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진홍 목사님을 비롯한 몇 분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대한민국 ‘건국’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고 들었다. 어떤 여성목사님은 일본이 제공한 1965년 청구권 자금으로 한국의 경제를 일으켜 주었을 뿐 아니라 최근 대법원 판결로 부각된 개인의 ‘강제징용’ 문제도 해결했다고 주장했단다. 이 글에서는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점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만 언급하려고 한다.
대한민국의 건국 혹은 ‘건국절’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2년 전에 끝난 국사 교과서 국정화문제와도 깊이 연관된 문제였다. 국정교과서를 시도하기 전에 사용된 검인정교과서에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보지 않고 ‘정부수립일’로 보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검인정교과서 저자들을 향해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으로 써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렇게 요청한 이유는, 북한은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은 그 보다 25일 전에 대한민국 ‘건국’이 아니고 ‘정부수립’을 했다고 하니 체면이 안선다는 것이다. 그 때 정부에서 몇 번 강요했지만 검인정교과서 저자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교과서를 아예 국정교과서로 만들어 정부가 원하는 대로 바꾸려고 했다. 이로 말미암아 몇 년 간에 걸친 국정교과서 투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검인정 교과서의 저자들과 한국의 역사학계는,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하여 그것을 교과서에 명기하여 가르치겠다고 한 데 대해서, 반대했는가. 이 문제는 최근 자유한국당의 원내 대표가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하고 한다는 말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도 제정된 적이 없다는 투로 언급했다고도 하는데 이 문제와도 서로 연관된다. 그 야당원내대표라는 분은 전에도 엉뚱한 말을 한 적이 있어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오늘 문제와도 관련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민주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들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팽배했다. 우리 선조들은 3.1독립선언 맨 첫머리에 “우리는 이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민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하여 한국의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독립을 선언하면 그 다음 순서가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은 미국도 그랬고 세계 1, 2차대전 이후의 약소민족도 그랬다. 3.1운동 때 민족지도자들은 ‘우리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겠다’고 재판정에서 당당히 말했다. 1919년 4월 10일 상해 김신부로의 어느 저택에서 민족대표 29명이 모여 그날 저녁 10시부터 그 이튿날 아침 10시까지 회의를 했다. 그들은 그 회의 이름을 ‘임시의정원’이라고 정했는데 지금 말로는 ‘임시국회’라는 말과 같다. 4월 11일 아침에 그들은 먼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임시헌장(헌법) 10개조를 발표했다. 그 제 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임”이다. 그 후에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고 안창호 내무총장 등 6부의 각부 총장을 임명하여 정부를 조직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3.1운동 후에 연해주와 서울(한성) 등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에 있다가 5월 23일 상해에 도착한 내무총장 안창호는 상해 연해주 한성의 제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통합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1919년 4월 11일에 제정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임시헌법 제 1조는 임정 하에서 다섯번의 개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1948년 제헌헌법을 제정할 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1911년 4월 11일에 건립된 대한민국은 통합임시정부를 통해 유지되었고 1940년에는 직할군으로 광복군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김구 이동녕 조소앙 차리석 같은 우파세력 뿐만 아니라 김규식 김원봉 김성숙 장건상 같은 좌파세력도 임시정부에 흡수되었고, 정당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형태까지 띄게 되었다. 중국 미국 영국 등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던 대한민국은 중국에서 27년간 임시정부 형태로 유지되다가, 비록 개인자격이지만,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게 되었다.
해방 전의 대한민국은 해방 후의 대한민국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회되었을 때 의장 이승만은 우리가 세울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그 해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의 연륜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표기했다. 이승만을 비롯한 당시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을 새로 건국한다고 보지 않고 1919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부활되었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제헌헌법 전문(前文)에는 “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이라고 명기하여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립되었음을 확실히 했다.
1919년에 건립되었으니까 1948년은 의당 대한민국 30년, 당시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들의 결재 서류에 ‘대한민국 30년’으로 한 서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 해 8월 15일 정부 탄생을 축하하는 날, 지금은 없어진 옛 총독부 건물 앞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라는 프라카드를 크게 써붙였다. 기분 같아서는 “대한민국 건국 국민축하식”이라고 하면 훨씬 품새가 났을 터인데도 당시 조상들은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립되어 지금까지 계승되었다는 것을 확증했다. 그 역사성으로 그들 스스로가 ‘건국의 아비지’로 추앙받을 수 있는 유혹을 뿌리쳤다. 이승만을 신주 같이 모시면서 또 이승만을 빙자하여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승만의 그 때 역사의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 대한민국 30년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고 혹시나 뒷날 사람들이 대한민국이 언제 세워졌는가에 대해 허튼 소리를 할까봐, 그가 의장으로 있던 제헌국회에서 앞서 언급한 제헌헌법 전문의 그 귀절을 만들어 내는 데에도 무던히 노력했던 것이다.
김진홍 목사님과 같이 지금도 대한민국 건국을 1948년 8월 15일로 주장하는 이들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이해하고 있는 이런 사실을 먼저 직시하기를 바란다. 참고로 2008년 이명박 정권이 ‘건국절’ 논란을 제기하기 전에는 정치인들 뿐만 아니고 일반 지식인들까지도 대한민국 ‘건국’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혼동하여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해한 적이 없지 않았으나, ‘건국절’ 논란과 국정교과서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건국’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확실하게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글은 이만열 교수님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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