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

“말이냐 칼이냐,”
얼마 전 모조간에서 읽은 글 제목이다.
작금 정치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말”의 부작용을 언급하고 있다.
말이 사람을 상하게 만드는 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였다.

정치(political)의 기본은 “타협(compromise)”이다.
기실, 정치적 견해가 저마다 다르기에 타협을 통해 저마다 생존(survival)하는 것이지 않는가!
그러기에 ‘말을 칼처럼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런데 “강단講壇”에서는 말씀이 말이 되면 안 된다.
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생존을 위한 어떤 정치적 타협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4:12)”

우리의 죄성罪性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속성”은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칼 같은 말이 사람을 상하게 한다. 죽이기까지 한다.
정치판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는 이 논리가 맞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에서는 아니다.
이곳에서는 오직 예리한 칼같은 말씀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5)”

“주님, 용서하소서.”

by 고병호 목사 (발안반석교회)

영화 서서평,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교회에서든 성공이라는 단어는 맹위를 떨친다.

그 맹위에 짓눌러서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런데 과연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 진짜 성공인가를 묻는 이들은 드물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 역사는
‘서서평’이라는 영화로 한 인물을 소환한다.

그 인물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이다.
1880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던 그녀는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을 공부했다.
1912년 3월 간호 선교사로서 처음 조선 땅을 밟았으며 주로 전라도 일대에서
한센인들과 걸인,고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한국 선교에 여러 족적을 남기고
그녀는 1934년 빈손으로 세상으로 떠났으며
자신의 장기마저도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이렇게 산 이가 늘 침대 머리맡에 붙여 놓은 글귀가 바로 “Not Success But Service”였다.

하나님께서는 한 인생의 성공여부를
평가하기 위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 “섬김”을 소환하실 것이다.

 

by 김명우목사(주안장로교회)

김명우 목사는 고신대학교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현재 주안장로교회 부목사로 시무중입니다.

명성교회의 변칙세습에 대한 기윤실의 성명서

명성교회가 김하나 목사 청빙 시도를 중단하기를 기도하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성명서를 공유한다.

명성교회는 김하나 목사 청빙 시도를 중단하라

“아니라 아니라 하라” (마태복음 5:37)

명성교회(김삼환 원로목사)는 3월 11일(토) 당회를 열고 새노래명성교회(김하나 담임목사)와 합병을 결의했습니다. 이어 오는 19일(일), 공동의회를 열어 두 교회의 합병안과 김하나 목사 위임 청빙안을 다룬다고 합니다. 이 두 교회의 합병은 김삼환 김하나 목사가 부자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때 2013년 9월 제98회 총회에서 제정된 세습금지법의 허점을 이용한 변칙세습이라는 강한 의혹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혈연에 의한 담임목사직 대물림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죄악이며, 한국 교회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성교회가 소속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2013년 9월, 제98회 총회에서 세습금지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그 뜻에 따라 김삼환 목사는 교회에 김하나 목사를 후임 후보군에서 제외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김하나 목사도 공식석상에서 총회 결의를 따를 것이며 “변칙과 술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삼환목사와 아들 김하나 목사 (사진은 매일종교신문에서 가져왔습니다.)

명성교회 당회와 일부 성도들은 교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해가기 위해 원로목사의 아들 목사를 다음 담임목사로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로목사의 아들 목사가 아니더라도 교회를 이끌어갈 좋은 담임목사를 보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무리한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김삼환 목사는 현재 해외 출장 중이고 공동의회가 끝난 뒤에야 귀국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성교회를 개척한 상징적 지도자로서 출장을 이유로 이 일을 방관하지 말고, 명성교회 당회와 성도들이 두 교회의 합병과 김하나 목사를 청빙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도록 막아야 할 것입니다.

