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문제 해결책으로 해경 해산 아주 비싼 한복 한 벌의 값인가?

세월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만큼 커져가고 있습니다. 정부도 이에 대한 대책마련에 고심하다 해경 해산이라는 극단적인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정말 이것이 제대로 된 대책일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미국의 박영호 목사님의 논평입니다.


GOLDEN TIME : 응급환자를 살릴 수 있는 최적의 기회,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는 뉘앙스가 강한 이 의학 용어가, 세월호 구조 초기의 긴박한, 귀한 생명들을 고스란히 살릴수도 있었던 그 시간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는 걸 보았습니다.

이제 이 용어가 대한민국호로 확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확하게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그렇게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명운이 달렸지, 한낱 정권의 안위가 달린 게 아니다”

우리는 골든 타임을 지나고 있습니다. 숱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드러난, 개인사 챙기기에 여념이 없어 공동체의 일에 대해 냉랭했던 가슴들이 눈물 가운데 하나로 모여지는 지금 이 때가 골든 타임인 것 같습니다. 아주 좋은, 그러나 이걸 놓치면 회복이 정말 힘들어지는 그런 기회…

세월호 소식 중에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이 “가난해도 행복했었는데, 이제 가난만 남았다….” 는 말이었는데.  이 말이 다시 가슴을 찢어 놓네요. “아이들이 끝까지 애타게 불렀을 이름, 엄마”  그 애절한 부름에 대답하지 못한 부모들은 앞으로 어찌 살아갈까요?

해경 해산 – 아주 비싼 한 복 한 벌의 값인가? 
박대통령이 담화에서 해경을 해체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뭔가 내실 있는 대책을 기대한 마음이 허해집니다. 무슨 부서를 없애고, 새로 만들고 하는 일은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수도 없이 보아 온 일이라, 이런 조직 개편 자체가 국민의 마음을 얻기는 힘들거라 봅니다.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박대통령과 현 정부의 입장에서는 뭔가 전향적인 것을 내 놓아야하겠는데, 딱히 보여 줄 게 없으니, 이런 충격적인 요법을 쓰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대책을 내 놓은 주동기가 이런 사고의 재발을 위한 진지한 혁신이나,  국가의 장래를 위한 비전보다는 대통령의 이미지 재고에 있는 듯 합니다. 또한 과단성있고, 근본적인 대책을 주도하는 이미지 구축이 이번 담화의 주 목표인 것 같습니다.
이 정권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이 정권이 대통령의 이미지 정치에 가장 큰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박 대통령이 1 년 동안 122 벌의 옷을 선 보였다는 것은 그들이 어디에 힘을 쏟고 있는가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해경 해산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그리고 그 국가적 손익을 가늠하기 힘든 대책 역시, 대통령의 이미지라고 하는 목표를 위해 소모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드는 것입니다. 해경 해산, 아주 비싼 한 복 한 벌의 값이라 할 수 있지요.

