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교회 위해 10년 프로젝트 세운 남광교회

전남노회 남광교회(정영철 목사 시무)가 지난해 12월 화재로 사택을 잃은 순서노회 자립대상교회 성천교회(서승현 목사 시무)에 성금 1000만원을 전달하고 사랑 나눔에 앞장섰다.(사진 기독공보)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됨을 실천하기 위한 지역 교회들의 사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교회 창립 53주년을 맞이한 전남노회 남광교회(정영철 목사 시무)가 지난 2011년부터 교회의 사역 비전을 ‘선행’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한 선행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것.

남광교회는 이를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인재양성’과 ‘선교적 실천’을 조명했다. 지난 2년 동안은 사역을 위한 건강한 재정 마련에 힘을 모았다.

이후 사역의 발판을 마련한 교회는 향후 10년 동안 교회 표어를 ‘세상에 선을 행하는 교회’로 정하기로 최종 결의했다. 지역 섬김과 그리스도의 사랑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본격적인 시동을 건 셈이다.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는 ‘선행프로젝트를 위한 워크숍’도 개최했다. 선행 사역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검토하고, 전 교인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한편 교회는 기획된 인재양성 프로젝트를 통해 교회 내 대학생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고등학생의 비전트립을 지원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호남신학대학교, 기독간호대학, 수피아여자고등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한다는 구상을 마련했다.

또 구제 프로젝트 일환으로 지역 교역자 자녀 치료비 지원과 연말 불우이웃 연탄 배달, 교회 50주년 기념사업 가운데 하나인 50주년기념교회 건축도 조속히 완료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올해를 기점으로 2016년까지 교회 예산대비 50%를 구제, 교육 그리고 선교비로 확장, 책정하기로 결의했다.

프로젝트 일환으로 교회는 지난 3월 31일, 부활주일에 본보에 소개된 김성은 목사(곡성광암교회)의 자녀를 돕는 선행을 실천했다. 김성은 목사에게 치료비 1천만 원을 전달한 것.

남광교회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 위에 시대에 맞는 다양한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며, 대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이웃과 민족 그리고 지역 사회에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대 기독 청년들이 고난주간을 보내는 방법

크리스천 젊은이들의 데이트 사역 전문기관인 ‘크리스천데이트 문화선교회(대표 송유창 간사)’가 요즘 청년들이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는 지 설문 조사하여 그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은 현재 미혼 청년들로 구성된 회원들을 대상으로 ‘고난주간 특별 설문’을 발송, 청년 5,293명이 참여하였다.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그 결과 기독 청년들은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낼 계획인지(중복선택 가능)에 대해 절반이 넘는 50.7%가 ‘개인 경건 시간(말씀·기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이 외에 ‘새벽예배나 수요예배 등 공예배 참석에 더욱 힘쓰겠다’가 19.5%, ‘금식에 참여하겠다’가 13.1%를 차지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도 13.6%였다.

과거에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 경건 시간(말씀·기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애썼다’가 34.7%였고,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가 27.5%로 뒤를 이었다. ‘금식에 참여했다’와 ‘공예배 참석에 더욱 힘썼다’가 각각 18.2%와 18.1%였다. 선교회는 “청년들이 과거보다 올해 고난주간의 의미를 더욱 기억하고 경건생활에 힘쓰려는 의지를 가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고난주간’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에 대해선 ‘십자가’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남성 43%, 여성 54%), ‘예수님(남성 30%, 여성 23%)’, ‘고난(남성 8%, 여성 6%)’, ‘보혈(남성 6%, 여성 5%)’ 순이었다.

‘이번 고난주간에 가장 듣고 싶은 찬양’으로는 아발론(Avalon)의 ‘우리 때문에(We are the reason)’가 21.2%로 가장 많이 꼽혔으며, 마커스의 ‘그가 오신 이유’가 21%, 하스데반 선교사의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이 15%, 천관웅의 ‘겸손의 왕’이 13.8%, 하스데반의 ‘십자가 그 사랑’이 11.6%, 동방현주의 ‘사명’이 11.4%,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가 5.9% 순이었다.

