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시대에 ‘정결하고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생긴 이유

질문) 정결하고 또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는 것은 모세가 출애굽 이후에 생겨난 것인데, 왜 여기에 등장할까요? 답변)  말씀하신 대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명확한 구분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 즉 출애굽 이후에 본격적으로 규정된 것입니다. 특히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그 구분이 자세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창세기 7장에서 이미 정결/부정의 구분이 등장한다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 Read more

Categories Q&A

인간의 죄 때문에 왜 땅이 저주를 받아야 합니까?

질문) 창세기 3장에 “왜 인간이 지은 죄 때문에 땅까지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신데, 왜 인간의 죄가 자연에까지 영향을 주어야 할까요? 답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인간과 자연은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피조 세계를 관리하고 돌볼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 Read more

범죄한 인간에게 내린 형벌, 저주일까 징계일까?

질문)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질책하신 내용은 징계인가요? 저주인가요?” 답변)  하나님께서 뱀에게는 “너는 저주를 받아라”(창 3:14)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아담에게는 “너는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고 하십니다. 그 차이 속에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함께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1. 직접적인 표현의 차이 뱀에게는 ‘너는 저주를 받아라’ (창 3:14)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너는 … Read more

Categories Q&A

부활한 몸은 어떤 모습인가?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14:14)하는 질문은 수천년 동안 내려오는 인간의 질문이다. 죽으면 그만이고 특히 몸이 썩으면 없어져 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산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15:23)”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라고 신자들의 부활을 보증하셨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은”죽은 자들이…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15:35)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 살펴본다.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사르밧 땅의 과부아들(왕상17:17-24),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17-27), 유대 관원인 야이로의 딸(막5:22-43),나인성의 청년(눅7:11-17),나사로(요11:17-44),여제자 다비다(행9:36-43),졸다가 떨어져 죽었던 유두고(행20:7-12) 등이 죽었다가 살았으나 신학적인 의미의 부활은 아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었다가 소생했을 뿐 부활의 몸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부활의 몸이란 예수님 경우처럼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나 살과 뼈를 가진 몸이다(눅24:2940).어떤 불신앙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예수님의 출현이 영의 출현이거나,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못자국을 보이시며 손가락을 내밀어 창으로 찔렸던 옆구리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요20:2527).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다고 선언하고 있다(마28:9).

부활한 몸은 부활체를 가졌기에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다(눅24:41-45).영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어릴때의 경험에서 이것을 생각해 본다. 유교의 관습대로 조상의 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한 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꽂아놓고 음식을 잡수시도록 자손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한참 후에 방으로 들어와 호기심어린 눈으로 없어진 음식이 있는가 살펴보아도 밥이나 국이 없어지지 않아 안심하던 기억이 있다.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와 동일하지는 않으나 깊은 연관성이 있다. 도토리가 자라서 참나무가 되고 갓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때 동일한 물질에서 발전하지만 그 형태가 같지 않다.

도토리와 나무, 아이와 어른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계속성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는 것 같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몸은 계속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가까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생각한 일이나(요20:1415),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길에서 동행하게된 예수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6). 제자들이 무서워하며 모여있던 다락방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영으로 생각할 정도로(눅24: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해있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는 흙으로부터 온 것이나 부활 때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될 것이다(고전15:49).지금 우리의 몸은 썩고 욕된 약한 몸이지만 부활 때에 갖게될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한 몸이 될 것이니 곧 신령한 몸이다(고전15:42-44).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의 비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후에 가지시게될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변화산사건이라 부른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고 전하고 있다.

부활의 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 부활체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않을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죽을 수 없음과 같다(마22:30).닫힌 방안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으며(요20:19),동행하던 일행중에서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눅24:31) 몸이 부활의 몸이다. 가고싶은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가,원할 때 즉시 사라지는 부활체는 현재 우리 육체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과 다르다.

출근길에 또는 중요한 약속의 자리에 시간을 대기 어려워 조바심하며 차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일도 부활한 몸을 가질 때는 없어질것이다. 고칠 수없는 병에 걸려 고통하는 일도,늙는 것을 두려워하지도,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뺏기고 통곡하는 일도 부활 이후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살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를 받을 것이니(고전15:5152) 성도들의 몸이 구속을 받는 복되고 소망스런 날이 될 것이다(롬8:23).

