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할 때 크게 보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실증적으로 검증가능한 범주를 벗어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사실이 아님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엄정한 팩트체크가 불가능한 사실이라는 뜻이다. 루돌프 불트만의 입장을 대략 여기에 넣을 수 있다. 이 입장은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과 원칙적으로 양립가능하다.
둘째는 날조된 주장이라는 입장이다. John Dominic Crossan 같은. 이런 입장도 ‘존중’하라고 하면 나는 거부한다. 역사적연구의 훈련을 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그의 논지는 비약이 많고, 증거가 허술하다. 대중적 저술가로 성공했지만, 역사가들에게 넓은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자극적이고 단정적인 주장으로 언론의 주목을 끄는데는 능력이 있다. 한국에 이를 적극 소개한 분도, 명성은 높으나 역사 분야를 다룰 역량은 갖추지 못한 분이라 기억한다.
팩트체크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부활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물증이 없어도 정황증거가 있을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의 탄생, 그리고 제자들의 태도이다. 예수는 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속에서 부활했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럴 동인을 제공한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거짓말을 지어내고,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을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무척 힘든 일이다. 예수부활의 역사성이 하나의 사건이라면 직접적 물증은 없지만, 강력한 정황증거가 존재하는 사건이다.
초대교회에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울은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그런 사람들을 언급한다. 이어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성도들의 부활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 가운데, 예수의 부활은 반대자들도 인정하는 공동의 전제였다.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인정했던 사실이라면, 제법 강한 정황증거 아닌가?
부활의 역사성과 함께 중요한 것은 부활의 현재성이다. 부활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논증했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 세상 어디에서 그런 일이 일어 났겠지’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매주, 매일 모여서 부활을 경축하고, 가는 곳마다 부활을 증거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증거할 때마다 성령이 임하신 까닭이다. ‘전도의 미련한 것’을 믿게 하신 까닭이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이들이 부활로 인해 변화된 인식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존중 받았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시작된 새 세계였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종이나 자유자도, 헬라인과 유대인의 구분도 없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시작된 새창조 안에서” 라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부활의 현실을 살아내는 공동체가 있었다. 그 세계가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에, 핍박 가운데도 기뻐했고, 산 채로 불에 타는 현장에서도 확신의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불트만이 말한 것도 부활의 역사성보다 현재성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내 입장은 이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역사성 없이 현재성이 가능하겠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맞다. 요는 우리가 부활을 사는 것이다. 부활의 현재를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누리고 전하는 것이다. 부활의 현재가 중요하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부활의 현재를 살 수 있을까? 이 세상에 그런 특이한 사고와 ‘고상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 있을 가능성,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상상도 잘 되지 않는다.
(포항제일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