찬양에 대해서는 남녀 청년들이 차이를 보였다. 남성들은 ‘그가 오신 이유’를 21.8%로 가장 많이 선택했고, ‘우리 때문에’ 18.1%,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16.9%, ‘겸손의 왕’ 15.7%, ‘사명’ 11.9% 등이었던 반면, 여성들은 ‘우리 때문에’가 26%로 압도적이었고 ‘그가 오신 이유’ 19.7%, ‘십자가 그 사랑’ 14.5%,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11.6% 순이었다.

선교회 대표 송유창 간사는 이번 설문 결과에 대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동참하기 위한 청년들의 경건생활에 대한 결심이 실천으로 잘 이어질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의 교역자와 리더들의 권면과 지도가 필요하다”며 “저희 선교회에서도 여러 청년 문화 사역기관과 협력해 청년들이 의미있는 고난주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10만여 명의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는 크리스천데이트 문화선교회는 지난 2012년 설립된 선교단체로,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에 소속돼 있다. 모바일 앱 기반의 소개 프로그램과 캠프 사역, 연애·결혼교육 세미나 등을 진행하고 있다.

(위 글은 크리스천투데이의 2016.3.22.자 보도 내용을 편집하였습니다. )

교회 분쟁의 원인은 교만과 자기자랑

고린도서신 가운데 1장의 일치에 관한  가르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부정부패와 물질 만능주의와 권위주의에 찌든 인간성에 대한  문제를 재삼 돌이켜 보는 좋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의 사이에 있는 한  항구도시로써 사회적 타락의 온상이 된 지역이라 사도 바울도 이 지역을 목회할 때 많은 우려를 해왔는데 결국 내부적인  불화와 반목으로 깨어져 가는  교회의 상황을 들었을 때, 이 서신을 통해 잘못된 습관과 교리를 바로잡고, 신앙의 윤리적 표준을 제시하려고 한 것입니다. 특히  분쟁이란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위험한 요소이기에 이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분쟁의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만과 자기 자랑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되는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교회가 맡긴 모든  직분에는 높고 낮은 것이 아니라 서로 존경하고,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러한 직분
을 다스리는 자로써  존경받는 것이며,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거룩한 부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만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자랑이란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앟는다고 했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이미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는  행동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허탄한 자랑은  악한 것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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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분열 속에서 자신의 권위만을 찾고 자랑하던 그들에게  일치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바로 여러 사람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의 근거요,  신앙의 근거이시며,  기도의 중보자가 되어주십니다.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믿는  자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곤경으로 인해 혼란의 소용돌이 가운데 빠져가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일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같은 언어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믿음의 언어, 소망의  언어, 그리고 사랑의  언어인 것입니다.  언어의 혼란에서 인류의  분산과 전쟁 그리고 공포로 몰아넣어 갔던 창세기의 이야기는 바로 언어의 통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된 우리들은 참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는   어떤 정치적, 물질적  지위나 권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참된 복음의 말씀으로 하나되는 것이며, 형식적 절차나 과정을 통해 주어지는 말의  지혜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모든 것을 드려 섬기는 삶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함께 손붙잡고 나아가는  성도의 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활절칼럼] 우리도 변화하리라

우리도 변화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하게 됩니다.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육신의 죽음후에는 영생이 있음을 알고 다시 살아날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부활은 기독교가 전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부활에 대한주님의 약속은 성경에서뿐 아니라 봄철에 돋아나는 모든 나무잎새에서도 볼수있다.(마틴루터)성경에서 말하는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 했습니다.

부활절 계란 모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초대교회는 탄생했으며 인류의 구속여명은 밝아왔습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지 못하셨더라면 성인이나 성자는 될수 있겠지만 인류의 구원자는 될수없었을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장사된지 사흘만에 새 창조의 능력으로 예수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부활을 맞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바로 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깨트리고 부활하시므로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은혜와 생명이 이 세상을 지배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지 하나의 신앙고백으로서만 끝나서는 안되며 날마다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해야 합니다.날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살아나야 합니다.(갈2:20)그러면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영생과 부활이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어야 합니다.(요일5:4)그리스도는 확실히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고 죽으셨습니다.사형을 집행한 백부장이 이를 확인했습니다.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드시 부활이 있음을 믿고 부활의 소망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노아의 저주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인가?

