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용품이 변변치 않았다. 몽당연필을 볼펜 깍지에 끼워서 침을 발라가며 썼고 표지에 그림이 있고 줄이 그어진 노트는 언감생심, 누런 연습장에 대나무 잣대로 깍두기 사각 줄을 그어서 써야만 했다. 지금이야 잣대가 투명 플라스틱에 정확한 눈금이 표시되어 줄을 긋기가 매우 편리하지만 그 때만해도 눈대중으로 대략 수평을 잡아가며 줄을 그었다. 신중하게 줄을 그었는데도 중간쯤 가면 한쪽이 좁아지거나 넓어져서 엉망이 될 때가 많았고 마지막 줄은 한 줄을 더 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속상했던 적이 많았다.
‘캐논’(이탈리아어: canon, 독일어: Kanon)이란 말을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알려준다. ‘측정, 표준이라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κανων에서 유래된 어휘이다’ 좀 더 찾아보니 ‘고대 헬라어 κανων 및 라틴어 canon을 번역한 어휘란다. 그리고 κανων은 ’곧은 막대기‘ ’자‘ 등을 의미하나, 상징적으로 ’규범‘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교부들은 이 용어로 기독교에서 경전으로 인정받는 책들을 지칭하였는데 특히 요세푸스는 Contra Apionem 1.42, 43에서 ‘정경이란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서 특정한 기간에 저술된 한정된 수량의 현존 문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정의 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듣고 묵상하는 성경을 ‘정경’즉 ‘캐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경 즉 캐논은 ‘신앙과 생활의 기준 또는 잣대’라는 의미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정경’이 무너지면 신앙은 더 이상 존립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도 근간을 이루는 규범이 무너지면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결국 버틸 수 없게 된다. 잣대가 틀어지면 균형을 잃게 되고 본질이 훼손되어 기울어진 공동체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리 교단은 신앙과 신학에 있어 균형 잡힌 고백 위에 세워졌다고 자부한다. 단지 크기와 규모만을 따져 소위 장자 교단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교단에 속한 교회와 목회자들은 우리 교단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크고 교단의 교리나 헌법과 규칙 또한 모든 교단의 모범이 되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교세 또한 코로나시기를 거치면서 감소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십자가 중심, 말씀 중심의 건강한 신앙과 신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주요 6개 교단 가운데 우위에 있다.
그런데 교단을 초월하여 교회의 상징성이 큰 ‘명성교회의 부자 세습’논란이 촉발되고 사회적으로 기독교계의 메가톤급 이슈가 되면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산, 재생산되었고 특히 실망한 젊은 청년교인이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문제가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지만 명성교회 세습 문제가 결정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는 이론에 누구든 반론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바라보는 교회의 기준은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라 ‘도덕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지만.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는 말처럼 세상은 진정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대로 살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함량 미달이라고 여겨질 때 싸늘하게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이 거룩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도덕성이 무너지게 될 때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게 되고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경각심으로 높은 차원의 도덕성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교단의 헌법의 기준은 104회 총회에서 헌법 정치 28조 6항을 잠재한 수습 안을 통과시키면서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교단의 책임 있는 사람들은 버젓이 헌법이 살아 있음에도 모든 문제가 끝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법을 잠재하고 결의한 수습 안이란 ‘법은 있으나 명성교회에게 만은 법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골자다. 누구에게나 공명하고 정대해야 할 교단의 ‘캐논’이 명성교회라는 권력과 금력에 걸려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 교단의 법정신은 크게 훼손되어버렸다. 힘없는 교회나 지키는 법이 되었고, 법을 지키는 것이 무능하고 바보라는 인식이 깊이 각인 되어 버린 것이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이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몰맨 불만의 소리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 교단은 어떤 법을 적용하더라도 ‘이중 잣대’, 또는 ‘틀어진 잣대’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게 되었다. 이 틀어진 잣대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이제라도 법치를 제대로 세우든지, 명성교회가 교단을 떠나든지 둘 중 하나밖에는 없다.
그러함에도 교단 임원회는 108회 교단 총회 장소로 명성교회를 선정해서 큰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다. 명성교회 문제가 다 해결되었으니 교단적으로 치유와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다. 그래서 총회 기간에 1만 명이 모이는 대각성 치유 집회까지 기획해 놓은 상태다. 대체 누구를 위한 치유인가? 무엇을 위한 치유란 말인가? 어떻게 치유에 대한 온도 차가 이렇게 클 수가 있단 말인가? 필자는 앞선 논고를 통해서 명성교회 총회 개최에 대한 유감을 밝힌 바 있기에 더 이상 언급을 피하려고 한다. 다만 이제라도 고집부리지 말고 냉철하게 손익계산을 해 볼 필요가 있음을 권고하고 싶다.
지금 실시간으로 108회 명성교회 총회 장소 반대 서명이 돌고 있고 서명자가 벌써 1천 500명이 넘어서고 있다. 이에 심각성을 느낀 7개 대형교회가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가 적극 협력 할 테니 총회 장소를 바꿔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이미 예약해 놓은 숙소 등이 문제가 된다면 접근성이 용의 한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총회를 개최하면 비용을 부담하겠노라 고도 했다. 가뭄에 단비 같은 제안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희망도 보였다. 그런데도 교단 임원회는 그간 총회 장소를 변경했던 예가 2번씩이나 있었음에도 법을 앞세워 장소변경이 어렵다고 했다. 묻고 싶다. 명성교회 사태 수습 안은 되고, 자칫 교단이 깨질 만큼 중대한 총회장소 문제에 대해서는 법을 잠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체 어떤 문제가 큰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이중 잣대의 행태인 것이다.
대체 교단의 잣대는 왜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가? 유독 명성교회 앞에 서기만 하면 작아지는가? 명성교회 세습 문제를 수습 안으로 덮어버린 것으로 교단의 법은 이미 이중 잣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에 비해 총회 장소를 변경하는 것은 이미 선례도 있고 임원회가 결의하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법을 앞세워 몽니를 부리고 있는가? 이렇게 법이라는 잣대를 편의에 따라 고무줄처럼 맘대로 늘였다 줄였다 해도 되는 것인가?
어릴 적 연습장(작기장)에 정성껏 줄을 그었는데도 줄이 틀어져 버렸을 때 몹시 속이 상했었다. 어쩌면 줄도 그어지지 않은 허접한 연습장 같은 사역의 현장에서 대나무 잣대 같이 열악한 환경을 온 몸으로 버티며 사역의 줄을 긋고 있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교단이 이중 잣대로 그어놓은 줄로 인해 실망과 상처를 크게 받고 있을 것이다. 줄이 틀어졌다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귀를 막고 있는 높은 분들에게 “니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라며 체념에 가까운 실소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이제라도 우리 교단이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세상 앞에 납작 엎드려 회개할 뿐 아니라 사죄함으로 틀어진 잣대를 과감하게 던져 버리고 ‘캐논’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소망하며 ‘Ad Fontes !!’를 목 놓아 외쳐본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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