김하나 목사 입장에서는 그 동안 천명해왔던 것처럼 명성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선언을 해야 합니다. 설령 명성교회와 새노래명성교회 당회와 일부 성도들이 원한다고 해도 사양해야 마땅합니다. 혹여 세습하지 않겠고 변칙과 술수도 없을 것이란 지난 약속을 뒤집는다면 세습과 관련한 모든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명성교회 당회와 새노래명성교회는 변칙세습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합병시도를 중단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것임을 몸소 증명하기를 바라며 아래와 같이 요청 드립니다.

첫째, 명성교회 당회와 일부 성도들은 혈연에 의한 담임목사직 대물림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압도적으로 큰 것을 인식하고 김하나 목사를 청빙하려는 시도를 멈추길 바랍니다.

둘째, 김삼환‧김하나 목사는 명성교회를 세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명성교회 교인들이 김하나 목사를 청빙하려는 시도를 멈추도록 설득해주길 바랍니다.

셋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세습금지법의 입법취지를 폭넓게 적용하여 명성교회가 한국 교회와 사회에 지도력 교체에 모범이 될 수 있도록 권고하고 필요한 조치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2017년 3월 14일(화)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

능력을 구하지 말고 은혜를 구하라

교주가 되려는 목사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현실적으로 진짜 필요한 것은 “능력”이었다.

박해하는 이들이 그들을 짐승의 먹이로 던지면 그 짐승들을 찢어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려면 그 불길을 뚫고 나오고, 창칼로 죽이려고 달려들면 병사들을 강력한 힘으로 제압하고, 돌이 날라 오면 제비같이 그 돌을 피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 같은 능력을 갖추면 원수마귀는 도망을 갈 것이고, 주의 복음은 힘을 얻을 것이고, 교회와 성도들은 그 같은 비참한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당당하고 폼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온갖 핍박과 박해 앞에 노출되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능력을 선포하지 않았다. “너희에게 능력이 있을 지어다,” 하지 않았다. “너희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 끈질기게 그리 선포했다.

능력보다 은혜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은혜만이 모든 핍박과 박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만드는 것이 은혜였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기도만 하면 환자들이 벌떡 일어나고, 설교하면 사람들이 뒤집어지고, 한 마디 외치기만 해도 데굴데굴 구르는 일이 일어나는…뭐 그런 목사 말이다.

그래서 참 오랫동안 능력을 위해 기도했다.

“고 목사, 능력을 구하지 말고 은혜를 구해,” 능력을 구하는 내게 주님이 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에 얼마나 부끄럽던지…여전히 철들지 못한 모습에 얼마나 속이 상하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나던지…

아, 그 때서야 이 철없는 목사가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은혜가 없는, 은혜가 빠진 능력은 목회자를 “교회 안에 교주”로 만든다는 사실을!

목회든, 신앙의 여정이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혜 아래 있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능력”이 아니다. “은혜”다. 반드시 은혜여야 한다.

오늘도 주의 귀한 은혜에 빚진 삶이길 소망한다. 아멘

(고병호 목사, 발안반석교회 담임목사)

순교자의 교회 버가모 교회의 위용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해발 300미터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로서, 로마지배중 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된 총독부가 있을만큼 정치,행정의 중심지요 20만권의 장서를 가진 대규모 도서관이 있는 문화의 도시였다.

이곳은 제우스 신의 생지라는 것과 연관되어 지어진 제우스 신전을 비롯한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과 로마황제 숭배를 위한 3개의 거대한 신당등 갖가지 우상숭배 신전들이 가득차 있었다. 이곳은 사단의 위, 즉 사단이 득실거리는 곳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우상 숭배와 세속화 되어가는 도시 분위기 속에서 사단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아야 했다.