Question

이런거 물어봐도 되나 모르겠는데..총신에서 시험을 봤는데 노아의 저주를 받은 사람묻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답을 가나안이라고 하려다가, 결국 아들이 저주를 받은 것은 아버지인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함을 답벼으로 선택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나안이란 표기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함의 자손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요(주석을 보니까 칼빈도 이렇게 해석한 거 같은데….). 왜 이런 문제를 냈는지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네요…

Answer

1. (창 9:25)은 구약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 구절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아의 수치를 드러낸 사람은 함인데, 왜 노아가 함이 아닌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하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상 함에게 있어서 자기로 인해 아들이 저주받은 것은 자신이 저주 받은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이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아들에게 그것을 넘겨주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아비의 하체를 조롱한 함의 범죄가 그의 아들 가나안의 저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견해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함이 받을 형벌을 더 가혹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함의 자손(이 경우 가나안은 함의 후손의 대표로 제시됨)을 저주했다(Calvin, Lange). 이 경우에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함과 그 가족 모두가 저주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노아는 예언의 은사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먼 장래를 보면서 장차 가나안족이 함을 인해 징계받을 것을 미리 보고 예언을 했다(Theodoret, Willet).

 3) 노아의 막내 아들 함이 범한 죄의 전통은, 함의 막내 아들 가나안으로 전수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가 이를 알고 가나안을 저주했다(Hoffman, Delitzsch)

 4) 실제로 죄를 범한 사람은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었다. 노아의 수치를 처음 목격한 사람은 가나안이었으며, 그가 이를 보고 그 사실을 아비인 함에게 알렸고, 함이 이를 확인하고 노아를 조롱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러한 점에서 함과 가나안은 범죄의 공범자였다(Aben Ezra, Poole, Jamieson).

 5) 당시에 가나안도 이미 그의 아버지의 불경건함과 죄악을 답습하고 있었다(Ambrose, Keil).

3. 이러한 몇 가지 견해들을 참고하시면 (창 9:25)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함에게 있어서 그의 미래는 아들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함이 가나안과 함께 복합적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함과 가나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이 문제를 내신 분은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은 알지만, 정작 저주가 선포된 것은 그의 아들 가나안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 문제를 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약간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4. 여기에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창세기 기자가 가나안의 저주 사건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가에 하는 점입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에, 그 독자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서 정착해야 될 땅이 가나안, 즉 팔레스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가나안 정복이 노아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에 살고 있던 족속들은 가나안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노아의 예언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합법적임을 말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이 저주는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 시대에 셈족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정복 당했고(수 9:23), 나머지는 솔로몬 시대에 완전히 정복을 당했습니다(왕상 9:20,21). 그리고 그 후에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 즉 카르타고인나 애굽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페르시아인, 마게도니아인(헬라), 로마인 등과 같은 야벳 족속들에게 계속해서 정복을 당했습니다.

(이글은 매일성경연구원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www.biblenara.org/q&a/Q646.htm)

시한부종말론의 원인제공자 세대주의란 무엇인가?

세대주의란 무엇인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시한부종말론은 대부분 세대주의라는 신학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대주의 자체는 이단이 아니지만 이단들이 오용할 수 있는 원인제공이 되고 있습니다. 세대주의란 무엇일까요?

세대주의의 연혁

  1. 세대주의는 19세기 말경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사람 달비(Darby)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그는 집사요 변호사로 무능한 기성교회에 대하여 반발의식이 생겨서 일본의 무교회주의와 비슷한 운동을 전개 했습니다. 달비는 그 운동본부를 영국 폴리머드에다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에 명칭을 달비파, 폴리머드 형제단이라고 했습니다.