by 박영호 목사 (미국 약속의 교회 PNF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

돈이 행세하지 못하게 하라

뱅겔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악의 첫 번째 뿌리는 자아사랑이요 두 번째 뿌리는 돈 사랑이다.” 여기서 돈 사랑이라고 하는 ‘필라르 귀로스’라고 하는 것은 필로스라고 하는 사랑이라는 말과 아르귀로스라고 하는 은을 뜻하는 말이 합쳐진 말이다. 옛날에는 화폐가 은이었다. 돈 사랑이 하나님사랑을 대신하는 사회가 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요, 병든 사회요, 종말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영어시편에 머니탁스라는 말이 있다. 돈이 말한다라는 뜻이다. 요즘은 돈이 말하는 시대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마다 사람들은 돈 돈 하면서 돈에 미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렇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70% 가까운 아이들의 대답이 돈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돈이 행세하고 돈이 지배하고, 돈이 다스리고 돈이 명령하는 사회, 그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사회 그리고 그 지시와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사회가 될 때 진정한 공동체가 만들어 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명령보다 돈의 명령을 더 중시하고 있는 사회가 되고 있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일본의 소설가 나쓰매 소세키라고 하는 작가가 있다. 이 발음을 좀 잘해야 하는데 이 나쓰매 소세키라고 하는 이 작가가 주로 돈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많이 썼다고 한다. ‘마음이나 그 후’라고 하는 그 책을 보면 돈 많은 사람, 돈을 갖고 자만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돈이 인간을 어떻게 철저히 파괴하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 책에서 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얘기하지만 돈을 찬양하는 사람은 아니다. 돈이 그만큼 위력이 있기 때문에 돈을 잘못 쓰게 되면 결국 그 돈으로 인해서 인생이 파괴되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경이 있다. 그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란 말 대신에 돈이라고 하는 말이 배치되어 쓰이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돈을 만드시니라,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믿음 소망 사랑 돈 그중에 제일은 돈이니라” 여러분 웃고 계시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하나님 없는 것보다 돈 없는 것을 더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 아닌가? 하나님 사랑보다 돈 사랑이 더 우선하고 있고 돈 사랑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사회가 오늘의 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돈 사랑에 빠지면 그 돈으로 인해서 우리의 인간성도 파멸되고, 그로인해서 이 세상은 불행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원수 대하듯 해라, 최영장군처럼 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한다. “돌 보기를 돈 같이 하라”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시대 속에 살고 있는가를 꿰뚫어 볼 수가 있어야 한다. 돈 보다 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고, 그분의 은혜를 통해서 진정 행복한 삶을 영해갈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살기 바란다.

by 동래중앙교회 정성훈 목사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예수님 마음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는 정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고입니다. 그런데 가장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렇게 가슴 아픈 현실을 두고 비뚤어진 시각으로 이를 이해하여 국민과 실종자 유가족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일들입니다. 이에 대한 장로회신학교 교수이신 손은실 목사님의 글입니다.


손은실교수정 아무개가 분노한 실종자 가족들이 대통령과 장관에게 거칠게 항의한 것을 두고 “국민 정서가 미개하다”고 표현하여 파문을 일으켰던 사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분노해야 할 것에 대해 분노하는 분들, 그들의 표현 방식이 거칠다고 정씨는 미개하다고 말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의 눈에는 성전에서 제사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과 환전꾼들의 탁자를 둘러 엎어시고, 그들에게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셨던 분, 예수도 미개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분의 거친 태도 때문에.

그런데 현재 범국민적 슬픔과 분노의 반응에 대해 정씨와는 다른 각도에서, 어쩌면 스토아철학의 관점에서 뭔가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외부의 사건에서 정신이 영향을 받지 않는 무정념(apatheia), 혹은 평정(ataraxia)을 추구했다. 지금 이런 철학적 태도에 대해 논할 여유가 없다. 각설하고,

성서는 이와 달리 ‘공감’ 능력을 가르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로마서 12:15).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분노해야 할 대상에 대해 거침없이 분노하시고,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슬피 우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분노해야 할 것에 대해 분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즉자적인 감정에 매몰되지 않도록 애쓰면서. 더 나아가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 1)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함께 우는 것도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불의한 것들을 바로 잡고 미래의 희망을 보여 줄 때 비로소 희생자 가족들과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이 조금씩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원하지 않게 글이 길어졌다. 하지만 한 마디만 더…

지금까지 한 사람이라도 살려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많은 분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계실 것이다. “그 분은 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까?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그 분이 너무 하신 것 아닌가?” 과연 그 분은 응답하시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까?

