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복권을 산 목사들의 은밀한 묵시

10년쯤 전, 멕시코에서 선교를 하던 친구가 잠깐 귀국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들끼리 모였습니다.
당연히 멕시코에서 온 친구가 주인공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먹고 싶다는 메뉴로 점심을 먹고, 그 친구가 찜질방에 가고 싶다고 해서 찜질방에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로또복권 얘기를 꺼냈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다면서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로또복권을 사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만, 멕시코에서 고생하다 온 친구 얘기를 모른 척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서 만 원씩 거두었습니다.
걸음 빠른 친구가 대표로 가서 복권을 구입해왔고, 한 친구가 그것을 보관했습니다.
친구들이 다 모이면 11명인데 그때 3명이 불참해서 8명이 같이 있었습니다.

로또복권이 대화 소재가 되었습니다.
1등 당첨되면 예배당을 크게 지어서 공동목회를 하자는 말도 했고, 불참한 친구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얘기에 사찰집사로 써주자고 해서 웃기도 했습니다.
며칠 후에 복권을 보관했던 친구가 우리끼리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습니다.

7인의 기도하는 사람들이여!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자 3인에 의해 빼앗긴 바 되었으며,
우리의 것은 그 중 8분의 7이 쓰레기통에 슬피 울며 찢겨진 채 버림받았으나
다행히 우리의 손에 의하지 아니한 것에 의해
우리의 분깃 중 8분의 1이 다시 또 색깔 입혀짐을 당하고 있음을 고하노라.

7인의 기도하는 사람은 8명 중에 자기를 뺀 일곱 명입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자 3인에 의해 빼앗긴 바 되었다는 얘기는 당첨되면 우리끼리 공동목회를 하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 없던 세 명 때문에 부정 타서 꿈이 무산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것은 그 중 8분의 7이 쓰레기통에 슬피 울며 찢겨진 채 버림받았다는 얘기는 복권 8장 가운데 7장이 ‘꽝’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분깃 중 8분의 1이 다시 또 색깔 입혀짐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는 한 장이 본전을 건져서 그것으로 다시 복권을 구입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재미삼아 한 일이지만 목사 체면에 ‘로또복권’을 직접 말하기는 거북했나 봅니다.

그 글을 보면서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은 모두 배꼽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없었던 친구는 무슨 내용인지 알 재간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묵시서입니다.
제 친구가 쓴 글은 물론 장난입니다만 대부분의 묵시문학은 세상의 종말이나 악에 대한 심판을 소재로 합니다.

그런 내용을 다루려면 천생 아는 사람만 알게 써야 합니다.
할 말은 하되 책은 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그런 책입니다.
구약의 배경을 아는 사람들만 알아듣게 썼습니다.
구약성경을 모르면 도무지 모릅니다.

……… <쉽게 보는 어려운 요한계시록>중에서

요한계시록이 어려운가요?
요한계시록의 원래 독자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들에게 쓴 편지가 우리가 보는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때 그들도 요한계시록을 어려워했을까요?
마치 수수께끼나 암호 문서를 푸는 것처럼 머리를 싸맸을까요?
편지를 그렇게 쓰는 법은 없습니다.
그때 그들은 다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워합니다.
암호를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약 배경만 알면 성경 66권의 다른 책들과 똑같은 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대 특별하거나 신비한 책이 아닙니다.

by 강학종 목사

강학종 목사님은 현재 서울 하늘교회 담임목사이며,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저서로 ‘하룻밤에 읽는 이스라엘 왕조실록’ ‘쉽게 보는 어려운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슈퍼플러스’ ‘ 쉽게 보는 어려운 성막’ 등이 있습니다.

순교자의 교회 버가모 교회의 위용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해발 300미터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로서, 로마지배중 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된 총독부가 있을만큼 정치,행정의 중심지요 20만권의 장서를 가진 대규모 도서관이 있는 문화의 도시였다.

이곳은 제우스 신의 생지라는 것과 연관되어 지어진 제우스 신전을 비롯한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과 로마황제 숭배를 위한 3개의 거대한 신당등 갖가지 우상숭배 신전들이 가득차 있었다. 이곳은 사단의 위, 즉 사단이 득실거리는 곳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우상 숭배와 세속화 되어가는 도시 분위기 속에서 사단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아야 했다.