  1. 세대주의 운동은 19세기말-20세기초 미국에서 전성을 이루었습니다.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지못했던 스코필드목사가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만들어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재는 무디신학교와 달라스 신학교가 중심이되어 있습니다. 세대주의는 19세시말-20세기초 보수주의가 자유주의와 대결을 하고 있었을때 보수주의(칼빈주의, 개혁주의)에 가세했기 때문에 한때 혼동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1. 우리 한국에는 초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들어왔으며 지금은 각교단에에 스며있는데 특히 보수주의 교회들 속에 많이 있습니다.

왜 세대주의라고 하는가?

세대주의는 성경예언에 대해 특히 종말론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하는 신학파로 변쇄적 전천년 학파라고 하는데 세대주의라 이름하는 것은 성경의 사건을 세대로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세대주의가 신봉하는 스코필드관주(사설성경)에는 역사적 사건들을 어느 시대에 되었다는 관주를 붙였습니다.

세대주의 역사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7,000년과7세대로 경륜하셨다는 것, 7,000년은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아브라함 부터 예수 탄생까지 2,000년, 예수탄생으로 부터 예수 재림까지 2,000년 합 6,000년에다가 지상 1,000년 왕국까지 합하여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4,000+신약 2,000년+1,000년 왕국 = 7,000년)또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를 7세대로 구분하셨는데 그 세대마다 특이한 시험과 심판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무죄시대로서 범죄전 아담시대로 무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양심의 시대로 아담의 범죄후 노아 홍수 시대로 양심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인간통치 정부의 시대로 노아홍수 이후부터 아브라함까지라는 것입니다.

이때는 정부의 세력으로 한번더 구원의 기회를 주셨으나 바벨탑 사건으로 실패했다고 합니다.

네번째는 약속의 시대로서 아브라함부터 모세까지로 약속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섯번째는 율법의 시대로 모세부터 그리스도까지로 율법으로 구원을 알는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은혜시대(교회시대)는 은혜(복음)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일곱번째는 1,000년 지상왕국시대로서 왕국 통치를 통해 구원 얻는다는 것 입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7,000년과 7세대로 경륜하셨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신학적 가설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성경적인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역사를 7,000년 이라고 말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요?

첫째는 천지창조(안식식일까지 포함) 7일입니다. (창1:)

이들의 의하면 예언의 하루는 1,000년이라는 것입니다. (벧후 3:8) 7일이니 7,000년이며 7세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 입니다. 왜냐하면 겔 4:6에 일일이 일년이니라 고 했으니 7일이면 7년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두번째는 성경에 나오는 연대에 의한 년대 특정입니다.

성경은 족보가 많이 나옵니다. (창5:, 10:, 25:, 36: 대상1:-8: 마1: 눅3:)그중 가장 오랜 역사는 6,984년이고 가장 짧은 것은 3,483년이 된다고 합니다. 맛소라 사본은 BC 4004년을 아담창조로 70인경과 사마리아 5경은 BC 5411년, 영국 라이트 푸트는 BC 4004년 10월 18일에 창조가 시작되었으며 10월 23일 금요일 오전 10시에 아담이 창조되었다고 하며 영국 어설 감독(1581-1651)은 BC 4004년이라고 했고 미국 사람 스코 필드도 어설의 주장대로 BC 4004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후 카톨릭 내의 개혁세력인 쥬이스트도 BC 4004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온 족보를 가지고 인류연대를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족보에 열거된 사람들 중에는 단축된 것이 많고 히브리어 숫자는 이해하는데 난관이 있으며 창10장 족보는 개인보다 국가 민족 발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로 부터 여러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 1:5,20,31,32) 인도의 역사는 BC 6204년, 아라비아는 BC 6174년 바벨론 BC 6158년 중국은 BC 5507년 등입니다. 근년에 발굴된 여리고 성은 9000년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다만 보수주의 학자들은 1만-2만년으로 보며 노아 홍수를 지금 부터 1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경륜을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속죄뿐이었습니다. (창 3:15엡 1:4-5)

그러므로 세대주의 7,000년과 7세대는 허구요 신학적 가설로 믿을 수 없는것이며 이런 허구와 가솔위에선 주후 2,000년대 재림설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대주의 사상이 기성교회, 그리고 이단들(여호와 증인, 안식교, 시한부 정말론, 각종이단들)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세대주의 중요 신학 사상들