<성기호 성결교신대총장>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금 촛대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시록1장20절을 보면 일곱금촛대가 나옵니다. 여기 금촛대와 별을 각각 교회와 사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이 일곱금촛대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출애굽기를 보시면 성소에 7개의 등잔으로 이루어진 등대가 나오고, 스가랴4장에서도 이 등대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성소의 일곱등잔의 등대가 계1장20절의 일곱 금촛대 와 같다고 알고 있었는데, 영문성경이나 그림을 보면 단순히 7개의 촛대로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더군요. (물론 손잡이는 하나겠지만요) 그러니깐 영문판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서…현재 교회나 성당에서 쓰는 일곱개의 촛대로 이루어진 모양 같기도 하고..저는 주님 오시기 전까지 밤인 세상을 비추는 개념에서 모세 때 성소의 일곱등잔의 등대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변형이 된건가요? 아니면 아주 다른건가요? (개념조차도..) 변천사가 있는건지..궁금해서 질문을 올려봅니다.

%ec%9d%bc%ea%b3%b1%ec%b4%9b%eb%8c%80

답변)

1.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일곱 촛대들과 그 촛대들 사이에 인자 같은 분이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계 1:12-13). 여기에서 ‘촛대’로 번역된 말은 원래 “촛대들”(복수)입니다. 한 개의 촛대는 ‘뤼크니아’인데, 여기에서는 여러 개의 촛대를 가리키는 ‘뤼크니아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뤼크니아는 세워 놓거나 아니면 달아매는 ‘등잔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출 25:31; 왕상7:49; 슥4:2).

2. 출애굽기에 나오는 금촛대는 금 덩어리를 쳐서 만든 한 개의 덩어리였습니다. 비록 가지는 일곱 개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 촛대는 전부 한 덩어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촛대는 단수(a lampstand)로 표시됩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촛대는 따로 덜어진 일곱 개의 “금촛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곱 개의 촛대들은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 1:20). 스가랴서에 나오는 금촛대는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다가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령을 통해 권능과 힘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슥 4:2). 그러나 본문에서 일곱 금촛대들은 1차적으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 그러면 왜 본문에서 교회가 금촛대로 묘사돠고 있을까요? 금촛대는 요한 당시의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은 교회가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신성과 영광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고귀한 곳입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시하고 짓밟고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가 매우 존귀한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교회를 은, 놋, 또는 철로 만든 촛대가 아니라 금으로 만들 가장 귀중한 촛대로 묘사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통치자와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무시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산 백성들이 모인 귀중한 곳입니다.

또한 촛대는 세상을 비추는 교회의 사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선행과 순교의 피로 이런 사명들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극한 박해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선행과 순수한 믿음으로 복음과 진리를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교회는 어둠 속을 비추는 촛대로 상징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하셨습니다(마 5:14-16). 그러나 교회는 빛 자체는 아닙니다. 참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해서 비추는 발광체에 불과합니다.

3. 주님은 일곱 촛대들, 즉 일곱 교회 사이에(중간에) 계시면서, 교회가 이러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 손에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일곱 별) 붙들고 계셨습니다. 당시 교회들 중에는 여러 가지 박해와 어려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낙심하기 쉬운 처지에 있던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교회들에게 교회의 사자들을 붙들고, 교회 중간에 함께 계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노아의 저주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인가?

Question

이런거 물어봐도 되나 모르겠는데..총신에서 시험을 봤는데 노아의 저주를 받은 사람묻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답을 가나안이라고 하려다가, 결국 아들이 저주를 받은 것은 아버지인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함을 답벼으로 선택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나안이란 표기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함의 자손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요(주석을 보니까 칼빈도 이렇게 해석한 거 같은데….). 왜 이런 문제를 냈는지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네요…

Answer

1. (창 9:25)은 구약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 구절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아의 수치를 드러낸 사람은 함인데, 왜 노아가 함이 아닌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하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상 함에게 있어서 자기로 인해 아들이 저주받은 것은 자신이 저주 받은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이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아들에게 그것을 넘겨주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아비의 하체를 조롱한 함의 범죄가 그의 아들 가나안의 저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견해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함이 받을 형벌을 더 가혹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함의 자손(이 경우 가나안은 함의 후손의 대표로 제시됨)을 저주했다(Calvin, Lange). 이 경우에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함과 그 가족 모두가 저주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노아는 예언의 은사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먼 장래를 보면서 장차 가나안족이 함을 인해 징계받을 것을 미리 보고 예언을 했다(Theodoret, Willet).

