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쿼바디스를 통해 본 한국 교회의 절망적인 현실과 한줄기 소망

대한민국의 대형교회들의 행태로 기독교를 정면 비판한 영화 ‘쿼바디스’를 봤습니다. 저같은 류의 기독교인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었으나.. (오랜동안,, 내부에서 제대로 경험하고 알고 있어서 더 잘안다는 의미)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내용전개가,, 자문을 제대로 받아서 인지 감독과 연출자가 기독교를 제대로 알고 비판해서인지,, 기독교의 본질에 비추어서 비판하는 부분까지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고발자의 시각과 내용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수만번 반복했던 생각이지만 또 한번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저런 모습들은 어떻게 그렇게 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건가? 라는 생각도,,)추려보자면,,,제 안에서 수만번 물어왔던 물음은 “왜” 와 “어떻게 가능” 두가지 였습니다, 제 안의 대답은 또한번 반복되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꿈꾸고 사랑하는 것이다.” (저들은 예수를 알지도…알수도 없다.)

어느 신학교수의 인터뷰? 중 생각나는 내용은 대충,,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서 교회성장을 이룬 교회”,, 였는데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않아서 죽임을 당한 예수가 떠오르더군요,,자신을 죽여야 거듭남이 가능한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해서 부정하면서 성장하는 구약의 ‘성전’ 같은 반기독교적 교회가 과연  교회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뭔가 불완전한,, 그리고 결핍된,, 모자라는 교회는 교회일 수도 있으나,,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하고 예수가 나타나도 자기나라를 위해 예수를 또한번 죽일자들은,,,의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라는 판단을 해봤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진심으로 분노하는 건,,사회에서 나타나는 온갖 부정부패 범죄가,,,정치,,가 아니라,,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들,,, 입니다. 차라리 그냥 채우면,,,그러려니 하죠,,,인간이니,,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탐욕과 자신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들은,, 제가 생각하는 인류 최강의 사기꾼이요,악질범죄자 입니다.

 여튼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저같은 놈도 이건 아닌데 할 수 있는데 ,,어떤 놈들이길래,,저런게 가능한건지,,ㅠㅜ,,) 정말 못났지만,, ,, 정말 분노하고 .,,한편으론 부끄럽습니다,,

by 이글은 에세랄클럽의 ZION님이 작성하셨습니다.

영화 쿼바디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참 고민이 많습니다. 진정 이 시대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건가. 예수를 살아낸다는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걸까. 분명 그토록 사랑하사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그 사랑을 입은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건지. 피지도 못한 꽃들이 백여명이 넘게 바다에 생매장 당한지 일년째인데 과연 예수의 제자라 하는 우리는 무얼 한건지.. 문둥병자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던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유산이 고작 건물과 사람 가득찬 교회는 아닐진대.. 그 정신은 어디가고 이렇게 찌질하게 예수를 믿고 있는건지..그나마 위안되는건 작은 자 약한 자 미련한 자를 통해 일하신다는 말씀인거 같습니다.힘내봅시다^^…..(제로스 헬리엇)
영화 ‘쿼바디스’가 사회적으로 그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보여주기 싫은 보기싫은 뱃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할까요? 그 때문에 기독교인들조차 기독교인인 것이 창피하게 느끼고 있고, 어떤 이는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우리의 치부를 알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고 회개하고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신 것처럼 그저 우리는 계속해서 개혁하고 또 개혁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며, 그리스도인 다운 길입니다. (코이네)

 