해발 400m의 가파른 산 위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도시 버가모. BC 400년쯤 형성된 버가모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800년 동안 종합병원으로 사용됐던 아스클레피움 유적. 돌로 포장된 800m의 진입로에는 당시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환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스클레피움 한가운데는 맑은 물이 흐르는 분수대가 설치돼 있고 동쪽에는 지하 원형 치료소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환자들은 이곳에서 목욕과 진흙 마사지, 맨발 걷기, 약재 처방, 식사 조절 등의 치료를 받았다. 또 북쪽에 설치된 야외 극장에서 연극과 음악을 이용한 심리치료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원 규모보다 더 놀란 것은 현지인들이 ‘크즐 아블루’(붉은 건물)라고 부르는 버가모 교회와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주님의 칭찬과 책망을 함께 받은 버가모 교회. 지금은 붉은 벽돌이 무너져내려 폐허가 됐지만 아직도 웅장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도 순교를 각오했던 초대교인들의 숨결이 생생히 느껴졌다.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전으로 건축됐으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버가모 교회로 사용됐다.

초대교회 당시 신전의 제사 연기 때문에 도시 전역이 자욱했다고 한다. 버가모는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과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던 우상숭배의 도시였다. 이 때문에 버가모 교인들의 신앙생활은 단지 입으로만 읊조리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목숨과 바꾸어야 하는 삶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충성된 증인이라고 칭찬 받은 ‘안디바’란 인물은 버가모 교회 초대감독으로 추정된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2∼13)

반면 주님은 계시록 말씀을 통해 세상과 결합해 진리를 잃어버리고 세속화된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15)

바울 사도는 제2차 선교 여행 때 버가모를 지나쳤으나(행 16:17∼18) 그곳에서 행한 일은 기록된 것이 없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고 교훈한 것을 보면 우상숭배는 버가모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초대교회 모두가 안고 있던 문제였던 듯하다.

입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목숨을 위협 받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또 일신의 안락만을 추구해 기독교를 다른 종교 중의 한 분파 정도로 전락시킨 우리 자신의 모습도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새 이름, 새 신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6∼17)

참조: http://livingstonech.net/god/bible_edu/3282

부활한 몸은 어떤 모습인가?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14:14)하는 질문은 수천년 동안 내려오는 인간의 질문이다. 죽으면 그만이고 특히 몸이 썩으면 없어져 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산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15:23)”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라고 신자들의 부활을 보증하셨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은”죽은 자들이…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15:35)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 살펴본다.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사르밧 땅의 과부아들(왕상17:17-24),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17-27), 유대 관원인 야이로의 딸(막5:22-43),나인성의 청년(눅7:11-17),나사로(요11:17-44),여제자 다비다(행9:36-43),졸다가 떨어져 죽었던 유두고(행20:7-12) 등이 죽었다가 살았으나 신학적인 의미의 부활은 아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었다가 소생했을 뿐 부활의 몸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부활의 몸이란 예수님 경우처럼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나 살과 뼈를 가진 몸이다(눅24:2940).어떤 불신앙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예수님의 출현이 영의 출현이거나,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못자국을 보이시며 손가락을 내밀어 창으로 찔렸던 옆구리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요20:2527).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다고 선언하고 있다(마28:9).

부활한 몸은 부활체를 가졌기에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다(눅24:41-45).영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어릴때의 경험에서 이것을 생각해 본다. 유교의 관습대로 조상의 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한 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꽂아놓고 음식을 잡수시도록 자손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한참 후에 방으로 들어와 호기심어린 눈으로 없어진 음식이 있는가 살펴보아도 밥이나 국이 없어지지 않아 안심하던 기억이 있다.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와 동일하지는 않으나 깊은 연관성이 있다. 도토리가 자라서 참나무가 되고 갓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때 동일한 물질에서 발전하지만 그 형태가 같지 않다.

도토리와 나무, 아이와 어른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계속성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는 것 같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몸은 계속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가까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생각한 일이나(요20:1415),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길에서 동행하게된 예수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6). 제자들이 무서워하며 모여있던 다락방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영으로 생각할 정도로(눅24: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해있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는 흙으로부터 온 것이나 부활 때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될 것이다(고전15:49).지금 우리의 몸은 썩고 욕된 약한 몸이지만 부활 때에 갖게될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한 몸이 될 것이니 곧 신령한 몸이다(고전15:42-44).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의 비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후에 가지시게될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변화산사건이라 부른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고 전하고 있다.