  1. 성경관

세대주의 성경은 구약신약으로 구분하고 구약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고 신약은 신약교회에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십계명은 이스랑엘이 지킬 규범이요 신약교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통일성과 유기성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잘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릇된 표준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그들은 세대주의 스크필드관주 성경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다는 신앙고백 1장9조에 모순됩니다. 두번째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성경을 유대민족주의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나라(천국)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를 엄히 구별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일반적 세계의 나라요, 하늘나라는 유대인을 위한 다윗왕국이 회복된 나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하늘날(천국) 곧 다윗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거절로 실패하여 연기되었는데 그 연기된 천국이 주님의 지상 재림후 지상 1,000왕국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인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날(신국)과 하늘나라(천국)는 이명동의이며 주님의 유대왕국 건설(다윗왕조 회복)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대요리문답 45.91 소요리문답 102)

   3. 구원관

각 세대마다 구원받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7 세대로 구분하여 세대바다 구원방법이 다르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 구원받고 신약시대에는 은혜9복음)로 구원 받는 다는 것은 성경의 은혜의 교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 7장 3절 5절 25장 2절)성경의 은혜의 교리는 아담부터 세상종말까지 예수 십자가 은혜로 (복음)만 구원얻는 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교회관

세대주의는 신약교회가 유대인의 사고(예수를 죽인일)로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신약교회를 세울 마음이 없었는데 유대임의 실패때문에 임시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의 교회를 구약시대와 천년왕국 시대사이의 괄호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들은 이스리엘과 교회를 양분합니다. 교회를 필요없는 방해물로 봅니다. 그리히여 교회조직(성직)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를 약화 시키는 잘못입니다. 주님의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오셨고 (마 16:18-20) 교회가 바로 주님의 몸이시며 (고전 12:27)엡 1:23, 4:12, 골 1:18) 이스라엘은 신약교회의 예표로 그림자입니다. 아담부터 주님의 재림까지 교회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신앙고백 25장 2절 대요리문답 62,64)

    5.지상 천년왕국관

주님의 재림후 지상에서 현재의 인류가 역사가 계속되는 천년왕국이 있느냐 하는 문제로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없다는 설은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이 있습니다. 무천년설은 아예없다는 것이요 후천년설은 주님의 재림전 세상이 좋아진다는 것으로 실상은 문자적으로 천년설은 믿지 않습니다. 있다는 설은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변쇄적 전천년설)이 있는데 양자는 주의 재림 후 지상에서 천년왕국이 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천년 왕국의 내용에 대해서는 가가기 다릅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전세계적인 것이요 세대주의는 유대인 중심으로 BC 586년에 다윗왕국인 유대가 바벨론에게 멸망되었는데 그 왕국이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되고 이스라엘이 전세계를 지배하며 예루살렝이 솔로몬의 성전이 재건되고 피의 제사가 복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20장에 나온 천년은 상징적인 숫자이며 사도신경은 1,000년 왕국에 대하여 언급이 없으니 근본적으로 무천년이요 장로교회의 모든 교리도 근본적으로 무천년이며 어거스틴과 칼빈도 무천년입니다. 지상 1,000년왕국이 있다고 할 때 여러가지 난제가 발생됩니다.

  1. 종말론

세대주의 종말론은 너무 복잡합니다. 그래서 번쇄주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성도의 부활과 공중휴거, 7년 혼인잔치 7년 대환란, 적 그리스도 츨현,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생존민족들의 심판, 대환란기의 죽은 성도의 부활, 적 그리스도의 멸망, 사탄의 잠시 석방, 곡과 마곡의 전쟁, 악인의 부활, 대심판, 신천신지,등 순서가 너무 복잡합니다

세대주의의 장단점

1) 장점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 열심히 전도하는 것 재림 사상의 철저, 교리를 강조하는 것등입니다.

2) 단점은 지나친 타계주의와 현실참여 회피 문화과업 등한시 잘못된 교회관 때문에 분열조장, 계명 수행 나태, 일제시대 신사 참배를 하게 하게된 동기도 되었습니다. 사회정의에 대해 등한합니다.

