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사람과 속사람
사도 바울은 고후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화해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로 통일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믿는 일은 약간의 마음이나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는 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체계 속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옛 시대의 모든 가치관, 판단 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판단 기준에 의하여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에 들어왔음을 뜻합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을 가리켜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곳곳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 사람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였습니다. 겉사람의 세계는 모든 것이 낡아지는 세계인데 반해서 속사람의 세계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아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6절)이라고 하였습니다. 낡아지는 세계의 끝은 사망이라면 새로워지는 세계의 끝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낡아지는 역사란 결국은 쇠퇴하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노쇠해지는 것처럼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은 낡아지게 마련입니다. 시간과 더불어 결국은 낡아지는 인간의 역사에 비극이 있습니다. 새로워지지 못한다는 데에 인간의 고뇌가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을 새롭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것은 이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가며, 자원을 고갈시키고,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켜 주므로 종말을 향해 내닫게 할 뿐입니다. 여기에 오늘 인간의 고민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제한성 때문에, 시간을 붙들어 맬 수 없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결국 무덤을 향한 역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겉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의 현상입니다.
그와 반대로 속사람의 세계는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을 넘어설 수 없었던 인간을 해방하여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낡아지기만 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영원 속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겉사람 즉 시간 속에 매인 인간은 날로 썩어갈 수밖에 없지만, 속사람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받고 영원한 세계에 살게 된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영원 속에서는 낡아지는 법이 없이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영원을 바라보며 그 속에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쇠하고 낡아지지 아니하고 날로 새로워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낡아지는 세계 속에 살다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낡은 세계관은 버리고 영원을 지향하는 세계관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이가 들고 늙는다고 점점 의기소침(意氣銷沈)해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희망을 갖고 날마다 새로운 생각을 하며,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후 5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적인 논리나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을 알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 영적 존재로 보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보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보이는 육체로만 판단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면서 그것을 추구해 가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거리낌 없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종이냐 주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헬라인이냐 야만이냐를 따지지 않고 그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가치관입니다. 일시적이고 가벼운 고난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서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날마다 새로워지는 세계관을 갖게 되면, 즉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 새롭게 지음을 받으면 보는 시야가 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당하는 고난을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시적이란 말이나 가볍다라는 말은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과 비교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우리가 이 땅에 사는 100년 미만의 삶만을 모두라고 생각하면 거기서 당하는 고난은 결코 일시적이거나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사업의 실패나 중병으로 인한 고통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체 장애를 갖고 태어나 일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원만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고난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인생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가벼운 고난이라고 하였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경험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수없이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폭풍을 만나 떠돌았으며, 온갖 고난을 다 경험하였고, 마침내는 죽음 직전까지 몰려갔던 경험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고난을 모르는 자라고 할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인생이 당하는 고난을 잘 아는 자였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바라보면서 이 땅의 고난은 일시적이고 가벼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좌절과 아픔과 고통을 일시적이고 가벼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영생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 땅의 고난은 그 영원한 세계에서 얻을 크나큰 영광과 비교하면 일시적이고 아주 가벼운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의 마음의 눈이 떠져 하늘의 기업의 영광과 풍성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엡 1:17-19)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았다면 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영원한 생명과 거기에 따르는 영광과 그 기업의 풍성함이 어떠한지를 알고 지금까지 소중히 여겼던 이 땅의 모든 가치관을 버리고 그 가치관 그 세계관을 따라 행동하게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