부활의 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 부활체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않을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죽을 수 없음과 같다(마22:30).닫힌 방안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으며(요20:19),동행하던 일행중에서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눅24:31) 몸이 부활의 몸이다. 가고싶은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가,원할 때 즉시 사라지는 부활체는 현재 우리 육체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과 다르다.

출근길에 또는 중요한 약속의 자리에 시간을 대기 어려워 조바심하며 차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일도 부활한 몸을 가질 때는 없어질것이다. 고칠 수없는 병에 걸려 고통하는 일도,늙는 것을 두려워하지도,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뺏기고 통곡하는 일도 부활 이후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살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를 받을 것이니(고전15:5152) 성도들의 몸이 구속을 받는 복되고 소망스런 날이 될 것이다(롬8:23).

<성기호 성결교신대총장>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금 촛대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시록1장20절을 보면 일곱금촛대가 나옵니다. 여기 금촛대와 별을 각각 교회와 사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이 일곱금촛대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출애굽기를 보시면 성소에 7개의 등잔으로 이루어진 등대가 나오고, 스가랴4장에서도 이 등대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성소의 일곱등잔의 등대가 계1장20절의 일곱 금촛대 와 같다고 알고 있었는데, 영문성경이나 그림을 보면 단순히 7개의 촛대로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더군요. (물론 손잡이는 하나겠지만요) 그러니깐 영문판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서…현재 교회나 성당에서 쓰는 일곱개의 촛대로 이루어진 모양 같기도 하고..저는 주님 오시기 전까지 밤인 세상을 비추는 개념에서 모세 때 성소의 일곱등잔의 등대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변형이 된건가요? 아니면 아주 다른건가요? (개념조차도..) 변천사가 있는건지..궁금해서 질문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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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1.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일곱 촛대들과 그 촛대들 사이에 인자 같은 분이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계 1:12-13). 여기에서 ‘촛대’로 번역된 말은 원래 “촛대들”(복수)입니다. 한 개의 촛대는 ‘뤼크니아’인데, 여기에서는 여러 개의 촛대를 가리키는 ‘뤼크니아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뤼크니아는 세워 놓거나 아니면 달아매는 ‘등잔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출 25:31; 왕상7:49; 슥4:2).

2. 출애굽기에 나오는 금촛대는 금 덩어리를 쳐서 만든 한 개의 덩어리였습니다. 비록 가지는 일곱 개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 촛대는 전부 한 덩어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촛대는 단수(a lampstand)로 표시됩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촛대는 따로 덜어진 일곱 개의 “금촛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곱 개의 촛대들은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 1:20). 스가랴서에 나오는 금촛대는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다가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령을 통해 권능과 힘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슥 4:2). 그러나 본문에서 일곱 금촛대들은 1차적으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 그러면 왜 본문에서 교회가 금촛대로 묘사돠고 있을까요? 금촛대는 요한 당시의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은 교회가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신성과 영광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고귀한 곳입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시하고 짓밟고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가 매우 존귀한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교회를 은, 놋, 또는 철로 만든 촛대가 아니라 금으로 만들 가장 귀중한 촛대로 묘사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통치자와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무시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산 백성들이 모인 귀중한 곳입니다.

또한 촛대는 세상을 비추는 교회의 사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선행과 순교의 피로 이런 사명들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극한 박해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선행과 순수한 믿음으로 복음과 진리를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교회는 어둠 속을 비추는 촛대로 상징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하셨습니다(마 5:14-16). 그러나 교회는 빛 자체는 아닙니다. 참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해서 비추는 발광체에 불과합니다.

3. 주님은 일곱 촛대들, 즉 일곱 교회 사이에(중간에) 계시면서, 교회가 이러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 손에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일곱 별) 붙들고 계셨습니다. 당시 교회들 중에는 여러 가지 박해와 어려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낙심하기 쉬운 처지에 있던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교회들에게 교회의 사자들을 붙들고, 교회 중간에 함께 계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공하려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뉴욕 타임즈지의 보고에 의하면 179주간 동안, 즉 3년이 넘도록 비소설계에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이 쓴 [The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우리 말로는 [성공한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고 번역됩니다.

