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재균 목사님 ‘내겐 큰 바위 얼굴 같은 분’

참으로 존경스러운 목사님
(큰 바위 얼굴 같으신 분)
 
고 최재균 목사

대단한 목사들이 많았다.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은 정치꾼 같은 목사도 많이 만났고, 탁월한 기업가 같으신 목사도 많았고, 어떤 웅변가 보다 더 말을 잘하는 달변가이신 목사도 많았다.

이런 은사(?)들이 꼭 나쁘다고 꼬집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교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필요악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마음속으로 크게 존경하고 흉내라도 내고 싶어하는 (고)최재균 목사님은 위의 경우와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죄송하지만 그 분의 설교는 심금을 울리는 큰 이벤트는 없으셨다(죄송합니다만 교인들도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분은 교계의 정치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사셨으며, 그 분은 어쩌다 노회에서 발언을 해도 이 쪽 저 쪽을 다 정신 차리게 하는 말씀만 골라서 하셨지만 삶으로 보여주신 참 어른이셨다.
 
1. 그 분은 나의 전임자이시다.
밀양마산교회에서 19년을 목회하시고 정년 은퇴를 하실 때에 노회원들이 만장일치로 공로목사로 추대하셨는데 거목 같은 어른이 은퇴하는 그 해에 34살의 새파란 애송이가 교회 역사 100년을 넘긴 교회의 후임이 되었다. 그것도 목사안수 받고 딱 일 년이 지난 내가 그 곳에서 목회할 때에 그나마 살아 남을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큰 도움을 주셨던 분이셨다.
 
2. 목사님은 시찰과 노회의 전도사님이 신학교를 졸업하면 일부러 졸업식장에 찾아 가셔서 졸업 축금을 전해 주시고 환하게 웃으시면서 축하를 해 주셨다. 봉투는 전해 줄 수 있지만 그 먼 거리를 찾아 가신다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 했으리라 시찰과 노회로 모일 때에는 항상 30분쯤 먼저 오시어서 자리에 앉아 계셨다
 
3. 그 분의 은퇴는 한 폭의 명화와 같았다.
여기서 명화라는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치가 있어 보였다는 말이다. 시골교회에서 은퇴하시는 목사님의 지갑에 얼마나 있었을까마는 은퇴하시면서 교회건축을 위해서 거액을 헌금하셨고, 목회하실 때에 타고 다녔던 자가용(당시에는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을 사랑하는 장로님에게 기꺼이 주고 가셨다. 물론 승용차를 받은 장로님도 목사님의 영성이 베여있는 것이라고 기꺼이 받으셨고 애지중지 하셨다.
 
4. 후임이 되어서 교회의 재정을 보니 100주년 기념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일정 금액을 모아 두었다(당시로서는 제법 큰 금액임) 나는 목사님의 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고 교회에서 은퇴하시는 목사님에게 아무것도 해 드린 일이 없었는데 이 돈으로 건축할 수 없다고 교인들을 설득해서 목사님께 드리고 우리가 힘껏 헌금해서 건축하자고 했는데 목사님이 받지 않으셔서 그 돈을 따로 통장을 만들어서 목사님 앞으로 해 드렸는데 끝내 그 돈을 쓰지 않으셨다. 그래서 목사님의 생활비를 적은 액수이지만 매월 해 드렸다
 
5. 목사님은 자녀가 없으셔서 양녀를 입양했는데 나중에 그 딸이 자신의 친부모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친부모는 모시지 않고 목사님과 사모님을 천국가는 그 날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 말하기를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는데 참사랑은 피보다 훨씬 더 찐하더라
 
6. 목사님은 고향이 북한이고 북한에 동생들도 살고 있다고 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을 때에 왠만한 어른들이 여행을 갈 때에 우리교회에서 목사님께 당연히 관광을 시켜 드릴려고 했는데 거절하셨다, 말씀하시기를 천목사는 빨갱이를 몰라서 그래.. 나는 그 놈들이 총알 사는 일에 절대 돕지 않을거라고 끝끝내 금강산 여행을 가지 않으셨다.
 