이제우리는 세대주의는 성경적인 개혁주의가 아니며 특별히 종말론은 전통적인 기독교 종말론이 아닙을 알아야 합니다. 2,000년대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재림론은 큰 과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대주의 2,000년대 주의 재림을 기초로 삼은 시한부 종말론은 아주 잘못된 이단입니다.

[마22장 혼인잔치비유] 길가는 사람 불러 놓고 예복 타령이라니

민영진목사(대한성서공회총무)

마태복음 22장 1∼1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천국을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시면서 말씀하신 “왕실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온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이미 초청한 몇몇 귀한 손님들을 오라고 했더니, 초청 받은 이들이 모두 오기를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임금은 다른 종들을 또 보내어 혼인잔치에서 대접할 풍성한 식단까지 소개해 가면서 다시 초청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밭일이 바쁘다고 밭으로 가고, 또 한 사람은 상업차 길을 떠나고, 나머지 초대받았던 나머지 손님들은 임금의 종을 능욕하고 죽였다. 그러자 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랐다. 그러면서 임금은, 잔치 준비는 끝났음을 알리고, 이미 초청받은 이들은 이 잔치에 합당한 사람들이 아님을 확인하고,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22:9) 오게 하였다. 그래서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하였다”(22:10).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왔다.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초대받고 들어왔던 그 사람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곳”에 던지라고 한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봉변 당한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통탄(痛嘆)할 일이다. 거리에 있는 사람 억지로 불러다가 혼인 잔치에 앉게 해서 앉은 것뿐인데, 혼인 잔치에 걸맞은 예복(禮服)을 입지 않았다고 손을 묶는 것으로도 모자라 발까지 결박하여 땅 속 어두운 곳에 가두다니! 정말, 당한 사람으로서는 이를 갈 일이다. 미리 초청을 받았다면 예복을 준비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거리에서 돌아다닐 때 입던 옷 그대로 초청 받아 왔는데, 무슨 예복이란 말인가! 또 다른 손님들도 다 마찬가지로 혼인 잔치에 갈 생각도 못하고 거리로 나왔다가 여기 잔치 자리에 온 이들인데, 도대체 그들은 또 언제 어떻게 예복을 준비하여 입고 왔단 말인가?

언젠가 어느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 서울의 어느 “클럽 하우스”라는 데를 가본 일이 있다. 때는 여름이어서 넥타이를 매지 않는 정장 윗도리를 입고 갔다. 그런데,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식당 종업원이 나의 길을 막는다.
“손님, 죄송합니다. 여기 식당에는 정장을 하셔야만 출입이 됩니다. 초청하신 분께서 이미 말씀하셨을 줄 압니다.”
“네,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 식대로 정장을 하고 왔습니다.”
“넥타이를 매셔야 합니다.”
“이것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 옷인데요.”
“그래도 매셔야 합니다. 여기 규정이 그러합니다. 손님 같은 분을 위해 우리가 넥타이를 준비했습니다.”
종업원이 여러 개의 검은 색 계통의 넥타이를 벌써 어디선가 가지고 왔다. 나는 더 완강하게 버틸 처지도 아니고 해서, 약간은 바보 같은 느낌이 들어도 바보들의 축제에 온 기분으로 노타이셔츠 차림에 목 둘레 맨살에다가 검은 타이를 매고 들어갔다. 나는 우리 일행이 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나의 기괴한 패션에 놀랐다. 나는, “예복을 안 입고 오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날까봐 이렇게 넥타이를 매고 왔습니다” 하고 말했고, 초대받은 손님들은 모두들 나의 바보 같은 옷차림을 보고 한바탕 웃었다. 나는 좌중(座中)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로 이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왕실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도, 거기 뜻밖에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길 가던 사람들이 어느 사이에 예복을 준비하여 그것을 입고 예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혹시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예복을 여기에서 주는 이런 넥타이 같은 어떤 것을 주지 않았을까요? 임금에게 혼난 이 사람은 종업원들이 그런 예복을 입으라고 주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그냥 들어왔다가 임금에게 죄인 취급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고요…”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다. 주석들을 보니, 모두 나처럼 추측을 하고 있다. 혼인잔치를 차려놓고 손님을 초대한 주인은 손님들이 위에 예복으로 걸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그것을 걸치고서야 예식장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하는 풍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리 초대받고 온 이들이 아니고 평상시에 거리에 있던 이들을 초대했을 경우에는 더더욱 주인이 이런 예복을 준비했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예복을 준비했는데도 그것 입기를 거절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초청자인 주인을 모독한 것일 것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유대교에서 특별히 거룩하게 여기는 곳에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들어갈 수가 없다. 거기에 들어 갈 이들을 위한 긴치마와 어깨와 팔을 가릴 웃옷을 입구에 준비해 놓고 그것을 입고서야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곳이 있다.
초대장은 이미 오래 전에 나갔다. 예언자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켜 장차 올 구원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잔치가 벌어졌을 때 초대받은 이들은 초대에 응하기를 거절했다. 기껏 거리에서 초대받은 이들 중에도 예복 입기를 거절해서 쫓겨난 이들도 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그 초대에 걸맞은 삶을 산다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힘드는 것일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도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 글은 대한성서공회 홈피에 있는 민영진 목사님의 글을 옮겨왔습니다.