 3) 노아의 막내 아들 함이 범한 죄의 전통은, 함의 막내 아들 가나안으로 전수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가 이를 알고 가나안을 저주했다(Hoffman, Delitzsch)

 4) 실제로 죄를 범한 사람은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었다. 노아의 수치를 처음 목격한 사람은 가나안이었으며, 그가 이를 보고 그 사실을 아비인 함에게 알렸고, 함이 이를 확인하고 노아를 조롱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러한 점에서 함과 가나안은 범죄의 공범자였다(Aben Ezra, Poole, Jamieson).

 5) 당시에 가나안도 이미 그의 아버지의 불경건함과 죄악을 답습하고 있었다(Ambrose, Keil).

3. 이러한 몇 가지 견해들을 참고하시면 (창 9:25)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함에게 있어서 그의 미래는 아들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함이 가나안과 함께 복합적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함과 가나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이 문제를 내신 분은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은 알지만, 정작 저주가 선포된 것은 그의 아들 가나안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 문제를 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약간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4. 여기에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창세기 기자가 가나안의 저주 사건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가에 하는 점입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에, 그 독자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서 정착해야 될 땅이 가나안, 즉 팔레스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가나안 정복이 노아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에 살고 있던 족속들은 가나안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노아의 예언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합법적임을 말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이 저주는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 시대에 셈족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정복 당했고(수 9:23), 나머지는 솔로몬 시대에 완전히 정복을 당했습니다(왕상 9:20,21). 그리고 그 후에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 즉 카르타고인나 애굽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페르시아인, 마게도니아인(헬라), 로마인 등과 같은 야벳 족속들에게 계속해서 정복을 당했습니다.

(이글은 매일성경연구원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www.biblenara.org/q&a/Q646.htm)

사탄은 왜 뱀이 되어 하와를 유혹했을까?

질문 ) 성경 창세기에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보통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도 말을 하는데, 하필이면 왜 뱀의 모습으로 나타났을까요? 사실 뱀은 징그럽고 특히 여성에는 혐오 동물이잖아요?

뱀

답변) 창세기에 보면 뱀에 대해 가장 간교한 동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간교는 순진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지혜와 정의롭지 못한 꾀를 쓰는 영리함입니다. 들짐승 중에 뱀은 가장 영리하게 하나님의 이 지으신 존재로, 본래부터 악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21)고 하셨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것이 없다”(딤전4: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고 선한 뱀의 영리함이 악령의 도구로 쓰여질 때, 뱀의 영리함은 하와를 속이는 데 사용되었으므로 유혹자인 사탄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너희 지체를 부의의 명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사람의 지체는 누구에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가 됩니다. 의의 병기는 사람은 살리는 도구가 되지만, 불의의 병기는 생명을 죽이는 죽음의 도구가 됩니다. 악령이 들 짐승중에 공격의 과녁으로 삼은 대상이 누구입니까? 뱀입니다. 왜 뱀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겠습니까? 간교하고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뱀이 간교하고 영리함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뱀에게 허락한 우수한 자질입니다. 선하고 우수한 영리한 뱀은 악령이 이용할 때, 사탄의 도구로 쓰여졌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하와를 속이는 사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하나님께서 사람마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재능,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각자가 받은 달란트가 주를 위해 쓰일 때는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지만 악령이 이용할때는 생명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악령이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한 뱀을 공격하는 과녁을 삼는 것 같이 악령은 하나님게서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 재능을 과녁을 삼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노립니다. 말 잘하는 것도, 수단 좋은 것도, 총명하고 영리한 것도, 능력도, 건강도,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 살리는 도구,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삼하14:25-26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은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삼하18:9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자 압살롬 상수리 나무에 머리털이 걸리며 공중에 달림 자신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수한 재능으로 인하여 화를 자초한 예입니다.악령의 본질과 본성은 자기 지위, 분수, 실력, 위치에 알맞게 살지 아니하고 분수 실력 이상의 것에 욕심을 품고 탐하여 그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것이 본질 본성이요, 그렇게 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인도입니다. 이와 반대로 성령의 인도는 빌2장에 예수님은 자기의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모든 피조물의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무릎을 꿇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어떤 과정을 거쳐 27권만이 정경으로 인정되었나요?