7. 목사님은 은퇴하시면서 선언하시기를 “나는 은퇴와 더불어서 이 교회에 와서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설교뿐 아니라 대표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설교를 하거나 기도를 하면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오해할 수 있고 그러면 천목사가 힘들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말씀 그대로 여러 번 사적 공적으로 부탁을 드렸지만 축도는 하셨지만 설교와 대표 기도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8. 후임자인 내가 넓은 땅과 당시로서는 큰 건물의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 반대하는 장로님과 교인들은 전임자인 목사님께 찾아 가기도 하고 전화를 드리기도 해서 젊은 목사가 주제넘게 일을 크게 벌린다고 목사님께서 조언을 해 주십샤 하는 부탁을 드릴 때 마다 들려 온 이야기는 나는 나이만 먹었지 천목사 만큼의 능력이 안되는 사람이니까 두 번 다시 내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하셨단다(정이 들었던 교인들에게 그런 말씀 하시기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텐데) 그 때 마다 내공이 없었던 30대의 풋내기 천목사가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9. 어쩌다 교회 장로님과 어른들의 가정에 경조사가 있어서 교회 가까이 오실 때에는 그 분들을 만나기 전에 항상 내게 먼저 찾아 오셔서 어떤 어떤 일로 오셨고 언제까지 있다 갈것이라고 일정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곤 하셨다.
 
10. 나는 그 곳에서도 지금의 교회에서도 큰 건축을 하느라고 늘 돈에 쫒기는 삶을 살았다.(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 때에 어쩌다 부흥회를 인도하거나 강의를 할 일이 있어서 별도의 수입이 생겼을 때에 목사님께 용돈을 드리곤 했었는데 그렇게 기뻐하시면서 기도해 주셨다 돈이 아니라 내 마음을 그렇게 기쁘게 받아주셨기에 깊은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요즘 같으면 넉넉히 드릴 수 있는 형편인데 목사님은 이제 안 계신다.ㅠㅠ
 
☆ 살아 보니 어른스러움이란 탁월함이나 대단한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 않으려 함에 있는 것 같더라 배역이 끝나면 무대에서 내려서서 새로운 인물을 향하여 말없이 응원해 주는 것이 진정한 어른인 것 같더라 그 분의 시대에서는 불호령을 내리고 때로는 내 사람을 모아서 전략을 짤 수 있었겠지만 이제 역할이 끝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어히 무대에 자꾸 올라간다면 어찌 또 한 편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으랴? 어르신의 삶을 떠 올리면서 이제 얼마남지 않은 천목사에게 스스로 다짐하면서 큰 바위 얼굴 같으셨던 그 분이 나의 전임자였던 것은 나 만이 누릴 수 있는 큰 복이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앞 세대에는 귀한 목사님이 참 많으셨다. 우리는?
 
 
by 천석길 목사 (구미남교회 담임목사)
 
 
 

** 최재균 목사 별세 **

경남중부노회 공로목사인 최재균 목사가 2022년 6월 4일(토) 오후 3시 15분 조은강안병원〔부산시 수영구 수영로 493(남천동)〕에서 별세했다. 향년 99세. 빈소는 조은강안병원 장례식장 7호 특실에 마련됐다. 입관예식(예배)이 6월 5일(주일) 오후 3시 30분, 천국환송예배가 6일(월) 오전 9시 조은강안병원 장례식장 7호 특실에서 각각 이뤄질 예정이다. 하관예식(예배)은 6일(월) 오전 11시 부활동산(마산리 선영)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사랑의 치유자로 알려진 고 최재균 목사는 1925년 10월 11일 평북 의주군 백마 출생이며, 4년 2개월 간 군 복무와 함께 화랑무공훈장을 추서받았다. 최 목사는 1967년 고려신학교를 22회 졸업한 후 가덕교회, 예수리교회, 유어교회, 구지교회를 시무하고, 마지막으로 밀양마산교회(현 무지개전원교회) 제23대 담임목사(1978.10.19.~1995.4.4.)로 섬겼다. 1995년 4월 4일 은퇴와 함께 같은 해 4월 26일 경남중부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됐다.
출처 : 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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