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잘하는 목사와 설교를 잘 듣는 능력의 성도

한동안 ‘빈 들에 마른 풀같이’나 ‘불길 같은 주 성령’ 같은 찬송가를 꺼렸던 적이 있습니다.
늘 박수를 치면서 빠르게 불렀던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입니다.
철야예배나 부흥회 때는 몇 번을 그런 식으로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찬송가가 마음을 여는 수단일까요?
마음을 열기 위해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불경죄로 다스릴 일입니다.
찬송가를 열광적으로 부른다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박수를 치면서 열광적으로 찬송하는 교인들을 보면서 속으로 “지금 가사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고 부르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교회에서 봄, 가을로 일 년에 두 차례씩 부흥회를 열곤 했습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는 강사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교인들을 마음대로 웃기고 울리는 능력입니다.
설교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사 목사의 입담이 중요합니다.
교인들은 어떤 내용을 들었는지에 관계없이 설교 시간 내내 웃고 울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시절에는 찬송가를 불러도 박수를 치면서 빠르게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자기가 어떤 내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힘겹게 걸음을 옮기시는데 이미 넘어지기를 수차례 반복하였더라.
야윈 어깨에 대조되어 십자가는 더욱 무거워 보이는데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십자가에 무늬를 새기더라.
채찍에 맞아 찢어진 홍포에는 예수의 신음이 배어 있더라.
이제 저 홍포처럼 예수의 몸도 십자가에서 찢어질 터인데, 이런 인간의 만행에 하늘도 얼굴을 가리고 침묵하더라.”라는 식의 얘기는 없습니다.
있었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입니다.

성경은 신앙을 ‘지식’의 차원에서 설명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가 무슨 뜻입니까?
머리가 있으면 생각 좀 해보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사는 문제가 그렇게 걱정스러우냐?
오늘 하나님을 섬기면 내일은 굶어죽을 것 같으냐?
하나님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도 책임지는 분인데 너희를 책임지지 않을 것 같으냐?
세상을 어떻게 살까 하는 문제는 제발 좀 그만 고민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지를 고민해봐라.”라는 뜻입니다.
수업시간에 깜빡 졸아서 노트 필기를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친구 노트를 빌려서라도 보충해야 합니다.
조는 것을 선생님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진도가 나간 만큼 자기가 공부해야 합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그 시간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으면 듣는 만큼 자기 안에 쌓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쌓이는 것이 없으면

“목사님, 설교 좀 제대로 준비해서 하십시오. 목사님 설교 듣고는 신앙생활을 못하겠습니다.”

하고, 항의라도 해야 합니다.
목사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따지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 목사 설교 잘해?”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타지로 이사해서 교회를 정할 때 가장 많이 고려하는 것이 목사의 설교라고 합니다.
말씀을 맡았으니까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인에게는 설교를 듣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 잘하는 목사를 찾는 것만큼 설교 잘 듣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by 강학종 목사

(서울 하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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