평탄한 삶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고난의 귀한 열매

우리 인생에 형통의 때와 곤고함의 때를 겸하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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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이 만약에 소금에 절여지고 냉동에 들어가는 고통이 없다면 썩고 말 것 이라는 어느 시인의 글귀처럼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없다면 사람도 역시 부패하고 썩어지고 말 것이다. 인생에게 저마다 말 못할 고난이 있고 감당해야 할 짐들이 있는데 그것을 마냥 불평하고 감당해 내지를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고난을 통과한 인내의 사람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삶의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있고 그가 감당하여야 할 삶의 무게들이 있다.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나는 단 한 번도 고난을 경험해 본적이 없다”고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 때가 되지 못하였거나 그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지나가는 어떤 삶의 경험이겠거니 라고 생각하는 긍정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일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이런 사람은 고난도 즐길 줄을 아는 대범한 사람이거나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삶의 무게로 짓눌려져 올 때 대처하는 방법을 보면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의 태도를 통해 그 사람을 알아 낼 수가 있다. 주님께서 인생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자녀로 하여금 고통에 빠져 괴로워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인내로 통과함으로 인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심과 또 그 결과물로 얻어지는 열매들을 기대하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바른 길로 성장시키기 위해 사랑의 매를 들듯이 주님도 우리들에게 자녀의 삶을 살고 당신을 향한 바른 뜻을 찾도록 인도하시기 위해 풀무 불에 담그실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과한 자녀에게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빛이 나온다.
금이 불에 연단되어 불순물이 없는 깨끗한 정금이 되어 나오듯이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를 그렇게 다루실 때가 있는 것이다.

삶의 평탄한 길에서는 절대로 얻어질 수 없는 그러한 귀한 열매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우리의 삶이 소금에 절여지고 냉장에 들어간 생선처럼 고통을 통과하면 우리의 영이 썩지 않고 신선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 고통도 없이 평탄하게 살아만 간다면 영은 세상과 타협하여 영적인 타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시편기자는 고백하기를 주님께서 인생들에게 형통의 때와 곤고한 때를 겸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였다. 형통만 하면 썩어질 세상 것들로 인하여 썩어질 것이요 곤고하기만 하면 또 쓰러질 인생들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골고루 섞어서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삶에 주어진 두 길이라면 형통함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고 고난은 기도로 승화시켜 그분의 뜻을 깨닫는 성찰의 시간으로 삼아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얻을수 있는 귀한 체험을 통해 결실을 맺으라는 것이다.

그 진리가 깨달아 지는 사람은 그것을 삶에 적용시키고 반드시 그것을 통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 확신해본다. 우리의 영이 썩지 아니할 인생을 살아가도록 우리 삶에 허락하신 그 고난의 때를 허락하신 주님을 기뻐하고 그 분이 허락하신 인생을 감사하며 내게 주어진 시간만큼 최선을 다해 그 시간들을 살아내는 인생이 되어야 함을 또 다시 깨달으며 하루의 시작의 문을 감사함으로 열어본다….
우리 인생에 형통의 때와 곤고함의 때를 겸하여 주신다….

이미례by Mirye Lee

이미례님은 플로리다선교리포트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떠나야 성공한다

사람은 가까이 갈수록 실망이 더욱 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런 결점과 실망스런 모습을 보고 실망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도울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긍휼의 마음을 갖고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약점을 비난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하기에 서로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떠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요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내가 떠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 즉 버려야 하는 것, 가지고 가지 않고, 두고 가야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새로운 목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의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거하는 것은 갈대아 우르 지방으로 우리가 잘 아는 문명의 발생지이고, 엄청나게 비옥한 땅이어서 농사도 잘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족장정도의 지위를 가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 그리고 안정되고 높은 지위가 보장된 그런 곳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 두고 가야할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얻을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다른 부연 설명이 없습니다. 그냥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 땅이 얼마나 비옥하다느니 가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느니 그런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났습니다.

자기 주도형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할 때 내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사명이 주어지면 일을 한답니다. 친화형의 사람들은 누구와 함께 하는가? 예를 들어 가나안 땅에 네가 좋아하는 누구도 간다더라 그러면 간답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일을 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은 옆에서 세게 이끌면 간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령하시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 땅이 얼마나 좋고 거기서 살면 지금보다 어떻게 좋다는 것이 아니라, 떠나면 내가 네게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첫째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왜 떠나라고 하시나요? 여기 머물러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 바로 큰 민족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땅으로 널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즉 네가 복이 되어서 너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이 너때문에 복을 받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종의 안보협약을 맺으십니다. 널 축복하면 내가 그를 축복할 것이요, 널 저주하면 그 저주가 저주한 자에게 돌아가도록 손봐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겠다, 하나님의 뜻인지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스스로 속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주저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안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야 해볼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이 있으면 그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순종하며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더욱 깊은 신뢰의 관계를 쌓으세요. 더욱 깊고 성숙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인생을 장막을 걷는다는 표현으로 하고 있습니다. 장막이란 텐트입니다. 한번 쳐놓으면 사시사철 눈이 오고 비가 오더라도 그대로 있는 집이 아닌, 때가 되면 걷어서 옮겨야할 것이 장막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이런 장막에 묘사하며 때가 되면 옮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사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움직일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무엇이냐? 잘 옮길 줄 아는 것입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그리스도인이여 경계선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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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생활의 세가지 유형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세 가지 유형의 신앙이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유형은 교회중심의 교회생활이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세상 < 나 교회(하나님) >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변화산상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내려가자고 하신 것처럼 그저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신앙이 더 성장할 수 없다.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이 건강한 신앙생활은 아니다.