성령이여, 간구합니다. 닫힌 우리의 귀를 열어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어두운 우리의 눈을 밝혀 진리를 보게 하소서! 주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모든 희생자들과 실종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물속에 갇혀 있는 190명이 한 시라도 빨리 구조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이 시간도 최선을 다해 구조 활동에 헌신하는 분들을 지켜 주소서!

by장로회신학대학교 손은실 교수

좌절을 경험한 자 인생을 통찰할 지혜를 갖는다

고난은 인생의 좌표

“좌절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만의 역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강을 거슬러 헤엄쳐 본 사람만이 물결의 세기를 알 수 있다.”-쇼펜하우어

어떤 양봉업자가 필리핀에 갔습니다.  필리핀은 사시사철 여름이라 온갖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양봉업자는 문득 생각하였습니다. ‘아하, 여기서 벌을 키우면 많은 꿀을 딸 수 있겠구나!’  양봉업자는 시험적으로 벌통 10개를 가지고 필리핀으로 날아갔습니다. 얼마 못되어 벌통에는 꿀이 가득하였습니다. 양봉업자는 오, 됐다!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이 번에는 빚을 내서 벌통 100개를 사들고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첫 해, 벌통 100개에서 두 번 꿀을 따는 수입을 올렸습니다. 양봉업자는 ‘오, 얼씨구 좋다!’ 하였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견문이 넓어야 한다니까,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였습니다. 좀 늦긴 했지만 참 다행이로구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음 해는 꿀을 한 번밖에 못 딴 것입니다. 왜 그럴까? 곧 잘 되겠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는 더욱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꿀이 거의 모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양봉업자는 결국 망했습니다.

해바라기와 벌
그 이유는 꿀벌들이 꿀을 모으는 것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하여서입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는 동안 열심히 꿀을 모아야 겨울을 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꿀벌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꿀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일년 내내 꽃이 피고 꿀을 언제나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꿀을 모으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동일합니다. 고난과 역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이 역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역경이 비록 힘든 과정이지만 그 자체가 불행과 실패가 아님을 알기에 견디고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꿀은 겨울이 있기에 준비하는 열매입니다. 사람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역경이 없기를 바라지만, 고통과 역경이 없는 삶은 참된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삶의 좌표를 잃는 것과도 같습니다.

by 고병호 목사 (발안반석교회 담임목사)

순수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미가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이들은 종종 순수 복음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는 우리 기독교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에 나온 생각인 것 같다. 도대체 순수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순수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순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목숨 바쳐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구도를 중시하는 종교처럼 동굴 깊숙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동굴에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사랑할 사람들이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을 복음의 빛으로 밝히고, 구원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등 사회공동체 전반에 걸친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 걸쳐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를 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미가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처럼 너희가 정의를 아는 것이 본분이 아니냐고 당시 타락한 지도자들을 향해 돌직구를 날린 것처럼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린 더 깊이 공부해야 하고, 더 깊이 기도해야 하고, 더 열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 있다. 불의를 행하고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교회만 나오면 모든 심판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가당치 않는 자신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온갖 불의를 행하면서도 미가가 비판하고 있는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처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는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무식도 이만하면 병이다.

by 코이네 박동진 목사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 헌금 때문에 받은 어린시절의 상처

어린시절 누구나 다 한 번쯤 교회에 가 본 기억이 있을겁니다. 그 당시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는 것이 자연스런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과 달리 그 땐 친구들과 신나게 흙을 밟으며 뛰어노는 게 일상이었기에, 교회는 저에게 더없이 신비하고, 즐거운 놀이공간처럼 느껴졌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면 평소에 대하지 못한 특별한 맛있는 먹거리를 주었기에 이번에 가면 뭘 먹을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또 기대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맛있는 먹거리가 넘쳐나다보니 먹는 거 준다고 교회에 가진 않지만, 30년 전만해도 간식이란 개념이 참 귀했던 시절이라 교회에 가는 것은 남다른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교회가 가기 싫은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랜시간이 흘렀지만 그 당시 받은 충격이 어린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헌금 때문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그 시절에 부모님에게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도 그랬구요. 특별한 날이나 필요한 것을 살 때 부모님께 돈을 받았고, 어떨 때는 그걸 조금 남겨서 꼭꼭 숨겨두었다가 필요한 것을 사던 시절이었습니다.

