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와 이기적 신앙의 그림자

야베스의 기도와 이기적 신앙의 그림자

이스라엘에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열두 지파 중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누가 선봉에 나서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지파가 나서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울며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졌습니다. 세 번째에는 금식하며 기도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 Read more

기도에 관한 성경말씀 신약성경 60구절

기도에 관한 성경말씀 신약성경 60구절

성경에서는 “기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기도와 관련된 구절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기도에 관한 성경구절 61가지입니다.    기도 신약성경 성경구절   1) 마태복음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 마태복음 6:6~7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 Read more

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야 하는가?

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야 하는가?

골방     성전이 무너진 후 유대인들은 신앙생활의 구심점을 성전에서 가정으로 옮겼다. 이제는 가정이 성전의 역할을 하는 곳이 된 것이다. 가정이 곧 성전이 된 것이다. 더 이상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가정에서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것이 성전에서 바치던 희생제물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단순한 가장이 아니라 성전에서의 제사장을 대신하는 … Read more

기도는 생활을 변화시키고 생활을 창조한다

  기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영적 생활의 최전방에서 서게 한다. 기도는 답사하지 않은 영토를 최초로 답사하는 것이다. 명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내적 삶 속에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금식은 하나의 부수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 심령의 가장 깊고 가장 높은 행위 속에 들어가게 하는 기도의 “훈련”(실제의 체험) 그 자체이다. 진정한 기도는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또 생활을 … Read more

1세기 유대인들은 어떻게 기도했을까?

1 세기 유대인들의 기도 형태와 그 의미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에 힘썼는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의 지침은 구약성경에서 찾았다. 유대와 각지에 흩어진 그들은 시편을 기도의 교과서로 삼았다. 사해 사본이나 외경(the Apocrypha)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기도 내용과 형식은 계속 변했었다. 세대 간에 아무 변함없이 고정된 기도 양식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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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기도(Temple Prayers)

이사야 시절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었고(사56:7) 예수님도 그 점을 강조했다.(마 21:13) 매일 제 3시(오전 9시)와 제 6시(오후 3시), 오전과 오후에 번제가 드려질 때에 그들은 성전에 공중 기도로 모였다. 특히 오후 번제는 “기도하는 시간”(행3:1)으로 불릴 만큼 기도에 집중했다.

회당 기도(Synagogue Prayers)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 시절 이후 각지에 세워진 회당에서 안식일과 각 절기를 지켰는데 특별히 경전을 읽으며 열심히 기도했다. 고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회당을 단순히 “기도집”(the Prayer-house)으로 칭하기도 했다. 기도는 회당장이 지명한 사람이 대표로 먼저 기도하면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느8:6, 고전14:16). 또 회당기도는 반드시 선채로 행해졌다.(마6:5)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으로 시작해 용서와 치유를 간구하는 내용이 기도에 포함되었다.

주후 100 년경에는 18개의 구절들이 각기 “하나님께 복이 있을지어다”(Blessed are you, Lord.)로 끝나기에 통칭 “18 가지 축도”(히브리어: Shemoneh Esreh)로 불리는 공식기도문이 형성되었다. 또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나라를 소망하는 내용의 회당송영(히브리어: Qaddish)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초기의 Qaddish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신의 뜻에 따라 창조한 이 세상 가운데서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높이고 경배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당신의 생전에, 당신의 때에, 또 온 이스라엘 집의 생전에, 그리고 가까운 시간 안에 세워지기를 간구합니다.”

이런 Qaddish가 예수님이 가르친 주기도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을 것이다.