종말은 심판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역사적 귀결점

종말과 묵시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어려운 점은 학생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교정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종말”이다. 대개 우리는 종말을 멸망과 파괴로 생각하고, 구원이란 그것을 피해서 살아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말은 우리가 타락했으니까, 하나님이 진노를 쏟아 부으시는 것, 예를 들면 밥상 앞에서 손자들이 까불고 아들 부부는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그러니까, 참다 못해 밥상을 둘러 엎으시는 화난 할아버지의 얼굴, 그게 종말의 이미지이다. 그러면, 할아버지의 분노를 촉발하지 않게 조용 조용히 밥 먹는게 신앙생활이 된다!

성경의 역사관은 종말을 완성으로 본다. 죄로 인해 깨어지고 타락한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이며, 언젠가는 그 역사가 절정에 도달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 성경적 종말론의 요체이다. “하나님의 승리”라는 역사적 관점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종말적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묵시”는 무엇인가? 이 종말이 지금의 세상과는 아주 다른, 현세와는 단절된 모습으로 올 것이라는 생각이 묵시적 사고이다. 묵시 문헌은 종말에 관한 진리를 담기 위한 문학적 도구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종말이 상위 개념이고, 묵시는 하위 개념이다. 묵시에서 파괴로서의 종말, 이 세상과의 단절로서의 종말이 강조되는데, 파괴로서의 종말은 상위 개념인 완성으로서의 종말 아래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단절을 완성보다 더 강조하는 사고는 이 땅에서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현실도피적 신학이 될 수 밖에 없다.

종말은 심판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의 귀결점이다. 심판은 이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그 역사는 이미 이 세상 속에서 시작되어 싹이 나서 자라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은 그 사랑의 역사의 일부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이제 곧 무너질 집을 새단장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동참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증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w박영호목사by박영호 목사

박영호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현재 한일장신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밤나무는 참 공평하게 몫을 나눈다

“툭툭,”
밤 떨어지는 소리다.

사방 팔방에서 들려온다.
그 소리가 경쾌하기 이를데 없다.

밤송이, 사진= 고병호 목사
밤송이,  사진=고병호 목사

밤 나무는 참 정확하게 몫을 나눠준다.
벌레를 위한 몫, 청솔모를 위한
몫이 있다.

물론 사람을 위한 몫도 있다.
올밤, 늦밤이 있듯, 오늘 산행하는 사람을
위한 몫과 내일 산에 오를 사람을
위한 몫을 나눈다.

방금 그 자리를 지나는 이를 위한 몫이
있는가 하면, 방금 후에 올 이와
방금 전에 지나간 이를 위한
몫도 생각한다.