 

이 책에 보면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일곱 가지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주도적 성격이며, 둘째는 목표를 확정하고 사는 것, 셋째는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는 습관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습관, 다섯째는 말하기 전 남의 말을 잘 경청하는 것, 여섯째는 창조적 협력의 원칙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신을 단련하는 사람입니다.

이 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중 자기주도적인 습관은 가장 우선으로 꼽았습니다. 성공에 있어 ‘자기주도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본 것이죠. 이 책은 그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이를 잠언 4장 23절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키라. 자기주도적이라는 말은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를 강조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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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가스 챔버(gas-chamber)에까지 들어갔다가 살아 남은 사람으로 로고테라피(의미치료,의미요법)의 창시자입니다.그는 아우슙지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연구를 시작해서 로고테라피, 즉 의미치료요법이라는 이론체계를 세웠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프랭클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이 아니라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 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포함한 고통과 모든 상황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며, 산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야말로 곧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래를 보아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환경을 지배합니다. 환경을 탓하지도 않고, 환경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하는 환경을 언제나 최선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주도적 인간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은 어떻게 기도했을까?

1 세기 유대인들의 기도 형태와 그 의미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에 힘썼는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의 지침은 구약성경에서 찾았다. 유대와 각지에 흩어진 그들은 시편을 기도의 교과서로 삼았다. 사해 사본이나 외경(the Apocrypha)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기도 내용과 형식은 계속 변했었다. 세대 간에 아무 변함없이 고정된 기도 양식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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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기도(Temple Prayers)

이사야 시절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었고(사56:7) 예수님도 그 점을 강조했다.(마 21:13) 매일 제 3시(오전 9시)와 제 6시(오후 3시), 오전과 오후에 번제가 드려질 때에 그들은 성전에 공중 기도로 모였다. 특히 오후 번제는 “기도하는 시간”(행3:1)으로 불릴 만큼 기도에 집중했다.

회당 기도(Synagogue Prayers)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 시절 이후 각지에 세워진 회당에서 안식일과 각 절기를 지켰는데 특별히 경전을 읽으며 열심히 기도했다. 고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회당을 단순히 “기도집”(the Prayer-house)으로 칭하기도 했다. 기도는 회당장이 지명한 사람이 대표로 먼저 기도하면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느8:6, 고전14:16). 또 회당기도는 반드시 선채로 행해졌다.(마6:5)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으로 시작해 용서와 치유를 간구하는 내용이 기도에 포함되었다.

주후 100 년경에는 18개의 구절들이 각기 “하나님께 복이 있을지어다”(Blessed are you, Lord.)로 끝나기에 통칭 “18 가지 축도”(히브리어: Shemoneh Esreh)로 불리는 공식기도문이 형성되었다. 또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나라를 소망하는 내용의 회당송영(히브리어: Qaddish)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초기의 Qaddish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신의 뜻에 따라 창조한 이 세상 가운데서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높이고 경배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당신의 생전에, 당신의 때에, 또 온 이스라엘 집의 생전에, 그리고 가까운 시간 안에 세워지기를 간구합니다.”

이런 Qaddish가 예수님이 가르친 주기도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을 것이다.

쿰란 공동체의 기도(Prayers at Qumran)

사해사본을 기록한 쿰란 공동체의 정기 예배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문서에는 기도가 많이 나타난다. 필사문서 형태로 축도, 동의(amens), 간구, 고백 등이 남아 있다. 그들은 성전 제사를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했기에, “입술의 제물은 의인의 향기로운 제사와 같으니”라고 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동물 희생을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매일의 개인적 기도(Daily Personal Prayers)

신명기 6:7은 이스라엘 백성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도록 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 말씀은 쉐마로 불리는 “이스라엘아 들으라(히브리어:Shema)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히6:4)를 말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쉐마는 완전히 유대인들의 일상 관습이었다고 한다. 또 매일 새벽과 누워 자기 전 두 번씩 출애굽의 구원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며 감사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소년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즉시 쉐마를 배우게 했고 또 12살이 되면 규칙적으로 반복 암송하며 기도하게 했다. 여자와 유아와 노예는 쉐마 암송의 의무에서 제외 되었다.