둘째 유형은 세상중심의 교회생활이다.

 <세상 나 > 교회(하나님)

내 중심에 하나님보다는 늘 세상에 관심이 더 많다. 돈 버는 것에 관심이 많고 노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런 유형의 교회생활은 교회가 별로 재미가 없다. 교인들이 답답해보이고 조금은 갑갑해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어리석어보이기도 하고 한심하기까지 해 보인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너무도 재미있고 자유로운데 교회에 오면 하지말라는 것 투성이어서 교회만 오면 숨이 막힐 것 같다.

셋째 유형이 경계선에 있는 교회생활이다.

 <세상 <나> 교회(하나님)>

여러분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주님을 믿으려면 “세상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세상속으로 죽어도 안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진짜 예수를 믿는 것은 그들과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어야 그게 진짜 예수쟁이이다.
건강한 신앙은 세상과 하나님나라사이 즉 경계선상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가장 어장이 풍부한 곳이 어디인줄 아는가?
민물의 멋진 냇가도 아니고 반대로 망망한 바다도 아니다. 가장 어장이 풍부한 곳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멋지게 살아야 할 장소는 교회안에서의 삶이 아니다. 반대로 세상도 아니다. 세상과 교회의 경계선상에서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진짜 그릭스도인이 최고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비난을 받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선이다. 그 독선은 비그리스도인을 불신자라고 배척하는 것에 절정을 이룬다. 지금은 내 가족이, 내 친구가 안 믿는 비그리스도인지만 사실은 그 사람은 非그리스도인 아니라 未그리스도인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최선을 다해 친절을 베풀고 섬겨야 한다. 누차 이야기했듯이 타종교인들에게는 더욱 더 예의를 갖추어서 대해주어야 한다.

고형진목사by고형진 목사

고형진목사는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현재 강남동산교회 담임목사입니다.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발견되는 핵심 키워드

중부교회기독교와 교회의 존재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복음”이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정신으로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에 따라 기독교가 기독교가 될 수도 있고, 앤티 크리스쳔anti-Christian들이 비아냥 거리는 개독교로 전락할 수 있다.

복음의 정신에 사로잡힌 자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핵심키워드가 있다. “스며듦과 자기소멸”이다.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스며들기 위해선 자기소멸이 있어야 한다. 자기소멸, 혹은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이 없이는 스며들 수가 없다.

또 다른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일관성과 진정성(한 결 같음)”이다. 이 둘은 스며듦, 또는 소통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마음과 생각, 헌신의 결이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거나 이해타산을 따진 흔적이 있다면, 소통은 결국 실패한다. 스며듦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는 커녕 또 다른 불신과 부패를 양산할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이 이가 아닐까?

고병호목사by 고병호 목사 (발안반석교회 담임목사)

우리교회 청년, 동원이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 “그늘”에서… 근데 오늘 따라 에스프레소가 왜 이리 쓰지?, 동원아, 그래도 맛있다…축복한다.

생동감 넘치는 살아있는 예배를 위한 실험

전 요즘 온전한 예배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정말 하나님께서 임재해계신 그 체험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과 그 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순종하고 싶고
하나님이 절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온 몸과 마음과 영으로 느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예배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먼저 성도간의 축복과 사랑의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몸풀기 체조를 합니다. 몸과 정신을 각성시켜서 예배에 집중하려고
하는 몸부림이죠. 그런데 이것도 반발이 만만찮습니다.
예배의 경건을 해친다며 하도 말들이 많아서 지금은 아주 간단하게 합니다.