사건이 생긴 그날, 친구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평소와 다름없이 교회에 갔었습니다. 교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들, 예배, 게임, 성경공부 다 좋았는데 딱 한가지 좀 부담스런 시간이 바로 성경공부하는 시간에 내는 헌금순서였습니다. 예배 시간에 헌금을 내지 않고, 담임선생님과 성경공부하는 시간에 헌금을 걷고는 얼마를 내었는지 출석부 같은 곳에 기록을 해두더군요. 전 낼 헌금이 없어서 항상 빈손이었구요.

그런데 그날, 다른 날은 별 말이 없던 선생님께서 제가 헌금을 가져 오지 않았다고 친구들 앞에서 야단을 치시는 겁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당한 저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구요, 어린마음에 너무도 창피해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 다음주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이해 못했던 건 그 선생님의 태도였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제게 큰 상처를 주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더군요. 도리어 제가 결석한 그 다음 주부터 저희 집에 오셔서 절 데리러 가려하시는데, 이제 교회에 안나가니 오시지 말라해도 그냥 막무가내로 계속 찾아오시는 겁니다. 정말 그 당시에는 너무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교회가 질리게 되더군요. 아마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저도 교회에 잘 적응해서 좋은 성도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백일기도문그런데 팀블로그를 하면서 블로그 하는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벌써 알게된 지 5년이 되네요. 얼마 전 그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십니다.

“줌마님을 위해 100일 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고맙기도 하고, 또 절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목사님의 따스한 마음에 살짝 감동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제게 어린시절의 트라우마가 커서 그런지 선뜻 교회에 다시 가고 싶진 않네요. 어린시절의 그 충격이 제 마음의 문을 너무 굳게 닫아버렸습니다.

요즘 교회가 사회적인 질타도 많이 받고, 또 교회 내부적으로도 교세가 감소한다고 많이 걱정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대책을 세우고 있겠지만 제 경험 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자연스럽게 다가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억지로 하게 하고, 강압적으로 한다고 해서 신앙을 갖게 되진 않습니다. 도리어 역효과가 나죠. 제가 피부로 경험한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단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절 위해 100일 기도하신다는 목사님 때문에 저의 경험을 여기 코이네 뉴스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경험이 타산지석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by 줌마

평신도로 내가 섬기는 교회에 등록하겠는가?

한번씩 짧은 질문이 목회자로서 나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근에 아래의 질문이 저를 긴장시켰습니다.

“사역자가 아니라면, 평신도로서 지금 섬기는 교회에 계속해서 출석할 것인가요?”

아마 이 질문을 목회자들이 직접 듣게 된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그런데 직접적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는 이런 질문에 많이 봉착하게 됩니다.

예전에 필자도 아는 친구로부터 자기교회 성도가 이사를 하게 되어 내가 사는 지역으로 오게 되는데, 너희교회에 출석하면 어떻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교회에 와야지, 반갑게 대답을 하자, 그 친구가 너희 교회는 어떤 점이 좋은가? 소개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도 이러이러해서 이 교회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이죠. 솔직히 그 때 참 많이 당황했습니다.

지금 한 교회의 담임이 되어서도 그 때의 충격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씩 자문해 봅니다. 만약 내가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니라 평신도로 방문했다면 우리 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할 것인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by 코이네 박동진 목사

기독교인의 조상제사 배척보다는 배려와 이해가 답이다

제사문제에 대한 기독공보의 기사 중 일부입니다.

비기독교 가정에서 설 명절을 보내야 하는 기독교인들이 ‘제사 문화’로 고민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풍습에 따라 비기독교 가정의 대부분이 ‘조상 제사’를 지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적 혼란에 빠져 있다.얼마 전에는 기독교인 가정주부가 제사 치르기를 반대하다 이혼을 당하기도 했고, 법원에서는 가정의 분란을 초래했다며 이혼사유에 해당된다고 봤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전문가들은 절충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사 음식을 차리는 일은 돕더라도 절을 할 때는 선 자세로 묵상을 하는 식이다. 숭실대학교 문화선교연구소장 김명배 교수는 “제사 문제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고 오히려 반감을 일으킬 수 있다”며 “당사자가 먼저 집안에 양해를 구하고 배타적이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협점이 되는 방안을 내세우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에 대해 예장통합교단의 증경총회장 박종순 목사(충신교회 원로)는 한 칼럼 기고를 통해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다. 박종순 목사는

