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로마의 평화와 비교되는 예수의 평화

로마의 평화와 비교되는 예수의 평화

 

로마의 장군들이 로마성에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하는 것은 그들이 격렬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모습을 흉내내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로마 개선장군의 입성이 로마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많은 전쟁에서 강력한 군대를 이끌며 승리한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예수의 평화는 그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므로 사탄을 물리치신 결과로 이룩된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놀라운 정치적 군사적 업적물인데 반해 예수의 평화는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이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평화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이룩된 것이지만, 예수의 평화는 반대로 그 로마의 막강한 힘에 의해 희생되므로 이룩된 평화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초라한 예루살렘 입성은 막강한 군사력이나 정치적 권력 같은 것은 모두 포기하고 완전한 무방비 상태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입성’이라하고, 종려주일이라는 절기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상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행렬이 완전히 희극적인 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입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와 같은 이 땅의 나라들은 강력한 군사력과 아울러 뛰어난 정치력 그리고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워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모든 힘이 거부되고 오로지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세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렇게 초라하였고, 그에게 나온 사람들은 맹인과 저는 자들 그리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지르는 어린이들뿐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병든 자들과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어린이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시민의 표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기존의 모든 힘을 거부한 것이며, 기존의 모든 종교적 세력을 거부하신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행동에 어리둥절하였으며, 이런 사람이 메시야라고 믿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성 후 성전에 올라가셔서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두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런 행동을 보고 종교지도자들이 나와서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막강한 힘이나 혹은 수만 명의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왔더라면 무슨 권위로 그러는지를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 권위도 없어 보이는 예수가 너무도 당당하게 메시야처럼 행동하니까 그 권위의 근거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이 땅의 통치자들이 갖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한 권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고 오직 행동으로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입성 후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자기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고,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은 오지 않고 버림받은 자들이 오히려 그 잔치 자리에 앉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농부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타국에 가서 추수시기에 종을 보냈는데 농부가 그 종들을 죽이기를 여러 차례 한 끝에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이 그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이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듣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바로 당신들이 악한 농부들이며 당신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암시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당신들이 나를 쓸모 없다고 생각하고 버리지만 바로 나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이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신랄한 비유를 이 세상 힘의 논리에 젖은 종교지도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저들의 눈에 예수님은 한낱 몽상가요 귀신 들린 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신 권위와 영광과 능력을 그대로 갖고 오시지 않고 그것을 다 비워놓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종의 모습’이란 권위도 영광도 능력도 없는 초라한 모습을 뜻합니다. 이사야서 53장 1절에 보면,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그 놀라운 창조의 능력도, 눈부신 하늘의 영광과 위엄도, 아름답고 멋진 풍채도 모두 쏟아놓고 완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이런 종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땅의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뚜들겨 맞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도록 완전 무장해제 당하신 채 오셨습니다. 비유하여 말하면, 총알과 대포가 빗발치는 전쟁터 최일선에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싸우러 나간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그 전쟁에서 죽으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죽기 위해 오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전쟁하러 오신 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무장 없이 적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에 터벅터벅 나귀 타고 들어가시다니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그는 적의 소굴에서 붙잡혀 고초를 겪으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로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 53:7)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사 50:6) 그는 아무 힘없는 종처럼 무방비 상태로 가해지는 모든 고난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신 대로 행동하셨습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런 나약한 종교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힘을 숭상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더구나 요즈음 같이 세계가 하나의 촌이 되면서 가진 자의 막강한 힘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때에 가진 것마저 나누어주고 가난한 자, 무기력한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교훈이 저들의 귀에 들릴 리가 없습니다. 힘을 숭상하는 자들만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해야 할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렇게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믿음도 없고, 용기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순이며, 극복하기 힘든 높은 장벽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며 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런 예수님의 본을 따라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비폭력 지향적으로 나가는 대신에 기독교의 세력을 점점 확장하여 정치계에 영향력을 구축하고, 사회 전반에 들어가 무시 못할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를 잡으려 합니다. 우리도 권력의 맛에 길들여지고, 막강한 힘이 가져오는 놀라운 효과에 매혹되면서 교세를 확장하고 그 교세를 배경으로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며 기독교가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바로 이런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다시 겸손하게 내려앉아 자기를 비우고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며, 모든 기득권이 가져오는 온갖 혜택을 거부하고 모든 기득권을 잃고 당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에 비로소 교회의 참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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