예배 첫 순서에 찬양을 세 곡 이어서 부릅니다.
세 곡 부르는데 15분정도 소요됩니다. 한곡을 몇번 반복해서 부르죠.
찬송가도 부르고, CCM도 부릅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5곡을 불렀는데, 우리 교인들 중 연세많으신 분들이 많아
5곡을 이어 부르는 것은 체력적으로 무리가 있더군요.
그래서 이것도 3곡으로 줄인 것입니다.

찬양이 끝나면 바로 통성기도로 들어갑니다.
그리 크게 소리 높이진 않지만 진지하게 뜨겁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죠.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난 후
여기가 장로교회가 맞냐고 묻는 분도 있습니다.
신선하고 참 좋았다는 분도 있고, 적응이 안된다는 분도 있습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예배를 한 두시간 드리고 싶은데
아마 그렇게 하면 남아 있는 교인들 몇 사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일 주님 앞에 왔는데 왜 그리 시간에 모두 매여 살아가는지..

그래도 하나님과 온전히 소통하는 예배를 위한
실험은 제가 목회하고 있는 동안 계속 될 것입니다.
완벽한 예배 순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전 보다 더욱 진실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는 생동감이 넘치는 예배
그렇게 예배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정은 더욱 커져야 합니다.

오늘도 모든 교회 활동을 마친 후
예배당 청소를 하곤,주님께 물어봤습니다.
“주님, 우리가 드리는 예배 때문에 행복하셨습니까?”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충고의 법칙, 약보다 음식이다

충고로 사람이 변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남에게 충고했다가 관계가 나빠진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충고는 쓴 약과 같습니다.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약을 기꺼이 삼키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충고가 약과 같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약은 식후에 먹으라고 권합니다. 위에 음식이 없이 약만 들어가면 오히려 몸이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충고도 이와 같습니다.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그러나 쓴 약입니다. 음식은 좋은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자주 나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칭찬해 주는 사람이 가끔씩 따끔한 충고를 할 때, 우리는 힘들지만 받아들이려 노력합니다.

좋은 음식을 지속적으로 먹으면 약 먹을 일이 줄어 든다고 하지요. 심지어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 눈에 들어오고 충고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마다 생각하세요. 약보다 음식이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세요. 그러면, 내가 그렇게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그냥 지나가면서 한 말도 그 사람이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by 박영호 목사
w박영호목사박영호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미국 시카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시카코에 있는 ‘약속의 교회 PNF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삭개오에게 배워야 할 변화의 영성

알아 맞춰보세요.
사진 속 아래 3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목사3인
목사가 되어서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3인, 서세원, 이근안, 용팔이

‘목사’입니다.
이 3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아시죠?
코미디언 서세원, 고문 기술자 이근안 그리고 용팔이입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인생 뒤늦게 예수를 알게 되어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목사가 되었는데, 삶은 이전과 달라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 권력에 기대어 백성들을 착취하던 세리장 삭개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삶이 변화 되었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지난날 자신이 착취한 사람에게 4배로 갚겠다고
어제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변화했습니다.

특이하게도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제자의 길을 가겠다고 예수를 따라 나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나눔의 삶을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남의 것을 착취하던 불의한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고 각오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체험을 하면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목사는 되었는데, 마음의 욕심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직업은 바뀌었지만, 탐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직업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삶의 내용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사람이 변화합니다.
추구하던 가치가 변화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넘쳐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도 가득합니다.
그런데 변화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마음, 예수의 가치, 예수의 길을 따라 나서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며
내 배를 가득 채워줄 예수만을 원하고 있을뿐입니다.

탐욕과 거짓을 버리고, 낮아짐의 길을 간 예수를 따르는
버림의 영성, 변화의 영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by최병성 목사

최병성목사최병성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초록별생명평화연구소. 초록별생명평화교회의 머슴을 자처하고 있는, 환경운동가이다.

 

결혼의 정의를 ‘두 사람의 연합’으로 바꾼 미국장로교총회 성경적인 결정인가?