쿰란 공동체의 기도(Prayers at Qumran)

사해사본을 기록한 쿰란 공동체의 정기 예배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문서에는 기도가 많이 나타난다. 필사문서 형태로 축도, 동의(amens), 간구, 고백 등이 남아 있다. 그들은 성전 제사를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했기에, “입술의 제물은 의인의 향기로운 제사와 같으니”라고 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동물 희생을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매일의 개인적 기도(Daily Personal Prayers)

신명기 6:7은 이스라엘 백성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도록 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 말씀은 쉐마로 불리는 “이스라엘아 들으라(히브리어:Shema)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히6:4)를 말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쉐마는 완전히 유대인들의 일상 관습이었다고 한다. 또 매일 새벽과 누워 자기 전 두 번씩 출애굽의 구원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며 감사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소년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즉시 쉐마를 배우게 했고 또 12살이 되면 규칙적으로 반복 암송하며 기도하게 했다. 여자와 유아와 노예는 쉐마 암송의 의무에서 제외 되었다.

다니엘의 예(단6:10,13)에서 보듯이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 특별히 성전의 오후 제사 시간은 개인적인 기도로 보냈다. 고넬료 같이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들도 정기적 기도 습관을 지켰다.(행10:1-3) 신약성경과는 별도로 기록된 초기 기독교 문서에는 초대교회 교인들도 하루 세 번씩 기도했는데 쉐마 대신에 주기도문으로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관습에 정통한 학자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해 뜰 때, 성전제사 시간인 오후 세시, 그리고 해 질 때, 하루 세 번 씩 쉐마를 암송한 후에 기도를 했다고 한다.

경건한 유대 가정에선 신명기 8:10(“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에 근거하여 식사 때마다 기도했는데, 특별히 쿰란 공동체는 더 철저했다. 예수님도 이 관습을 따랐음이 분명하며(막6:41) 초기 기독교인들도 그러했다.(고전10:30) 통상적인 식사기도는 “이 땅에 양식을 주신 주께 복이 있음이여!”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눈물샘이 막힌 아기 위한 엄마의 40일 새벽기도 그리고 기적

눈물샘이 막힌 아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기적

울 막내를 낳았는데, 3가지 이상 증세를 가지고 태어 났습니다. 하나는 후두연화증이라는 것인데, 후두가 기형으로 아주 좁고 약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숨을 쉴 때마다 호랑이가 어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답니다. 두번째는 아토피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돌이 지나서 꽤 오랫동안 아토피로 고생을 했답니다. 세번째는 눈물샘이 막혔네요. 하지만 감사하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다 고쳐졌답니다.

오늘은 울 둘째 막힌 눈물샘을 다시 뚫은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눈에는 눈물이 나오는 곳과 나온 눈물이 다시 흘러 어가는 곳이 있답니다. 울지 않아도 눈물이 일정하게 나오고 흘러가서 눈을 지켜주는 것이지요. 울 막내 병원에 항상 우는 것처럼 눈물이 밖으로  흘러 나오고. 또 그렇게 눈물이 눈에 항상 고여 있기 때문에 눈에 염증이 자주 생깁니다. 그리고 눈이 아파 보이며, 눈꼽이 자주 생겼습니다. 이럴 때 코와 눈 사이를 잘 내리듯이 만져주면 눈물샘이 저절로 뚫어지기도 한다고 해서 정말 많이 만져주었습니다. 그런데 100일이 지나도 아이의 눈물샘은 뚫리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을 잡아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아이가 이제 겨우 100일쯤 된 날이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정말 눈물샘이 막힌 것이 맞는지 확인을 한다며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더군요. 아이가 움직이면 안된다구요. 저는 그분 말씀처럼 그저 확인만하는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 긴바늘 같은 것으로 아이의 눈물샘을 뚫는 수술을 해버리시더군요. 정말 어이가 없고, 아파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런 저에게 의사선생님, 너무도 태연한 표정으로 100일 지나도 뚫리지 않으면 뚫어야 하는 것이라며 수술을 하셨답니다. 그저 잠이 드는 수면제를 먹였고, 마취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기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정말 경기 들린 아이처럼 피눈물을 쏟아가며 울고 있는데 정말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그나마 수술이 성공했다면 좋았을 것인데, 한쪽 눈은 뚫렸지만 한 쪽은 여전히 막혀있다고 합니다.