“효의 기본정신은 죽은 조상보다 생존해 있는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부모 생전에는 온갖 불효를 하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묘역을 만들어 형식을 벗어나지 못한 제사를 반복하는 것은 효와는 무관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가족공동체를 외면한다던가 따돌림을 받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평소에 제사행위 자체 외에는 모든 면에서 ‘예수님 믿는 ㅇㅇㅇ가 최고’라는 평을 듣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지키면서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돌봄, 섬김과 나눔에 있어선 으뜸이 되고 칭찬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 조언했다.


추도예배제사 문제가 기독교인에게 고민이 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바로 제사의식이 우상숭배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해석을 내려놓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저런 대책을 내놓은 것은 잘못하면 신앙혼합주의를 수용한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우리의 제사문제에 대해 처음에는 우상숭배라고 결론을 지었고, 이 때문에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조선말에  ‘사화’라는 말이 붙은 난은 대부분 제사문제와 관련된 천주교의 탄압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엄청난 수의 신자들이 이 때문에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이러한 천주교의 결정은 당시 동양의 효사상과 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결정이었고, 천주교인들은 조상에게 효를 다하는 것을 배격할 이유가 없다 하여, 당시의 결정을 번복하여, 조상제사를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문에 현재 천주교인들은 조상제사로 인해 더이상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

개신교는 제사문제에 대해서 이전 천주교와 같이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였고, 그 때문에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배척하고, 추방해야 할 잘못된 문화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제사문화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 효와 가족이 함께 모여 화목을 이루는 것은 권장해야 할 좋은 요소이기에, 제사 형식을 예배형태로 바꾼 추도예식으로 대체하기를 권해왔다. 그런데 이 추도예식은 온 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일 경우에는 좋은 방법이지만, 비신앙인이 함께 하긴 이질적인 요소가 크다는 것이 문제이며, 제사 때문에 겪는 가족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여전히 갖고 있다. 도리어 제사의 형식이 둘로 나뉘는 문제가 생겨, 한 자리에 모여야 할 명절이나 추도일에 종교에 따라 가족이 따로 모이는 볼썽사나운 현상도 일어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제사는 우상숭배이므로 절대 해서도 안되며, 그 자리에 참석해서도 안된다는 율법주의적 입장을 고수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제사문제로 인한 가족간의 갈등은 여전할 것이며, 기독교인들은 효도 모르는 후레자식으로 욕을 먹을 것이다. 또한 그런 배타적인 자세는 가족 간의 관계를 멀어지게 할 것이며, 가장 먼저 해야 할 가족의 구원을 내팽개치게 될 것이다.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켰더니, 네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배척해버리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지속될 것이다. 무조건적인 배척이 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제사를 드리는 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면 어떨까? 이런 말을 하면 혹 우상숭배하는 것에 동조하겠다는 뜻이냐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조상 제사는 우상숭배의 요소도 있지만, 실제 제사를 주장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이다. 즉 제사는 효도의 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비신앙인들의 제사의식을 무조건 배척하기 보다는 부모에 대한 효의 전통으로 존중해주고, 제사의식에서 기독교인으로서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부분(차린 상에 절을 하는 행위 등)을 제외하곤 함께하는 것이다.

