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장례문화 개발을 위한 10가지 아이디어
송길원 목사(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장)
1960년대까지 만해도 인간이 달에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사를 통해 자신의 임기 중에 달에 우주선을 보내겠다고 선언하고 난 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인간의 달 착륙이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눈을 돌려 현실을 보라. 지금은 한 해에도 수 차례씩 우주선이 오고 가고 그곳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체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몇 년째 생활하고 있다. 그 뿐인가. 얼마 전엔 세계 굴지의 기업인 힐튼호텔에서 달에 최고급 호텔을 짓겠다고 허가 신청을 냈고 그곳을 오가는 여행 상품을 개발하겠다고 덤벼들고 있다.
이처럼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소수가 뭉치기만 하면 무엇이든 바꿔놓을 수 있는 법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아무리 거대한 공룡처럼 자리잡은 전통 장례 문화라고 해도 소신 있는 몇 사람이 뜻을 합치기만 하면 결국에는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다.
이런 취지에서 기독교 장례문화 개발을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요즘은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천국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죽음 앞에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하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는 날”이라며 ‘천상의 생일’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라도 교회에서 죽음의 의미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자세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임종예비교실’이다. 그 대상은 죽음을 앞둔 사람일 수도 있고 가족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유족들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천국에서의 삶은 어떠하며 이를 위해 이 땅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제사와 묘지 문제처럼 반기독교적인 요소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임종예비교실을 운영하는 교회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하다못해 불교에서도 시왕전이나 명부전이라고 해서 죽음에 대한 교육이 있다는 것은 한번쯤 기독교인들이 반성해볼 일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죽음과 관계된 예식을 장례식(葬禮式), 혹은 장례예배라고 부른다. 풀어서 말하면 땅에 매장할 때 갖는 예식이나 예배라는 뜻이다. 이 말의 뜻을 잘 살펴 보라. 이 때 사람들의 관심은 땅에 묻는 매장에만 쏠려 있다. 그러기에 모든 장례식 분위기는 비극적인 이미지로 일관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땅에 묻히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는 천국에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따라서 땅에 묻히는 것보다는 그 이후의 삶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서는 장례예배라고 부르지 않고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른다. 또 미국장로교회에서는 ‘부활증언예배(A Service of Witness to the Ressurection)’이라고 부르고 미국연합감리교회에서는 ’죽음과 부활의 예배(A Service of Death and Ressurection)’이라고 부른다.
장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 백 가지의 절차를 남긴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것이 기독교 신앙에 적합하고 어떤 것이 위배되는 것인지 도무지 기준이 서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임종은 어떻게 준비하고, 사망 신고는 어떻게 하고, 장례 절차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등등 기독교 의식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장례 예식이다.
따라서 임종 준비 방법, 시신의 처리 방법, 임종 예배 드리는 법, 입관 전후에 할 일, 장례 예배 준비법 등을 순서대로 꼼꼼하게 유족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가족간의 갈등도 없애고 번거로움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임종 목회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교회별 장례의례 지침이다. 아직까지는 장례의례 지침을 마련한 교회들이 많지 않지만 바람직한 기독교 장례문화를 위해선 이러한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장례 문화 가운데 삼우제(三虞祭)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시체를 매장한 뒤 그 혼의 방황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보다 더 반기독교적인 의식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교회에서는 장사 지낸 뒤 처음으로 무덤을 살펴보는 것이니 ‘첫 성묘’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날짜도 굳이 3일이 아니라 편할 때로 해야 할 것이다.
또 49제(齋)라는 것도 있다. 이 말은 본래 불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람이 죽은 지 7일마다 한번씩 제사를 지내 일곱 번째가 되는 49일만에 그 혼백의 극락왕생이 결정된다는 뜻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밖에도 “명복을 빈다”는 말은 불교에서 사후의 행복을 비는 것을 뜻해 기독교 신앙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이다.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기를 쓰고 발뺌을 하는 사람들도 알아서 교회를 찾아올 때가 있다. 가족이나 친지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그것이다.