수술 한 뒤 우리 아이 잠을 자지 못하네요. 낮에도 밤에도 잠을 견딜 수 없어 연신 고개를 떨구면서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수술할 때 수면제로 잠은 재웠지만 그 고통이 얼만큼 컸겠습니까? 그런 아픈 기억이 남아있어 아마 잠이 들면 또 그런 심한 고통이 올까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수술하기 전에는 밤 10시도 되기 전에 잠이 들었는데, 수술이후에는 새벽 2시가 지나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아니 잠을 참는 것이죠. 그렇게 힘들어 하는 아이를 보며 모두 제 잘못인 것 같아 저는 또 죄책감에 시다려야했구요. 그래서 저는 10시가 지나면 아이를 업고 찬양을 불러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새벽2시가 지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 잠이 들었답니다.

그런 어려움이 계속 되는 순간에도 아이의 한쪽 눈은 여전히 그전처럼 눈꼽이 끼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또 한 마디씩 거들더군요. 그 일 때문에 속상해도 제가 제일 속상한데, 남의 일이라도 왜 그리 무심히 말을 하는지, 정말 아무 생각없이 아이가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하듯이 제 마음엔 그렇게 던져진 말들로 인해 시퍼렇게 멍이 들어갔습니다. 그저 기도만 해주면 좋은데 말입니다.

의사와 다시 상담을 했습니다. 수술하면 이번엔 확실하게 치료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 의사는 그런 저의 기대를 완전 저버리더군요. 수술을 다시 한다고 해도 뚫린다는 보장이 없다네요. 뚫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아주 애매한 말만 늘어놓고 선택은 저보고 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저는 먼저 하나님과 상의해보자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40일 새벽기도를 작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직접 뚫어 주시든지 아니면 수술을 하더라도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저의 이런 결심은 너무 큰 장애가 놓여 있었습니다. 새벽 5시에 교회에 가려면 최소한 밤10시에는 잠이 들어야 하는데, 우리 아이 그런 엄마의 사정도 모르는 채 여전히 견디다 못해 한계가 와야 잠이 들었답니다. 아이를 업고 재우다가 깜박 잠이 들어 넘어진 적도 몇번 있었구요, 그러게 힘들게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저는 겨우 2-3시간 자고 일어나 새벽기도회에 갔답니다. 저는 정말 잠이 많거든요. 지금 생각해봐도 초인적이었다 싶습니다. 엄마란 게 무엇인지.. 어떨 땐 벨 소리도 듣지 못해 그냥 잠이 든 적도 몇번 있었지만  제 나름으로 온 힘을 기울여 새벽기도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40일이 지났습니다. 40일이 가까워와도 우리 아이 별 다른 변화가 없더군요.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꼽이 끼어있었고, 새벽까지 견디다 잠이 드는 일상이 그렇게 반복되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새벽기도 40일을 거의 채운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눈에 눈꼽이 끼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놀랍고 기쁜 마음에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더니 눈물샘이 뚫렸다네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간에 고생한 것과 또 우리 아기 그렇게 힘들었던 그 시간이 주마등처럼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정말 교회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잠드는 것을 힘들어 했던 울 아기 차츰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이전처럼 정상적으로 잠을 자게 되더군요. 지금은 언제 내가 그런 일을 겪었냐는듯이 아주 밝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올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성경 말씀에 고난과 어려움이 클수록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정말 실감납니다. 네  아이 중에서 제일 힘들게 했던 울 막내이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기쁨과 사랑을 준 소중한 아이거든요. ㅎㅎ 사랑해~~~ ^^

by우리밀맘마

(우리밀맘마님은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교사이며, 블로그 “행복한맘’s”의 운영자입니다.