밤나무가 한 날 한 시에 일제히 그 열매를
내 놓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ㅋㅋ

밤나무를 향해 돌과 나무조각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 발로 툭툭, 차는
사람도 있다.

에잇, 그럴 필요없는데…ㅋ

참,
밤은 작은 것일수록 맛나더라…ㅎㅎ

by고병호 목사

고병호목사님은 발안반석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에라이 배추만도 못한 놈

배추키우며 깨닫게 된 믿음의 원리

몇 년전 김장배추값이 2천원이 훌쩍 넘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부터 도움이 될까하여 텃밭에 배추를 심었습니다. 지금은 은퇴이후 걱정하지 않을정도로 잘 키워냅니다. 비료나 농약을 최소한으로주고 이엠주며 막걸리 치고 길러냅니다.

배추는 아주 어릴적에 벌레를 잘 잡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어르신들중에는 하얀가루로 알고 있는 디디티 가루약을 치며 길러내지만 맹독성이라 몸에는 않좋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는 어릴적에 대가리에도 치고 자라도 잘 자랐는데 하실분 계실줄 압니다.
머리에 이가 생기면 이 잡는다고 농약성분이 가득한 디디티가루를 머리에 바르곤 했지요.

약200포기되는 배추에 벌레를 잡겠다고 매일같이 나가 한 두시간 잡고나면 남이 안시킨짓 하면서 뭔 고생이고 하면서도 김장할 때 도움이되고 이웃간에 나누며 풍성하게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배추속에 아주 여리고 어린 순이 자라는데 그 순에 벌레가 일어 또아리를 틀고 앉아 갉아먹습니다. 초반기에 벌레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냥 주저않게됩니다. 그래서 벌레를 잡다보니 깨달음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에도 사탄이 뿌려놓은 죄악의 씨앗들이 자라면서 영의 깊은곳에서 근본적으로 갉아먹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벌레들이 자리잡은 잎사귀에는 표시가 납니다. 뭔가 시들해보이기도 하고, 잎이 안으로 파고들며 오글오글해집니다. 나 아파요 하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주인이 조심스레 그 잎사귀를 들춰보면 벌레가 들어있습니다. 미처 잡지 못한 벌레들이 자라 거의 번데기 수준까지 자란것도 있는데 그것을 잡아내면 홈런친 야구선수인양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배추가 자라는 과정을 보며 배추들은 하루차이만 나도 크기가 눈에 띄게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초가을 햇살에 하루차이만 나도 크기가 다른배추들을 보면서 나이 한두살 더 먹은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어야 하겠다는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타지에 나와서 사귀는 사람들은 몇 년은 그냥 친구삼아 지내기도 하는데 하면서도 배추도 예를 아는데 사람이 예의를 모르면 안되지 하는 깨달음을 한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예의가 가장 없는 부류가 목회자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안수만 받으면 지나내나 같은 목사라는 생각에 그냥 대충 넘어가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저는 ‘에라이~ 배추만도 못한놈’ 하면서 생각을 합니다.


장로님들 세계나 권사님들도 비슷하지 않는가 봅니다. 교회에서 중직자로 임직을 받으면 그날부터 선배도 없고 어른도 없이 지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때 ‘에라~ 배추만도 못한놈’ 하며 생각을 하시고 웃으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 생각은 배추는 먼저 자란 겉잎이 속에 있는 여린잎들을 감싸안아주며 보호하며 자라는것입니다. 맨가에 있는 겉잎사귀들은 속살 배추들을 보호하다가 나중에는 시들해지며 뽑을 때는 주인이 인정사정없이 뜯어내 버려도 항의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중직자들이 바로 겉잎과 같은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자기는 나중에 신앙생활을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헌신하다가 이름없이 빛도 없이 사명감당하다가 때가되면 사그러 들지라도 감사하며 나를 통해 우리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고 하나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족하다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겉잎사귀가 자기만 자라겠다고 자리를 잡은 배추들은 속이 꽉차지 못하고 병이듭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 감사하면서 자기사명 잘 감당하는 배추에게서 영적인 깨달음을 배우게됩니다.

by 김성칠 목사(칠포교회)

김성칠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경북 칠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