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꼭 아들에게 물려주어, 그 결과를 아들이 이어가야 할까요? 큰 교회건, (기독교)
시회복지 기관이건, 자식이나 가족이 대물림 받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아들이나 친인척, 특정한 사람이 아니면 유지 되지 않는 공동체는 그만큼 권력에 대한 의존성과 폐쇄성이 강한 건강하지 않은 공동체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그들과 이별했을 때, 비로소, 가나안 지파 공동체는 모세의 공동체가 아닌, 하나님의 공동체이지 모두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가 승천하심으로 제자들을 떠남으로, 성령이 임하셨고, 제자들은 의존적인 권력의지를 벗어나 비로소, 나눔과 비움의 증인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의식의 교만과 독단은 공동체와 조직을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구조로 만들며, 거기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협동조합 노느매기 공동체를 함께하면서, 순간 순간 위기들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중요멤버들이 사고가 생겨 빠지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그 빈자리를 누군가가 채워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 빈자리를 통해서, 또 다른 한사람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빠지지 않고 계속했다면, 그 한사람에게 대한 의존이 더 심해졌겠지요. 그럼으로 공동체는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조금씩 모두의 공동체가 되어감을 경험했습니다. 때론 공동체의 위기와 도전은 그 공동체를 깨우고, 더 풍성하게 하는 좋은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공동체가 건강한 유기체적인 공동체라면 그렇습니다.
올해 협동조합 워크샵을 할 떄, 1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질문받았습니다. 10년후 나의 모습은?…. 협동조합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나는 그냥 평조합원이 되어 선생님들과 함께하고, 나는 신앙을 가진 선생님들이 포함된 작은 신앙공동체를 섬기며 목사노릇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정말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는 그 결과를 보아야합니까? 우리의 일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34~3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왜 우리는 그 결과를 보아야합니까? – Dorothy Day
우리가하는 일은 아주 작지만 몇 개의 떡덩이와와 물고기가 있는 소년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작은 것을 취하셔서 증가시킬 것입니다. 그는 나머지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너무 작아서, 끊임없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도 역시 실패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명백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죽지 않는 한 수확 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그 결과를 보아야합니까? 우리의 일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다른 세대가 수확을 거둬들일 것입니다.
그 인물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이다.
1880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던 그녀는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을 공부했다.
1912년 3월 간호 선교사로서 처음 조선 땅을 밟았으며 주로 전라도 일대에서
한센인들과 걸인,고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한국 선교에 여러 족적을 남기고
그녀는 1934년 빈손으로 세상으로 떠났으며
자신의 장기마저도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이렇게 산 이가 늘 침대 머리맡에 붙여 놓은 글귀가 바로 “Not Success But Service”였다.
하나님께서는 한 인생의 성공여부를
평가하기 위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 “섬김”을 소환하실 것이다.
by 김명우목사(주안장로교회)
김명우 목사는 고신대학교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현재 주안장로교회 부목사로 시무중입니다.
하나님과 흑암의 세력과의 싸움은 벌써 결말이 나 있었다. 하나님은이 싸움에서 누가 과연 진정한 하나님이신가를 보여 주시기를 원했다.그러나 적군들은 그들의 생명이 다한 위기에 몰려 있음에도 항복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았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애굽의 다른 점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언약에 부응하였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흑암의 세력의 노예되었던 신분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바뀌게 될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시점에서 유월절을 제정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선 옛 습관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할례가 가지고 있는 의미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그들과 하나가 되길 원하셨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월절이 갖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유월절은 신약의 성찬식과 같은 것이다.
‘십계’ 영화의 한장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은(물론 상징으로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지만)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유월절에도 어린 양의 살과 피를 그 상징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어린 양은 대속 양으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성결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유월절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표가 곧 유월절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참여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이방인이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할례를 받고 난 후에야 유월절에 참여할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을 본다면 유월절은 성도의 긴밀한 교통과 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성도, 성도와 성도간의 연합이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은 뼈를 꺾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가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월절은 하나님의 승리를 축하하는 영원한 기념비이다. 흑암의 적대세력을 완전히 멸절시키고 노예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으로 바뀐 것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절기이다. 할례는 한번 행함으로 그가 언약에 참여한 백성이 된 증거를 표시한다. 그러나 유월절은 영원히 게속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며 하나님과 깊은 연합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념비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신약의 유월절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월절은 새 생명이 시작된 날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 달을 정월이 되게하셨다(출12:1). 이것은 곧 우리가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애굽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 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 었더라”(출12:19-30).
하나님은 이 일을 행하시기 전에 몇번이고 바로에게 이적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바로는 결코 눈을 뜨지 못했다. 장자가 모두 죽었다는 것은 큰 뜻이 있었다. 장자란 그 가정의 “기운”이다. 장자가 죽었다는 것은 그 가정의 기운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 가정이 망했다는 것이다. 위로 왕으로 부터 모든 사람의 장자가 죽었다는 것은 애굽이 망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더불어 깊은 교제를 나누는 동안에 흑암의 세력아래 있는 백성들은 다시는 기력을 회복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망해 버리고 마는 것이 곧 유월절이 가져다준 교훈이다.