또한 절을 하지 않는 것도 조상에 대한 효가 없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죽은 자에 대한 경배를 금하고 있어, 예를 차리는 형식이 다를 뿐이라고 잘 설명해서 오해를 불식하고, 불화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도 경험하는 것이지만 모든 다툼은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고, 예의와 배려가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예의바르게 먼저 믿지 않는 가족을 배려하고, 양해를 구한다면, 불필요한 분쟁은 많이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것 분명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겠는가? 바울처럼 우리도 이전에는 너희와 같은 죄인이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아직 예수의 구원을 알지 못해서 저지르는 잘못 무조건 미워하고 배척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이들도 우리와 같이 구원받은 백성이 되게 할까? 좀 더 넓은 마음으로 품어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생각한다.

by 코이네 박동진 목사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의 창조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성경의 창조사건과 창조과학은 구분되어야 한다.

 과학 교과서에 진화론의 상징으로 대두된 부분들이 창조과학자들의 소송에 의해 삭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진화론을 대표하는 증거로 여겨지던 ‘시조새’,  현행 고등학교 과학교과서에 ‘시조새는 파충류에서 조류로 진화해가는 중간 단계의 생물’로 기술돼있습니다.그런데 창조론 단체인 교과서 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는 독일에서 열린 시조새 학회의 발표를 근거로 이 내용이 잘못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조새는 중간단계의 생물이 아니라 멸종된 조류’이거나 ‘깃털이 달린 공룡’ 등으로 수정해야 한다며, 2011년 12월, 교과부에 삭제나 수정을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이에 대해 교과부가 과학교과서 7개 출판사 가운데 3곳은 삭제 방침, 2곳은 단정적 표현완화, 1곳은 고치기 어렵다는 답변을 했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이 가열되었고,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는 여세를 몰아 앞으로 계속해서 진화론의 잘못된 부분을 개정해가겠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 과학계는 진화론과 창조론이 교과서를 중심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성경의 첫 시작은 이 세상의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로 시작되는 이 선언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존재의 근원을 밝혀주는 말씀이며, 이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라는 것을 명시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기에 모든 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 세상의 창조를 아주 리얼하기 그려줍니다. 창조 이전의 세계는 혼돈과 흑암 그리고 공허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런  “무”에서 세상이라는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면  “유”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목적을 아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신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주 계획적으로 질서있게 그리고 그 존재의 목적에 맞게 만드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말씀으로 만드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 창조에 대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의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정말 정교하고 정밀하게 창조되어 있습니다. 그 창조의 원리를 알면 알수록 감탄과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되며, 과학이 발전될수록 그러한 하나님의 솜씨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만하다보니 현재의 과학력이나 이해력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을 “비밀, 신비, 기적” 등의 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숨겨버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 반기를 들며, 성경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해보이겠다는 야심찬 노력이 바로 “창조과학”입니다. 이는 진화론 관점을 주류로 하는 현 시대의 과학적인 흐름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신앙적인 과학을 추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과학은 성경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데 힘을 쏟아, 신화로 치부되어지는 성경의 내용들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증명해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노력의 결실로 성경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많은 이들에게 성경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로 신앙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하였고, 성경을 더욱 진지하게 접근하도록 하는 좋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헌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은 그 한계를 좀 더 명확하게 인정하고, 과학적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새로운 연구 방향을 가져야 신앙인에게도 비신앙인에게도 그리고 과학계에도 더욱 좋은 영향력을 미치며 발전할 수 있습니다.

시조새화석

1. 성경은 과학책이 아닙니다.