 

미국 대법원 공공기관에서 기도하는 것 합헌 결정

 美 연방대법원, “공공기관에서의 기도는 합헌” 판결

 2014.05.07 크리스천투데이의 기사를 인용합니다.

공공기관에서 각종 모임 전에 기도를 하는 것은 합헌이라고 연방대법원이 5일(현지시각) 판결했다. 기도 자체가 합헌일 뿐 아니라, 기도의 내용이 특정 종교에 편향돼 있더라도 무방하다고도 했다. 1983년 ‘마쉬 대 챔버스 소송’(Marsh v. Chambers) 이후 30여년 만의 ‘그리스 대 갤로웨이’(Greece v. Galloway) 소송에서도 연방대법원이 기도할 권리를 보장하면서, 이 문제로 인해 몸살을 앓던 공공기관들이 환호하고 있다.

뉴욕 주 그리스 시는 타운홀 미팅 때마다 기도해 왔는데, 이에 대해 유대인인 수잔 갤로웨이 씨와 무신론자인 린다 스테픈스 씨가 “기독교 편향적”이라며 위헌 소송을 냈다. 갤로웨이 측은 기도 인도자 다수가 크리스천이며 기도 끝에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종교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 시 외에도 미국 다수 지역에서 공공기관의 기도에 대한 갈등이 진행되던 터라, 이 소송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또 마쉬 대 챔버스 소송에서 “의회 개회 시 기도하는 목사에 대한 정부보조금이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며, 이는 미국의 역사적 전통”라고 판결했던 연방대법원이, 이번에 어떻게 판결하느냐에 따라 미국의 종교 자유 역사와 현주소도 점검할 기회로 인식됐다.

이 소송은 “기도할 권리” 그 자체보다는 “기독교적인 기도를 금지시키겠다”는 의도가 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판결에서 케네디 대법관은 기도가 반드시 여러 종교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인식도 경계했다. 그는 “기도가 중립적(nonsectarian)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 기도를 주관하는 의회나 이 문제를 다루는 법정으로 하여금 종교적 발언을 검열하고 심의하라고 강제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즉, 이번 판결은 공공기관이나 정부기관이 단순히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차원을 넘어, “기독교적 기도를 하는 것도 보장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과거 이 소송에 대해 뉴욕지방법원은 시 정부의 손을 들어 줬으나, 뉴욕 제2항소법원은 만장일치로 판결을 뒤집었다. 현재 미국 대다수 지역에서는 “기도가 특정 종교에 편향적이지 않다면 불법이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상태지만, 무신론자들의 무차별적 소송과 그 소송 비용을 두려워한 일부 지역에서는 기도하던 전통을 자발적으로 폐지하고 있었다.

이 소송에서 예상대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해 새무얼 알리토, 안토닌 스칼리아, 클래렌스 토마스 대법관 등 4명의 보수적 대법관이 찬성표를, 스테픈 브레이어, 엘리나 케이건, 소니아 소토마이어, 루스 긴스버그 대법관 등 4명의 진보적 대법관이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스윙보터 역할을 하는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이 찬성표를 던지며 5대 4로 판결이 났다.

케네디 대법관은 “그리스 시의 타운홀 미팅에서 기도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지 않는다. 마쉬 대 챔버스 소송에서도 의회의 기도가 정교분리 조항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연방대법원은 판결했다. 기도는 사실 종교적이긴 하지만 헌법의 정교분리 조항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헌법이 구성될 때부터 의회는 기도해 왔고, 이것은 의원들이 보다 숭고한 목적을 위해 사소한 차이를 초월하며 정의와 평화라는 공동의 열망을 표현하게끔 했다”고 판시했다.

이제 미국에서 기도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군요. 반가운 일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 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종교이든 그 형태를 떠나 기도하는 대상을 위한 마음이 담겨 있다. 상대를 사랑하고 아끼며,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바라는 마음, 그것은 기도’ 라고 하였다.

by 코이네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