한인 교회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는 미국 장로교회 총회에서 결혼의 정의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 에서 “두 사람의 연합”으로 바꾼다는 결정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어제의 일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새삼 놀라운 것은 이 사실을 알리는 미국인 친구들의 페북 포스팅 중에 기쁨과 환희와 감사에 찬 것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약한 자를 차별하는 교회의 어리석고 못된 행습을 고치는 귀한 일에 큰 진보를 이룬 쾌거로 여기고 있습니다.

오랫 동안 동성 결혼 문제를 놓고 씨름하면서, 양 극단을 피하고 책임적인 자세를 모색하던 이들의 팔 다리에 힘을 쭉 빠지게 하는 일입니다.

호모포비아는 안 됩니다. 동성 연애자들이 문화적 소수자들인 시절, 그 많은 hate crime 들, 억압과 차별들, 그들을 소외시키던 말과 행동들의 뒤에 보수적 기독교의 책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방조하거나, 묵과 혹은 은근히 동조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쪽 극단이 안 된다면, 다른 쪽 극단도 옳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성경에 명시적으로 동성간의 성관계에 대한 반대가 있는 한, 이런 계명에 대한 순종을 포기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책임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저는 동성 결혼에 찬성하지 않지만, 찬성하는 사람들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사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는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비웃으며, 동성 결혼 인정이 역사의 진보요 진리의 승리라고 쉽게 단정짓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사실에 다시 놀랍니다. 이 부분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도 없는 사람들이 목회자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들고 강단에 서는 것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호모포비아가 극단이라면, 이들은 다른 극단입니다. 적어도 성경을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 내에서는 그렇습니다.

한 극단의 야만성을 경계한다면, 다른 극단의 폭압성 또한 주의해야 합니다. 한 극단은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고, 다른 한 극단은 관용의 사람들로 높이는 고약한 프레임에 미국 교회가 걸려 있습니다.

아픈 마음을 부여 잡고, 오늘 아침에 시편 85 편을 묵상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이후,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던 시대에 길을 찾는 시인의 기도에 하나님은 이런 응답을 하십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인애와 관용을 가지며 동시에 진리를 지키는 것이 힘들어, 아니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입니다.정의와 화평은 늘 따로 노는 것이 이 세상이더라, 우리는 경험해 보아서 압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약속하셨으니, 다시 이 말씀 의지해 보려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만난 교회, 그러나 말씀대로 살려는 몸부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은 인애와 진라가 같이 만나는 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줄 믿습니다.

P. S. 제가 포스팅 한 후 유승원 목사님께서 “두 사람 사이, 전통적으로는 한 남자와 여자 사이였음” 가 정확한 워딩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래 댓글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bw박영호목사y 박영호 목사

*박영호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미국 시카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시카코에 있는 ‘약속의 교회 PNF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거듭나는 인생 그 변화의 핵심은 무한히 하나님 편에 서는 것

예수님 당시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 정부의 고위관료였고, 영혼의 구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물었고,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여기 물음과 답변에 조금의 간격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구원을 물었더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대답하셨다. 즉 구원받은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이지만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에 대해 니고데모는 육체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의문을 제기한다. 우린 쉽게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와 달라서 이런 식의 생각을 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에게 이는 죄인 된 사람의 근본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영혼의 내면에서 시작하여 외면으로 변화되는 것이라 설명한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이 말은 세례와 성령의 임재가 새 사람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또한 그 마음이 예전에 더렵혀진 죄인의 자아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의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런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으며,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씀한다.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변화를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 변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첫 시작이다. 그 변화의 시작을 하면 우리의 내면은 치열한 영적인 전쟁터가 된다. 우리를 온전히 변화시키려는 성령님과 예전의 정욕과 죄의 욕심을 따라 살려는 옛 자아가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갈등 속에서 우리는 무한히 하나님 편에 서야한다. 때때로 실패하여 다시 옛 습관 속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변화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이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번번이 실패하는 우리를 끝까지 용납하시고, 우리가 마침내 승리하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신다. 우리는 그런 전쟁을 평생 치루지만, 실패하고 넘어진 수만큼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백성으로 변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서는 선택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음도 느낄 것이다. 처음 전쟁을 치를 때에는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정말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지금은 하나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더 힘들어지고, 죄를 짓는 것이 더 힘들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죄짓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죄 짓는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더 없이 행복한 인생으로 보인다면, 당신은 거듭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