 많은 경우 혼기가 찼을 때 결혼 상대자를 찾느라 마음에 쉼을 얻지 못하고, 내적 평안도 갖지 못하고, 초조하기까지 합니다. 만약에 결혼에 대한 권리를 한번도 하나님께 드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나중에 결혼을 해서 심각한 문제나 갈등에 직면했을 때, 문제나 갈등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사탄의 참소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너의 배우자를 주실 때 까지 기다리지 않았어. 너는 잘못 된 사람과 결혼했을지도 몰라.”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혼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결혼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앞에 포기하고 나서 얻은 배우자라면, 삶가운데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칠지라도, 그의 결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죠. 거기에 평안과 자유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혼에 있어서 권리를 포기했을 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사렙다 과부가 음식을 포기했고, 오병이어의 기적 이전에 작은 아이가 자기의 점심을 포기했습니다.28세의 나이로 1964년 콩고 내란때 살해되었던 빌 맥체스니라는 미국인 선교사의 시가 있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파송받던 날 낭독했던 시는 그의 시신이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한번 낭독되었습니다.

나의 선택

 아침 여덟시, 나는 햄과 계란으로 마련된
아침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한시가 되면 잘 구운 스테이크로 점심을
그리고 일과가 마친후 샹드리에 아래서 저녁을 들고 싶습니다.

방마다엔 전화가 있고
부드러운 카펫 이 깔려 있는 마루와
예쁜 커튼으로 꾸며진 문이 있는
그런 현대적인 집을 갖 고 싶습니다.

사랑스런 것들로 잘 정돈된 아늑한 방
스프링이 들어 있는 푹신한 안락의자
그리고 예쁜 텔레비전 한대를 갖고 싶습니다

 나는 또
최신 유행의 조끼, 정장이 가득찬
깔끔하고 멋진 최고급 옷장을 갖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크리스쳔은 이런 최고급을 가질수 없나요?

그러나 그때 나는 기억합니다.
한 조각의 음식도 없이 주님은 40주야를 홀로 금식하셨습니다.
멸시당하고 거절당하신채, 그분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겨질 때 까지 그분은 그 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슬픔과 번민을 겪었고,
안식을 줄 육신의 친구도 그에겐 없었습니다.
마지막엔 하나님께 까지 버림을 당한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지새운 그 수많은 밤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가신 그 길을 따라 가고자 합니다.

나의 이 선택은 내가 가지고 싶었던 이 많은 것들에 대한
포기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내란이 일어났을때 도망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영적인 가족들과 함께 있기를 선택했을 때, 그는 또한 그것이 그의 생명의 포기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2차대전중에 수백만의 유태인들과 그리스도인이 히틀러의 감옥과 수용서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그때 작은 어느 수용소에 앙리코라고 하는 소장이 있었고, 수용된 사람중에 코리텐 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코리텐 붐은 미국으로 건너와 살게 되었는데, 그녀가 살고있는 그동네에, 그 앙리코가 신분을 속이고 도망와서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코리텐 붐은 그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식사를 하다가 코리텐 붐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그 소장은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죠. 그때 코리텐 붐은 자신이 그 수용소에 있었었다고 말했고, 그녀의 언니가 거기서 죽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소장은 얼굴이 창백해 졌습니다. 코리텐 붐은 계속 말했습니다. 전쟁은 끝났고 지금은 평화의 시대입니다. 저는 오직 당신과 식사를 하기 위해 당신을 초대한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조금후 그 소장은 포크와 나이프를 던지며 “당신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코리텐 붐은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앙리코에게 복수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포기했습니다.그녀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떻게 용서했는지에 대해 이야기 했고 식사가 끝났을 때, 그 소장은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그의 삶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은 마5:5 산상 설교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온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종류의 단어를 싫어합니다. 도리어 터프하다느니 강하다느니 하는 말을 좋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문화에서 온유를 연약함으로 종종 의미 되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연약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이스라엘 지형과 기후상, 그분은 용광로 같은 뜨거운 바람도 쐬어 보셨고, 울퉁불퉁한 거친 바위투성이 산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다면,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도 대부분이 어부 출신의 노동자 계급에 속하였다면, 그들은 결코 유약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온유함은 연약함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복종할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의 강한 성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뼈아픈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하십니다.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볼려고 시도했습니다.혈기를 부려 감독관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고, 그는 그 살인이 탄로날까봐 겁이나서 도망쳐야만 했고, 그길로 광야에서 거친 꿈을 묻고 양치기로 40년을 지냈습니다.그리고 나서, 지금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게 하십니다.하나님앞에서 그의 모든 권리에 대한 포기입니다.지금 이순간부터 모세는 없습니다.오직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만 나타나는 것입니다.차라리 훨씬 편합니다.

내가 권리를 주장할 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게 되는 것이고,
내가 권리를 포기할 때, 하나님은 나를 마음대로 사용할수 있습니다.그때 우리의 영적 생활이 얼마나 풍성해지는지 아십니까?

by권세보 목사 (Peter Kwon)

권세보목사세보(Peter Kwon)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현재 미국 빌행턴 한마음장로교회 담임목사입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삭개오에게 배워야 할 변화의 영성

알아 맞춰보세요.
사진 속 아래 3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목사3인
목사가 되어서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3인, 서세원, 이근안, 용팔이

‘목사’입니다.
이 3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아시죠?
코미디언 서세원, 고문 기술자 이근안 그리고 용팔이입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인생 뒤늦게 예수를 알게 되어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목사가 되었는데, 삶은 이전과 달라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 권력에 기대어 백성들을 착취하던 세리장 삭개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삶이 변화 되었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지난날 자신이 착취한 사람에게 4배로 갚겠다고
어제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변화했습니다.

특이하게도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제자의 길을 가겠다고 예수를 따라 나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나눔의 삶을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남의 것을 착취하던 불의한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고 각오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체험을 하면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목사는 되었는데, 마음의 욕심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직업은 바뀌었지만, 탐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직업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삶의 내용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사람이 변화합니다.
추구하던 가치가 변화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넘쳐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도 가득합니다.
그런데 변화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마음, 예수의 가치, 예수의 길을 따라 나서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며
내 배를 가득 채워줄 예수만을 원하고 있을뿐입니다.

탐욕과 거짓을 버리고, 낮아짐의 길을 간 예수를 따르는
버림의 영성, 변화의 영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by최병성 목사

최병성목사최병성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초록별생명평화연구소. 초록별생명평화교회의 머슴을 자처하고 있는, 환경운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