해발 400m의 가파른 산 위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도시 버가모. BC 400년쯤 형성된 버가모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800년 동안 종합병원으로 사용됐던 아스클레피움 유적. 돌로 포장된 800m의 진입로에는 당시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환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스클레피움 한가운데는 맑은 물이 흐르는 분수대가 설치돼 있고 동쪽에는 지하 원형 치료소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환자들은 이곳에서 목욕과 진흙 마사지, 맨발 걷기, 약재 처방, 식사 조절 등의 치료를 받았다. 또 북쪽에 설치된 야외 극장에서 연극과 음악을 이용한 심리치료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원 규모보다 더 놀란 것은 현지인들이 ‘크즐 아블루’(붉은 건물)라고 부르는 버가모 교회와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주님의 칭찬과 책망을 함께 받은 버가모 교회. 지금은 붉은 벽돌이 무너져내려 폐허가 됐지만 아직도 웅장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도 순교를 각오했던 초대교인들의 숨결이 생생히 느껴졌다.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전으로 건축됐으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버가모 교회로 사용됐다.

초대교회 당시 신전의 제사 연기 때문에 도시 전역이 자욱했다고 한다. 버가모는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과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던 우상숭배의 도시였다. 이 때문에 버가모 교인들의 신앙생활은 단지 입으로만 읊조리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목숨과 바꾸어야 하는 삶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충성된 증인이라고 칭찬 받은 ‘안디바’란 인물은 버가모 교회 초대감독으로 추정된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2∼13)

반면 주님은 계시록 말씀을 통해 세상과 결합해 진리를 잃어버리고 세속화된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15)

바울 사도는 제2차 선교 여행 때 버가모를 지나쳤으나(행 16:17∼18) 그곳에서 행한 일은 기록된 것이 없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고 교훈한 것을 보면 우상숭배는 버가모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초대교회 모두가 안고 있던 문제였던 듯하다.

입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목숨을 위협 받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또 일신의 안락만을 추구해 기독교를 다른 종교 중의 한 분파 정도로 전락시킨 우리 자신의 모습도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새 이름, 새 신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6∼17)

참조: http://livingstonech.net/god/bible_edu/3282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금 촛대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시록1장20절을 보면 일곱금촛대가 나옵니다. 여기 금촛대와 별을 각각 교회와 사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이 일곱금촛대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출애굽기를 보시면 성소에 7개의 등잔으로 이루어진 등대가 나오고, 스가랴4장에서도 이 등대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성소의 일곱등잔의 등대가 계1장20절의 일곱 금촛대 와 같다고 알고 있었는데, 영문성경이나 그림을 보면 단순히 7개의 촛대로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더군요. (물론 손잡이는 하나겠지만요) 그러니깐 영문판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서…현재 교회나 성당에서 쓰는 일곱개의 촛대로 이루어진 모양 같기도 하고..저는 주님 오시기 전까지 밤인 세상을 비추는 개념에서 모세 때 성소의 일곱등잔의 등대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변형이 된건가요? 아니면 아주 다른건가요? (개념조차도..) 변천사가 있는건지..궁금해서 질문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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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1.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일곱 촛대들과 그 촛대들 사이에 인자 같은 분이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계 1:12-13). 여기에서 ‘촛대’로 번역된 말은 원래 “촛대들”(복수)입니다. 한 개의 촛대는 ‘뤼크니아’인데, 여기에서는 여러 개의 촛대를 가리키는 ‘뤼크니아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뤼크니아는 세워 놓거나 아니면 달아매는 ‘등잔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출 25:31; 왕상7:49; 슥4:2).

2. 출애굽기에 나오는 금촛대는 금 덩어리를 쳐서 만든 한 개의 덩어리였습니다. 비록 가지는 일곱 개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 촛대는 전부 한 덩어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촛대는 단수(a lampstand)로 표시됩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촛대는 따로 덜어진 일곱 개의 “금촛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곱 개의 촛대들은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 1:20). 스가랴서에 나오는 금촛대는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다가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령을 통해 권능과 힘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슥 4:2). 그러나 본문에서 일곱 금촛대들은 1차적으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 그러면 왜 본문에서 교회가 금촛대로 묘사돠고 있을까요? 금촛대는 요한 당시의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은 교회가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신성과 영광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고귀한 곳입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시하고 짓밟고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가 매우 존귀한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교회를 은, 놋, 또는 철로 만든 촛대가 아니라 금으로 만들 가장 귀중한 촛대로 묘사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통치자와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무시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산 백성들이 모인 귀중한 곳입니다.

또한 촛대는 세상을 비추는 교회의 사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선행과 순교의 피로 이런 사명들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극한 박해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선행과 순수한 믿음으로 복음과 진리를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교회는 어둠 속을 비추는 촛대로 상징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하셨습니다(마 5:14-16). 그러나 교회는 빛 자체는 아닙니다. 참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해서 비추는 발광체에 불과합니다.

3. 주님은 일곱 촛대들, 즉 일곱 교회 사이에(중간에) 계시면서, 교회가 이러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 손에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일곱 별) 붙들고 계셨습니다. 당시 교회들 중에는 여러 가지 박해와 어려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낙심하기 쉬운 처지에 있던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교회들에게 교회의 사자들을 붙들고, 교회 중간에 함께 계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