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2장 혼인잔치비유] 길가는 사람 불러 놓고 예복 타령이라니

민영진목사(대한성서공회총무)

마태복음 22장 1∼1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천국을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시면서 말씀하신 “왕실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온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이미 초청한 몇몇 귀한 손님들을 오라고 했더니, 초청 받은 이들이 모두 오기를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임금은 다른 종들을 또 보내어 혼인잔치에서 대접할 풍성한 식단까지 소개해 가면서 다시 초청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밭일이 바쁘다고 밭으로 가고, 또 한 사람은 상업차 길을 떠나고, 나머지 초대받았던 나머지 손님들은 임금의 종을 능욕하고 죽였다. 그러자 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랐다. 그러면서 임금은, 잔치 준비는 끝났음을 알리고, 이미 초청받은 이들은 이 잔치에 합당한 사람들이 아님을 확인하고,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22:9) 오게 하였다. 그래서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하였다”(22:10).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왔다.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초대받고 들어왔던 그 사람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곳”에 던지라고 한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봉변 당한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통탄(痛嘆)할 일이다. 거리에 있는 사람 억지로 불러다가 혼인 잔치에 앉게 해서 앉은 것뿐인데, 혼인 잔치에 걸맞은 예복(禮服)을 입지 않았다고 손을 묶는 것으로도 모자라 발까지 결박하여 땅 속 어두운 곳에 가두다니! 정말, 당한 사람으로서는 이를 갈 일이다. 미리 초청을 받았다면 예복을 준비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거리에서 돌아다닐 때 입던 옷 그대로 초청 받아 왔는데, 무슨 예복이란 말인가! 또 다른 손님들도 다 마찬가지로 혼인 잔치에 갈 생각도 못하고 거리로 나왔다가 여기 잔치 자리에 온 이들인데, 도대체 그들은 또 언제 어떻게 예복을 준비하여 입고 왔단 말인가?

언젠가 어느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 서울의 어느 “클럽 하우스”라는 데를 가본 일이 있다. 때는 여름이어서 넥타이를 매지 않는 정장 윗도리를 입고 갔다. 그런데,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식당 종업원이 나의 길을 막는다.
“손님, 죄송합니다. 여기 식당에는 정장을 하셔야만 출입이 됩니다. 초청하신 분께서 이미 말씀하셨을 줄 압니다.”
“네,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 식대로 정장을 하고 왔습니다.”
“넥타이를 매셔야 합니다.”
“이것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 옷인데요.”
“그래도 매셔야 합니다. 여기 규정이 그러합니다. 손님 같은 분을 위해 우리가 넥타이를 준비했습니다.”
종업원이 여러 개의 검은 색 계통의 넥타이를 벌써 어디선가 가지고 왔다. 나는 더 완강하게 버틸 처지도 아니고 해서, 약간은 바보 같은 느낌이 들어도 바보들의 축제에 온 기분으로 노타이셔츠 차림에 목 둘레 맨살에다가 검은 타이를 매고 들어갔다. 나는 우리 일행이 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나의 기괴한 패션에 놀랐다. 나는, “예복을 안 입고 오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날까봐 이렇게 넥타이를 매고 왔습니다” 하고 말했고, 초대받은 손님들은 모두들 나의 바보 같은 옷차림을 보고 한바탕 웃었다. 나는 좌중(座中)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로 이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왕실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도, 거기 뜻밖에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길 가던 사람들이 어느 사이에 예복을 준비하여 그것을 입고 예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혹시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예복을 여기에서 주는 이런 넥타이 같은 어떤 것을 주지 않았을까요? 임금에게 혼난 이 사람은 종업원들이 그런 예복을 입으라고 주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그냥 들어왔다가 임금에게 죄인 취급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고요…”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다. 주석들을 보니, 모두 나처럼 추측을 하고 있다. 혼인잔치를 차려놓고 손님을 초대한 주인은 손님들이 위에 예복으로 걸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그것을 걸치고서야 예식장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하는 풍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리 초대받고 온 이들이 아니고 평상시에 거리에 있던 이들을 초대했을 경우에는 더더욱 주인이 이런 예복을 준비했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예복을 준비했는데도 그것 입기를 거절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초청자인 주인을 모독한 것일 것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유대교에서 특별히 거룩하게 여기는 곳에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들어갈 수가 없다. 거기에 들어 갈 이들을 위한 긴치마와 어깨와 팔을 가릴 웃옷을 입구에 준비해 놓고 그것을 입고서야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곳이 있다.
초대장은 이미 오래 전에 나갔다. 예언자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켜 장차 올 구원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잔치가 벌어졌을 때 초대받은 이들은 초대에 응하기를 거절했다. 기껏 거리에서 초대받은 이들 중에도 예복 입기를 거절해서 쫓겨난 이들도 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그 초대에 걸맞은 삶을 산다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힘드는 것일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도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 글은 대한성서공회 홈피에 있는 민영진 목사님의 글을 옮겨왔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질문)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 보면 주님께서 성령을 훼방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는 죄는 무엇인가요?

