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창 4_25 셋의 탄생 폭력의 유산을 넘어서 경건의 계보로

폭력의 유산을 넘어서 경건의 계보로

본문: 창세기 4장 23절–26절

2025.3. 29. 소토교회 아침기도회 설교

 

 

  1. 라멕의 노래, 잔인함인가 두려움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오늘 본문은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운 한 인물의 목소리로 시작됩니다. 그 사람은 라멕입니다. 가인의 후손이죠. 그는 아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으라!나의 상처로 인하여 사람을 죽였고,나의 상함으로 인해 소년을 죽였노라. ”

이것이 그 유명한 라멕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폭력과 복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법칙을 상징하는 선언문이에요. 그는 ‘상처 받았기 때문에 죽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하죠, 가인을 위한 벌이 7배라면 자기는 무려 77배의 복수가 있어야 한다고.

자,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이 말은 교만의 외침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불안과 두려움의 가면이 숨어 있다는 겁니다. 왜 그가 굳이 아내들 앞에서 이 말을 했을까요? 자기 잔인함을 자랑하려는 걸까요? 아니요. 그 말은 오히려 “나는 무섭다. 나를 건드리지 마라”는 방어적 외침입니다. 그의 마음엔 이런 심리가 있었을 겁니다. “나는 상처받는 게 두렵다. 그래서 먼저 공격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다. ”이런 논리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합니다. 복수가 자기 보호처럼 여겨지고, 공포가 리더십이 되고,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삶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가인의 계보, 라멕의 노래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1. 셋의 탄생,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

 

그러나 이 어두운 흐름 속에, 하나님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다시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이는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세우다, 대신하다”, 즉“하나님이 다른 씨를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셋은 단순한 세 번째 아들이 아닙니다. 회복의 씨앗이며, 경건의 계보의 시작입니다. 셋의 아들 에노스 시대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자,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동안 인간은 폭력과 자기 보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라멕은 ‘내가 나를 지킨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에노스의 시대가 오자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죠.

성도 여러분, 이쯤에서 우리가 상상해 봐야 할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가인이 셋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아벨은 내가 죽였고, 이제 나만 남았으니 하나님도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 ”그는 자신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착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셋을 통해 다른 씨를 세우셨습니다. 가인의 입장에선 이것이 거절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어요. “나는 여전히 추방자고, 하나님은 새로운 사람을 택하셨구나…”그 순간, 가인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섰습니다. 계속 도망치며 자기 방어의 껍질 속에 살 것인가? 아니면 무너진 자리에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제 중요한 질문입니다. 가인이 다시 아버지 아담에게 돌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단 한 가지, 진심 어린 회개입니다. 회개는 그냥 “미안합니다”가 아닙니다.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에요. 죄책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하는 발걸음의 전환입니다. 탕자도 그랬습니다. 그는 먹을 것도 없어지고, 돼지 먹이를 부러워할 정도로 바닥까지 내려갔죠. 그때 그는 기억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넘치거늘…” 여러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첫걸음은 기억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얼굴, 따뜻한 품, 그 손길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을 다시 돌이키시려면 그가 만든 모든 인생의 방어체계가 무너져야 했을 겁니다. 자기 힘으로 쌓은 성, 권위, 성취가 다 무너진 후에야 그는 ‘돌아갈 집’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가인이 스스로 그 기억을 할 수 없을 만큼깊은 두려움과 자기 방어에 갇혀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셋의 계보가 이어지며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했죠. 그 말은, 이제 누군가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배가 아닙니다. 바로 누군가를 대신해 부르짖는 기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보자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가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지만, 셋과 에노스는 불렀습니다. 그 기도가, 그 예배가, 가인 같은 영혼을 대신해 하나님 앞에 올려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누군가의 기도를 통해 길을 여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 주변에도 마음의 문을 닫고 하나님과 멀어진 가인들이 있지요. 그들은 돌아가고 싶어도 길을 몰라서, 두려워서, 자신을 포기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겁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요? 바로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 안고, 그가 부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대신 부르는 것,그게 중보기도입니다.

부모의 기도, 교회의 기도부모는 자식을 위해 울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가인이 돌아오게 하소서.” 그 기도가 가인의 삶에 돌아올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교회는 믿음의 중보자가 되어, 이 시대의 ‘가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상처 속에 숨어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옵소서. 자기가 죄인인 줄 알지만, 용서를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비추어 주옵소서.” 그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돌이킬 생각’을 넣어주시는 분입니다.

 

  1. 아담과 하와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마음도 묵상해 봐야 합니다. 그들은 두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아벨은 죽었고, 가인은 떠났습니다. 얼마나 가슴 찢어졌을까요? 하와는 아마 울며 고백했을 겁니다. “이게 다 우리 탓 아닐까… 내가 그 선악과를 따먹지만 않았더라면…”그런데, 바로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셋이라는 회복의 씨앗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와가 셋을 낳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그 말 속엔 눈물도 있고, 감사도 있고, 하나님을 향한 작은 희망의 불씨도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셋’은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가인의 노래와 셋의 탄생 사이에 선 채로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 안에도 라멕처럼 상처를 감추기 위한 폭력이 있진 않습니까? 혹은 가인처럼 나만이 남았다는 착각, 그래서 하나님도 나를 어쩔 수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교만이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셋’을 주시는 분입니다. 죄로 인해 무너진 자리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생명의 씨앗을 심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 하나님의 사랑은 늘 돌아올 길을 열어두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도 셋이 태어나길 바랍니다. 그 이름처럼,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고, 대신하여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가정과 삶에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나는 언제 라멕처럼 상처를 감추기 위해 강한 척하거나, 분노로 반응했던 적이 있었나요?그때 하나님이 아닌 무엇으로 내 마음을 지키려 했는지 돌아보며 묵상해보세요

2. 나의 인생에도 ‘셋’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회복의 씨앗이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3.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 ‘가인’처럼 외롭고,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중보나 섬김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 기도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라멕처럼 강한 척하지만,사실은 가인처럼 두렵고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우리를 대신하여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셋의 의미를 다시 새깁니다. 우리 마음의 무너진 자리마다 셋이 태어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부르게 하시고,돌아올 용기를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by 박동진 목사(소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