따라서 어렵사리 교회를 찾아온, 아니면 적어도 목회자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된 사람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장례 예배 자체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불신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부모에 대한 효도와 가족 사랑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주로 들려주어야 한다. 물론 천국과 부활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국의 명설교가 스펄전은 이에 대해 “장례 예배에서조차 전도하지 못한 설교가는 어떤 강대상에서도 설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의 신앙을 간단하게 정리한 간증문이나 회고록을 교회에서 만들어두라. 요즘 잘 발달되어 있는 컴퓨터나 멀티 미디어를 이용해 이런 문서들을 만들어 두었다가 그 내용을 장례 예배 시간에 조문객들에게 읽어줄 수도 있고, 아니면 장례 예배 후 유족들에게 선물할 수도 있다. 유족들은 물론 조문객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선물이 될 것이다.
장례 예배에 투자되는 시간을 현재보다 두 배로 늘려라. 장례 예식을 빨리 해치운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사실 장례 예식이 며칠 동안 지속되다 보면 유족들도 지치고 목회자들도 지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가까운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아픔은 아무리 오랫동안 위로해도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온 정성을 다해 유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천주교에서는 임종을 앞둔 사람을 위해 밤을 꼬박 새워 시편을 읽어주며 그들의 아픔을 위로한다.
솔직히 죽음을 앞둔 사람이나 그를 지켜보는 가족들이나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교회에서 가족들 모르게 노인들의 유언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해 두었다가 훗날 유족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얼마를 남겨준다는 유언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부탁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서울로 분가한 막내아들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아, 이 어미가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부탁하고 싶다. 이제 하나님 품으로 가니 아무 염려도 없지만 단 하나, 네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네가 그 소원만은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치자. 그 다음에 막내아들이 어떻게 행동했을 지는 자명한 노릇이다.
참 반가운 일이 하나 있다. 요즘 교회 차원에서 납골당을 마련하거나 화장을 장려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목회자들이 솔선하여 거룩한 죽음의 모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먼저 죽으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목회자가 솔선해서 시신을 기증하거나 장기를 기증하고 화장을 하도록 하면 된다.
목회자가 앞장서서 죽음을 초연하게 맞이하는 모범이 되고 나면 교인들이 변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목회를 하다보면 장례 예배를 계기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만큼 장례 예배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친밀한 교제와 신뢰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례 이후에 유족들의 아픔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위로해주는 아프터 서비스가 필수적이다. 한 목회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그 목회자는 유족에게 전해주는 조의금 봉투에 반드시 자신이 직접 쓴 위로 편지를 동봉한다.
그 편지에서 고인이 생전에 늘 하시던 말씀이나 교회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는지에 대해 그 동안 알고 지내온 내용들을 유족들에게 알려준다. 이를 통해 고인이 교회에 가졌던 애정이나 교회와의 유대관계를 표현함으로써 유족들이 교회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장지로 나설 때 목회자가 맨 앞에 서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십자가나 고인의 사진이 맨 앞에 선다. 또 어떤 교회에는 장례 예배 시간에 유족들을 위한 조사를 준비하지만 어떤 교회에는 아예 그런 순서 자체가 없다.
천주교는 이런 세세한 항목을 정리한 장례 의식서가 통일되어 있다. 하지만 개신교는 무어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교단마다 장례 방법이 다르고 의식서도 다르다. 또 교회마다 다르고 지방마다 다르다. 혹 교단에서 통일된 예식서를 마련해주었다 해도 목회 현장의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예식이 진행되고 있다. 아무리 장례 문화 토착화의 필요성을 인정한다지만 너무 다양해서 정신이 없을 정도다.
물론 한 사람의 힘이나, 일부 교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한국 교회를 대표할만한 연합기관이나 신학대학, 또는 연구기관에서 이에 관한 연구를 추진해 통일된 기독교 장례 지침이 나왔으면 좋겠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감히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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