답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유독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이 사함을 받지 못할까요?

Louis Berkhof은 이 문제에 대해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나 성령의 역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신 32:39),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 일과 대조하며(레 24:1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인 레위기 24장1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생긴 배경을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곁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주님은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단언하시면서(마 12:22-28), 자신이 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은 인자를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2).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신적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말로 극단적인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을 말하는데(마 9:3-4), 열왕기하에 보면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살 수 있는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엘리야가 그 사신을 만나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느냐고 말하면서 그가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왕하 1:1-18). 여기에 나오는 바알세붑은 불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으로 에그론 사람들은 이 ‘파리의 주인’이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고 믿은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병자를 고칠 때 바리새인들은 그 성령의 사역을 더러운 ‘죽은 파리’(전 10:1)의 신에게 부탁하여 병을 고친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막 3:22).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무서운 반역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회개시키는 성령 자체를 훼방하기 때문에 절대로 회개가 되질 않아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히 10:26-27).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대하여 단순히 의심하거나 무의식중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러한 주님의 이적이 나타나고 내적으로 확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람의 역사인지를 알지 못하여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알면서도 귀신의 역사로 중상 모독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며 경고하던 대상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활동을 믿으며(행 23:6-8),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가르쳤던(마 23:2-3), 이스라엘의 선생(신학자와 목사)들입니다(요 3:10). 사실 이들은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그분께서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분별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알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고 폄하하고, 또 본질을 흐리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도록 방해하였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으로 이루어지는 성령훼방죄,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진리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 거역에서 극에 달합니다.이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신의 길을 따라가기로 선택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결정한 결과입니다.양심은 성령의 감화에 대한 계속되는 거절로 인해 화인 맞고, 따라서 자신이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음을 거의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을 범함으로 양심이 고통 받는 사람입니다.비참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보통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살지 않은 결과입니다.양심이 고통 받는 사람은 둘 중 한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니다.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굴복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잘못을 올바르게 고침으로 성령의 감화에 응답하든지, 아니면 양심에 화인 맞고 성령을 침묵시킴으로 고통스러운 자극을 제거 합니다.

후자의 길을 택하는 사람이 회개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양심이 영원히 무감각해져 회개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그는 고의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못할 곳에 두었습니다.그의 선택을 고집스럽게 악용함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악이 마침내는 선처럼 보이고, 선은 악처럼 보입니다.그것이 바로 죄의 기만성입니다.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눈인 양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비춰진 빛에 순종하는 생애를 계속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경고 장치입니다.그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영원한 멸망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이고 고집스러운 불순종은 마침내 고칠 수 없는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 무시했던 바로가 바로 그 실례가 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용서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한 사람이 용서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훼방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용서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성령의 경고하는 음성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 위해 하늘과의 교통의 줄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사도행전14:3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도행전 14장 3절 ‘자기 은혜의 말씀’이란 무슨 뜻인가?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이영표 간증

사도행전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이라는 곳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두고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은혜’, 헬라어로 “로고테스 카리토스 아우투”라고 표현되는 이 자기 은혜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헬라어를 직역해보면  은혜–나에 대한 은혜입니다. 이를 조금 의역을 하자면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3절, 15장 15절, 갈라디아서 2장 9절, 에베소서 3장 7절 등 여러 곳에서 같은 말씀을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라고.

은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습니다. ‘주의 은혜’라는 말이 있고, 문자 그대로 ‘은혜’라는 말도 씁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은혜도 여러 가지요, 그 중에서도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혜가 따로 있습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은혜에 대해서 간증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사도 바울은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은혜의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바울이 남다른 명예를 가진 사람도 아니요, 과거가 좋은 사람도 아니요, 권세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카리스마적 권위’라고 합니다. 그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같이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가 있을 때에만 남에게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요 자격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것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그 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치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인 것처럼 모두를 사랑하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다, 모든 되어지는 일이 다 나 때문이요, 나를 위해서 있어지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바울은 은혜를 위해서 삽니다. 은혜만을 위해서 삽니다. 나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by 곽선희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집 “교회의 권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