창조과학은 이 사실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보여집니다. 지금은 과학적인 사고가 사람들의 의식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어떻게 하든 과학적인 논의를 해야 좀 더 사실적인 믿음을 가지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18세기 문예부흥과 근대화가 시작되고 나서 생겨진 풍조이며, 사람의 의식과 믿음의 양상은 과학의 시대를 넘어갈 수 있고, 또 다른 양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학 만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과학적인 설명이 현 시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과학이 더 발전하다보면 지금 진리라고 받아들여졌던 것이 얼마든지 수정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과학으로 성경의 내용을 충분히 증명하였다고 믿었던 사실이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 또는 과학의 발전에 의해 뒤집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과학적인 변화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접근해가야 창조과학이 신앙에 도움이 되는 학문으로 자리잡을 수 있고, 또 과학의 한 축으로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창조과학의 이론을 지지하는 배경으로 성경을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창조과학은 성경을 현대인들에게 좀 더 현실성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도우미로서 그 역할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 내용에 따라 신앙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때로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창조과학이 점점 발전하다보니 창조과학이 말하는 과학의 내용은 성경적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식으로 역이용되는 수준에 이르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잘못하면 억측일 수 있는 내용이 성경적이기에 더욱 과학적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창조과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지구의 나이를 6천년정도에서 길게 3만년 정도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하면, 아브라함 이전에 살았던 분들의 나이를 추정해서 되짚어 보면 에덴동산의 창조가 짧게는 6천년, 길게 잡아야 3만년을 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진리로 가정하고, 과학적인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지구의 나이를 이 시기에 적당한 것을 찾아내어 그 방법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이 정도가 맞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지구의 나이를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요? 과학자들에겐 미안하지만 성경은 지구의 나이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기원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에 있으며,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성실한 노력에 의해 이 세상이 탄생되어졌다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3. 창조과학은 과학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발전시켜 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창조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발전시켜나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단지 과학 기술의 발전이 아닙니다. 과학기술의 발전만을 생각하다보면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짓을 저지를 수 있으며, 이는 인간 세상에 더 큰 재앙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과학의 윤리성이  더 큰 문제가 되는 시대입니다. 이전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에 대한 논란과 앞으로 계속 발전될 유전자공학의 문제는 과학기술의 발전 이전에 과학 윤리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그 다음 발전 방향이 가름되어지는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무조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인류의 안정과 유익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며, 더 큰 부작용이 있음을 사전에 경고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그 기술을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창조과학자들이 해야할 중요한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학의 발전이 진정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 되도록 성경의 말씀에서 그 길을 찾고, 과학의 발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길을 열어가는 것, 바로 이 시대의 창조과학자들에게 주신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남자의 가슴을 뛰게 하는 교회

소토교회

교회여 남자의 심장을 뛰게 하라, 남성의 박진감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두둑한 교회

연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대 교회에 여성과 장년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렇게 장년층 특히 여성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그들을 끄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남자들과 청년들은 그들의 가치를 무시당하거나 나쁘게 보기 때문에 교회에 오길 꺼려한다고 한다는 말이 된다.

현대 교회는 부드러운 아내, 엄마와 같은 포근함, 섬세하고 정적인 현모양처와 같은 그런 여성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교회는 불안하고 긴박한 세상 속에서 그 인생을 잡아주는 영혼의 닻이며, 안전과 평안과 안위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여성 중심적인 교회에서 남성들은 혹 편히 쉴 수는 있을 지언정 그들의 가슴을 뛰게하며, 그리스도에게 헌신적인 사람이 되게 하긴 어렵다.

남자들은 도전 지향적이며, 짜릿함을 원한다.뭔가 자신이 주도적으로 일을 벌이고자 하는 기회를 찾고 있으며, 그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때로 위험도 과감히 받아들인다. 다른 남자들이 모험으로 사는 모습을 보면거기에 뛰어들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땀흘려 올라가서 깃발을 꼿고 싶은 저 높이 보이는 정상이 필요한 것이다.

미래지향적인 교회는 이런 남자들의 마음을 뛰게 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비전을 꿈꾸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큰 모험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큰 배를 저어가며, 서로 도전을 주고, 모험하도록 격려한다. 남자들은 이러한 배짱 두둑한 교회로 몰려드는 것이다.

남자들이 깨어나야 교회의 양적인 성장도 이루어진다. 왜냐면 남성들은 가족을 교회로 이끌고 오기 때문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엄마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 가족들의 17%가 엄마를 따르지만, 아빠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즉각 93%가 따라간다고 한다.

기독교의 가장 큰 역설 중 하나는 기독교의 가치는 여성적이지만, 삶은 공격적이고 남성적인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이제 교회가 그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남성들이 자기 위치를 찾아서, 남자들의 타고난 재능이 교회를 위해 드려지도록 남성적인 목소리를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