질문)

현재 기독교의 성경은 총 66권입니다. 구약성경이 39권, 신약성경이 27권이죠. 그런데 이 외에도 기독교에는 구약성경의 외경이 있고, 신약성경에는 위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경처럼 읽혀지거나 전해져 온 성경이 많이 있다는 것이죠. 지금 정경으로 인정되고 있는 66권은 어떤 경로를 통해 정경이 되었나요?

답변)

초대교회 사도들은 자신의 당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전도에 힘썼지요. 또한 당시엔 예수님의 역사성에 대해 의심할 나위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존을 증명해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시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간직하던 그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자 성경을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복음서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하게 되자 이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야 할 필요가 있어 사도들은 교회에 서신 형식으로 기독교의 교리와 생활 규례 등을 적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이단들이 생겨나 그들의 필요에 따라 사도들의 이름을 빙자하여 많은 글들을 적어 성경처럼 유포하였고, 이것이 교회를 무척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에 새로운 경전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약성경 후보에 해당하는 많은 복음서, 행전, 편지(서신) 등의 문헌들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서 분류하였습니다.

1.사도로 인정되는 이가 직접 기록하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가 기록한 문헌.
2.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고 믿을 수 있는 문헌.
3.다른 문헌들과 모순되는 내용이 없는 문헌.
4.믿음과 직제가 통합된 보편교회(Catholic Church)에서 사용되기에 적합한 문헌.

이에 따른 당시의 결론을 유세비우스의 분류에 따라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호모루구메나(경전성에 의심이 없는 문서) – 4복음서, 바울 서신, 베드로 전서, 요한 1서
2.안티레고메나(경전성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서) – 베드로 후서, 요한 2-3서, 유다서, 야고보서
3.노타(경전성 인정은 어려우나, 잘 알려진 문서) – 베드로 묵시록, 요한 묵시록, 디다케, 바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 등

키릴루스는 이 중에서 호모루구메나와 안티레고메나를 합쳐 26권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이는 현재의 신약성경 구성을 결정하는데 뼈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키릴루스가 ‘노타’로 분류했던 요한 묵시록을 호모루구메나로 보아야 하며, 총 27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관철된 27권의 신약성서 구성은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구약성경 목록과 더불어 27권을 신약정경으로 최종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카톨릭 교회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일부 동방교회는 구약성경의 아포크리파(외경)와 신약성경의 안티레고메나가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논의 끝에 결국 트룰란 에큐메니컬 공의회(692)에서 동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결정 일부를 수용하여 신약성경 목록을 공유하고, 구약성경의 아포크리파는 일단 정경으로 간주하는 개선된 태도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마무리 된 것입니다.

by 코이네 자료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질문)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 보면 주님께서 성령을 훼방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는 죄는 무엇인가요?

답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유독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이 사함을 받지 못할까요?

Louis Berkhof은 이 문제에 대해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나 성령의 역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신 32:39),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 일과 대조하며(레 24:1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인 레위기 24장1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생긴 배경을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곁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주님은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단언하시면서(마 12:22-28), 자신이 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은 인자를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2).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신적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말로 극단적인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을 말하는데(마 9:3-4), 열왕기하에 보면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살 수 있는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엘리야가 그 사신을 만나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느냐고 말하면서 그가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왕하 1:1-18). 여기에 나오는 바알세붑은 불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으로 에그론 사람들은 이 ‘파리의 주인’이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고 믿은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병자를 고칠 때 바리새인들은 그 성령의 사역을 더러운 ‘죽은 파리’(전 10:1)의 신에게 부탁하여 병을 고친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막 3:22).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무서운 반역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회개시키는 성령 자체를 훼방하기 때문에 절대로 회개가 되질 않아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히 10:26-27).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대하여 단순히 의심하거나 무의식중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러한 주님의 이적이 나타나고 내적으로 확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람의 역사인지를 알지 못하여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알면서도 귀신의 역사로 중상 모독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며 경고하던 대상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활동을 믿으며(행 23:6-8),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가르쳤던(마 23:2-3), 이스라엘의 선생(신학자와 목사)들입니다(요 3:10). 사실 이들은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그분께서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분별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알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고 폄하하고, 또 본질을 흐리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도록 방해하였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으로 이루어지는 성령훼방죄,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진리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 거역에서 극에 달합니다.이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신의 길을 따라가기로 선택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결정한 결과입니다.양심은 성령의 감화에 대한 계속되는 거절로 인해 화인 맞고, 따라서 자신이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음을 거의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을 범함으로 양심이 고통 받는 사람입니다.비참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보통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살지 않은 결과입니다.양심이 고통 받는 사람은 둘 중 한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니다.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굴복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잘못을 올바르게 고침으로 성령의 감화에 응답하든지, 아니면 양심에 화인 맞고 성령을 침묵시킴으로 고통스러운 자극을 제거 합니다.