다니엘의 예(단6:10,13)에서 보듯이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 특별히 성전의 오후 제사 시간은 개인적인 기도로 보냈다. 고넬료 같이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들도 정기적 기도 습관을 지켰다.(행10:1-3) 신약성경과는 별도로 기록된 초기 기독교 문서에는 초대교회 교인들도 하루 세 번씩 기도했는데 쉐마 대신에 주기도문으로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관습에 정통한 학자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해 뜰 때, 성전제사 시간인 오후 세시, 그리고 해 질 때, 하루 세 번 씩 쉐마를 암송한 후에 기도를 했다고 한다.

경건한 유대 가정에선 신명기 8:10(“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에 근거하여 식사 때마다 기도했는데, 특별히 쿰란 공동체는 더 철저했다. 예수님도 이 관습을 따랐음이 분명하며(막6:41) 초기 기독교인들도 그러했다.(고전10:30) 통상적인 식사기도는 “이 땅에 양식을 주신 주께 복이 있음이여!”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세월호 특별법 각종 특혜에 관련된 오해와 진실

Q1. 세월호 가족들이 ‘피해자 전원 의사자 지정’을 요구한 것이 사실인가요?

세월호 참사 가족 대책위원회, 대한변호사협회,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가 함께 만들어 350만 명의 서명으로 국회에 입법 청원한 <4·16 참사 진실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안>에는 의사상자 지정 관련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보상/배상 문제보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에 초점을 둔 특별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Q2. 단원고 피해학생들이 ‘대학 특례입학’을 요구한 것이 사실인가요?

가족과 국민이 청원한 특별법안에는 대학 특례입학 관련한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유가족들은 국회의원에게 ‘대학 특례입학’ 내용을 법안에 넣어줄 것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특례입학과 관련한 법안으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유은혜 의원과 새누리당 김명연 의원이 <세월호 침몰사고 피해학생 대입지원 특별법안>을 발의하여 국회 상임위에서 의결한 바 있습니다. 피해를 입은 학생의 대입 지원을 위해 ‘정원 외 입학’ 근거를 마련한다는 게 법안의 핵심 내용입니다. 유은혜 의원은 브리핑에서 “국회가 국가적 참사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차원에서 먼저 기본 조치를 취한 것”이라며 “내년 2월까지 한시 적용되는 법률이라, 세월호 특별법이 처리되면 단원고 특별법은 폐기돼도 된다. 특혜가 아니라 아무런 잘못도 없이 상처받은 학생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자는 것이다. 2010년 연평도 포격 직후 제정된 ‘서해5도 지원 특별법’에 따라 5개 도서지역 학생들을 정원 외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한 전례도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Q3. 그렇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이 발의한 특별법안의 ‘416 국민안전의인’ 예우 조항과 대입지원 특별법안에 대한 가족들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통해 ‘철저한 진상규명’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가족들의 입장입니다. 가족대책위 유경근 대변인은 한 인터뷰에서 “저희가 제출한 법안에는 배상과 보상에 관련한 아주 기본적인 원칙만 담겨 있다. 이러한 것들은 진상 규명이 된 이후에 전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과 내용에 따라서 진행이 될 문제이지, 저희가 먼저 주장하거나 일부에서 먼저 주장해서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더불어 “특례 입학 같은 경우에도 발의하신 유은혜 의원을 뵙고 분명히 말씀드렸다. 해당되는 학생이나 가정에게는 필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진상규명을 하는데 방해가 되거나 장애가 된다면 이걸 먼저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고 분명히 의사를 전달했다, 중지를 할 수 있으면 중지를 해달라고도 요청했다”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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