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와 이기적 신앙의 그림자

이스라엘에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열두 지파 중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누가 선봉에 나서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지파가 나서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울며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졌습니다. 세 번째에는 금식하며 기도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금식 기도’의 효과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공동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정한 계획을 밀어붙이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을 요구했습니다. 기도해도 안 되니 울면서 기도하고, 그것도 안 되니 금식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만 더해갔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이겼습니다. 그때 동원된 병력은 이스라엘이 40만 명, 베냐민 지파는 2만 6천 명이었습니다. 열한 지파가 한 지파를 이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싸움에 간섭하셨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또 이스라엘을 통해 베냐민 지파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편도 들지 않으십니다.

기도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 

한때 우리나라 기독교에는 『야베스의 기도』 열풍이 불었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는 역대상 4장 10절 말씀은 아마도 그 책이 유명해지면서 널리 알려졌을 것입니다. 찬양으로까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그 책이 사람들을 기도의 자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도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심어주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기도만 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책에는 저자 브루스 윌킨슨이 북 캐롤라이나로 중요한 강의를 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던 중, 대형사고로 인해 도로가 막히자 비행기 출발을 지연시켜 달라고 기도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독자들은 “기도 앞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기도가 아닐까요? 자신의 일정 때문에 다른 승객들의 계획이 엉망이 되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강요하는 분이 아닙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사랑에 빠진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40일 새벽기도를 작정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점입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아내에게도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종교 행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입니다.

만약 그 여성이 브루스 윌킨슨에게 상담을 요청한다면 그는 아마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언급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했던 비행기 지연 기도와 그 여자의 기도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지,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며,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할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와 이기적 신앙의 그림자by 강학종 목사

(하늘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