후자의 길을 택하는 사람이 회개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양심이 영원히 무감각해져 회개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그는 고의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못할 곳에 두었습니다.그의 선택을 고집스럽게 악용함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악이 마침내는 선처럼 보이고, 선은 악처럼 보입니다.그것이 바로 죄의 기만성입니다.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눈인 양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비춰진 빛에 순종하는 생애를 계속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경고 장치입니다.그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영원한 멸망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이고 고집스러운 불순종은 마침내 고칠 수 없는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 무시했던 바로가 바로 그 실례가 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용서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한 사람이 용서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훼방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용서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성령의 경고하는 음성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 위해 하늘과의 교통의 줄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이 맞습니까? 성서가 맞습니까?

성경과 성서는 어떻게 다른가요? 아니면 같은 뜻인가요?

먼저 대한성서공회의 공식 답변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의 경전을 “성경(聖經)”이라고 부를 것인지, “성서(聖書)”라고 부를 것인지, 가끔 논란이 됩니다. 거룩할 “성(聖)” 자에 경서(經書) “경(經)” 자를 쓰면 우리의 경전을 높여 부르는 이름인 것 같고, 거룩할 “성(聖)” 자에 책 “서(書)” 자를 쓰면 그 경전을 조금은 폄(貶)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서 굳이 성서라고 하지 말고 성경이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약전서와 구약전서를 거룩한 경전이라고 하든 거룩한 책이라고 하든 그것이 그렇게 예리하게 의미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경전을 다만 중국 전통에서는 성경이라고 불러오고 있고, 일본 전통에서는 성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전통을 융합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란 말도 쓰고 성서라는 말도 쓰고, 「성경전서」라고 하여 경과 서를 절묘하게 융합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성경이든 성서이든 그것은 일반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일컫는 보통명사입니다. 기독교가우리나라에서 우세한 종교가 되면서 그 용어를 기독교가 사유(私有)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성경이라고 하지 않고 성서라고 하는 것은 일본에서 불경을 성경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과 구별하려고 한 것 같다는 말을 전 일본성서협회 총무 사토 목사에게 들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정도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용어에 “성경대(聖經臺)”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불경을 놓고 읽는 독서대(讀書臺)입니다. 이제 “성경”은 “성경전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 두 자를 취한 것입니다. “성서”는,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만, “성경전서”의 첫 자와 마지막 자를 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 다가 다 경전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경이나 서에 가치판단의 구분은 없습니다. 예언서들은 으레 예언서/선지서라고 부르지 절대로 예언경/선지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야고보서 라고 하지 로마경 고린도전후경 야고보경이라고 하지 않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경전의 이름은, “성경”도 “성서”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의 고유한 이름은 “언약서/계약서”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약”과 “신약”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들과 공유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기독교의 경전의 성격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일면을 밝혀주기도 합니다. 계약서로서의 경전입니다. 무슨 고전으로서의 경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갑(甲)이 되고 우리가 을(乙)이 되고 중간에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증인이 되시어서 맺은 언약/계약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경전입니다. 고전적 가치나 철학적 가치로 말하자면 불경이나 유교의 경전이 성경보다 못하겠습니까? 성경이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그것이 최고의 고전이라거나 최고의 철학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은 계약서이기 때문입니다. 계약서는 계약 당사자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고전으로 읽지 말고, 하나님의 요청과 우리의 마땅한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계약서로 읽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 종교가 소원성취를 우선적으로 발생한 것인데 반하여 기독교는 “내 뜻 이루어 주십시오”의 종교가 아니라 “당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는 종교입니다. 신약과 구약이 합쳐 있는 성경전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청이 들어 있는 계약서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갈림이 이 계약을 지키느냐 어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고, 너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w박영호목사by 박영호 목사

*박영호 목사님은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미국 시카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시카코에 있는 ‘약속의 교회 PNF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