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 )
환절기라서 감기 기운이 있다는 사람이 있다.
계절이 바뀌지 말아야 할까, 건강관리를 잘해야 할까?
히브리서 독자들이 그런 경우다.
그들이 갈등을 느끼지 않으려면 어려운 문제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튼튼하게 자라야 한다.
뭔가 이상하다.
한번 얻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 법인데 어떻게 된 영문일까?
게다가 회개해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도 있단 말인가?
한번 빛을 받았다는 말은 복음에 눈을 떠서 밝은 세상을 보았다는 뜻이다.
한번은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이라는 뜻이다.
(횟수의 뜻이라면 ‘한 번’이라고 띄어 써야 한다.)
한번 빛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하늘의 은사를 맛본다는 얘기는 개인적인 체험에 초점이 있는 표현이다.
“하늘의 은사가 어떤 것이냐?”보다 그것을 맛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점심을 먹었다는 얘기는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요기를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선하다.
하지만 아무나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자기한테 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읽어본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세는 종말의 때를 말한다.
메시야 시대가 내세다.
말씀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이 메시야 시대를 누리는 모습을 얘기한다.
그런 사람이 다시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
6a절을 눈여겨보자.
“회개할 수 없나니…”라고 하지 않았다.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고 했다.
기독교 기본 교리를 가장 잘 설명한 책이라면 단연 로마서를 꼽을 수 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 로마서에 상세히 나와 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구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신앙 갈등을 겪는 사람들한테 흔들리지 말고 신앙생활 잘하라고 권면하는 책이다.
같은 공동체에 실제로 배교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은 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내일은 누가 배교할지 모른다.
본문은 그런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한번 구원 얻었다가 타락한 사람은 그것으로 끝이다. 회개를 해도 하나님이 안 받아주신다.”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같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 신앙이 어떤 것인지도 체험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떨어져나가면 그다음에는 대책이 없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혹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한번 얻은 구원이 정말 영원한 구원일까?
신자가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될까?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사람은 몰라서 죄를 범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한 사람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알면서도 짐짓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이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지 않습니까?”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차피 회개할 사람들이 아니다.
애초에 예수님을 영접한 적도 없기 때문에 회개라는 말을 쓸 것도 없다.
한번 얻은 구원은 영원하다.
혹시 히브리서 독자 중에 타락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신앙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자기가 신자라면 하나님이 견딜힘을 주실 것이다.
혹시 견디기 싫다면 스스로 신자가 아닌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요컨대 신앙은 갈등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