이런 후에 바로는 이스라엘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얼마나 길고 지루한 싸움이었는가? 얼마나 철저하게 망해버린 싸움이었는가? 그 뿐이 아니다. 온 애굽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제발 이스라엘이 떠나 주길 간청했다. 이스라엘은 그들로 부터 온갖 은, 금, 패물과 의복과 물품을 취하였다. 이것은 의당히 승리자가 취해야 할 전리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부역한 대가로 친다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다. 이스라엘이 의당히 받아야 할 것을 받게하신 것이다.
애굽을 떠나자 많은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백성을 다라 나섰다. 그들이야 말로 누가 진정 하나님이며 우주의 왕이신가를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할례를 행한 후 이스라엘로 받아 들이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베풀어진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 주셨다. 그 문은 예수님에 의해 전 인류에게 열린 것이다.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무교절을 지키도록 절기를 정해 주셨다. 아울러 모든 생산의 초산물을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서 구별하도록 제정하셨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날은 우리가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 할 기념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물로서 그분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여 드려야 한다.
고린도서신 가운데 1장의 일치에 관한 가르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부정부패와 물질 만능주의와 권위주의에 찌든 인간성에 대한 문제를 재삼 돌이켜 보는 좋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의 사이에 있는 한 항구도시로써 사회적 타락의 온상이 된 지역이라 사도 바울도 이 지역을 목회할 때 많은 우려를 해왔는데 결국 내부적인 불화와 반목으로 깨어져 가는 교회의 상황을 들었을 때, 이 서신을 통해 잘못된 습관과 교리를 바로잡고, 신앙의 윤리적 표준을 제시하려고 한 것입니다. 특히 분쟁이란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위험한 요소이기에 이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분쟁의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만과 자기 자랑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되는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교회가 맡긴 모든 직분에는 높고 낮은 것이 아니라 서로 존경하고,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러한 직분
을 다스리는 자로써 존경받는 것이며,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거룩한 부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만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자랑이란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앟는다고 했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이미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는 행동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허탄한 자랑은 악한 것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분열 속에서 자신의 권위만을 찾고 자랑하던 그들에게 일치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바로 여러 사람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의 근거요, 신앙의 근거이시며, 기도의 중보자가 되어주십니다.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믿는 자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곤경으로 인해 혼란의 소용돌이 가운데 빠져가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일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같은 언어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믿음의 언어, 소망의 언어, 그리고 사랑의 언어인 것입니다. 언어의 혼란에서 인류의 분산과 전쟁 그리고 공포로 몰아넣어 갔던 창세기의 이야기는 바로 언어의 통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된 우리들은 참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는 어떤 정치적, 물질적 지위나 권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참된 복음의 말씀으로 하나되는 것이며, 형식적 절차나 과정을 통해 주어지는 말의 지혜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모든 것을 드려 섬기는 삶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함께 손붙잡고 나아가는 성도의 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하게 됩니다.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육신의 죽음후에는 영생이 있음을 알고 다시 살아날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부활은 기독교가 전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부활에 대한주님의 약속은 성경에서뿐 아니라 봄철에 돋아나는 모든 나무잎새에서도 볼수있다.(마틴루터)성경에서 말하는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초대교회는 탄생했으며 인류의 구속여명은 밝아왔습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지 못하셨더라면 성인이나 성자는 될수 있겠지만 인류의 구원자는 될수없었을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장사된지 사흘만에 새 창조의 능력으로 예수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부활을 맞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바로 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깨트리고 부활하시므로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은혜와 생명이 이 세상을 지배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지 하나의 신앙고백으로서만 끝나서는 안되며 날마다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해야 합니다.날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살아나야 합니다.(갈2:20)그러면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영생과 부활이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어야 합니다.(요일5:4)그리스도는 확실히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고 죽으셨습니다.사형을 집행한 백부장이 이를 확인했습니다.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드시 부활이 있음을 믿고 부활의 소망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어려운 점은 학생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교정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종말”이다. 대개 우리는 종말을 멸망과 파괴로 생각하고, 구원이란 그것을 피해서 살아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말은 우리가 타락했으니까, 하나님이 진노를 쏟아 부으시는 것, 예를 들면 밥상 앞에서 손자들이 까불고 아들 부부는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그러니까, 참다 못해 밥상을 둘러 엎으시는 화난 할아버지의 얼굴, 그게 종말의 이미지이다. 그러면, 할아버지의 분노를 촉발하지 않게 조용 조용히 밥 먹는게 신앙생활이 된다!
성경의 역사관은 종말을 완성으로 본다. 죄로 인해 깨어지고 타락한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이며, 언젠가는 그 역사가 절정에 도달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 성경적 종말론의 요체이다. “하나님의 승리”라는 역사…적 관점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종말적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묵시”는 무엇인가? 이 종말이 지금의 세상과는 아주 다른, 현세와는 단절된 모습으로 올 것이라는 생각이 묵시적 사고이다. 묵시 문헌은 종말에 관한 진리를 담기 위한 문학적 도구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종말이 상위 개념이고, 묵시는 하위 개념이다. 묵시에서 파괴로서의 종말, 이 세상과의 단절로서의 종말이 강조되는데, 파괴로서의 종말은 상위 개념인 완성으로서의 종말 아래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단절을 완성보다 더 강조하는 사고는 이 땅에서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현실도피적 신학이 될 수 밖에 없다.
종말은 심판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의 귀결점이다. 심판은 이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그 역사는 이미 이 세상 속에서 시작되어 싹이 나서 자라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은 그 사랑의 역사의 일부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이제 곧 무너질 집을 새단장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동참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증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