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글쓰기,틀에 박힌 생각에서 탈출하기
목회자는 다양한 본문과 주제로 설교한다. 설교의 마지막은 적용이라는 점에서, 그 모든 주제는 결국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변화를 가장 많이 주문하는 목회자가 변화를 제일 꺼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목회자의 변화와 고집
세상은 급속하게 확확 변하는데, 목회자와 교회는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헛다리 짚을 때가 많다.
세상 문화에 편승하라는 뜻이 아니다. 급변하는 시대를 읽어내서 대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꼰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세상이 변한 줄 모르고 과거의 얘기만 어제도 오늘도 무한 반복하는 사람이다.
꽉 막힌 사람일수록 과거에 성공했던 방법, 통하고 먹혔던 방법을 계속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 시대가 많이 변했는데도 말이다. 언제가 한번은 과거에 큰 인기를 끌었던 ‘문학의 밤’을 다시 부활하자고 열변을 토하는 분까지 보았다.
“나 때는 말이야!”에서 “너 때는 말이야!”라는 사고로 전환하지 않으면, 복음의 역주행을 기대하기는커녕 시대를 역행만 하게 된다.
목회자의 고립과 프레임
목회자의 활동 반경은 주로 교회 안으로 국한될 때가 많다. 돌아서면 ‘새벽, 수요, 주일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한국 교회 목회자이기에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어디 그뿐인가? 온갖 종류의 훈련과 프로그램까지 준비하고 인도해야 한다. 심방을 하고 뉴스와 신문을 본다고 하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고 고립되기 딱 좋은 환경인 셈이다. 몸의 고립은 종종 생각의 고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립은 “이게 정답이야. 이게 맞아.”라는 틀 속에 갇히는 일이다. 이것을 프레임이라고 한다.
프레임은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한다. 오래전 이사야 선지자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9)’라고 개탄했다.
박영호 목사님이 쓰신 <시대를 읽다 성경을 살다>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미 우리 안에 나름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고, 그 프레임 속에서 하나님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흔들고 교정해 줄 수 없습니다.’
목회자에게도 저마다의 프레임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목회 철학’이다. 이 철학은 성경에서 비롯된 경우도 많으나, 한 꺼풀 벗겨보면 개인적인 성향이나 경험과 스타일에서 비롯된 경우가 다반사다.
청년 때 다니던 교회에서는 기타를 치는 일이 금기시되었다. “어떻게 여성의 몸매를 형상화해서 만든 악기로 찬양할 수 있느냐?” 하는 담임목사님의 목회 철학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많다. “설교하기 전에는 먹으면 안 된다. 설교하면서 물을 마시면 안 된다. 주일예배 시간에는 찬송가만 불러야 한다.
보혈 찬송을 부를 때는 박수하면 안 된다. 영성 있는 목회자라면 통성이나 방언으로 기도해야 한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모두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진리처럼 떠받들고 신봉할 때다. 자신의 목회 철학을 죄악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을 때다. 이는 틀에 박힌 목회자, 꽉 막힌 목회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확고해도 너무 확고한 목회 철학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프레임을 깨드리는 글쓰기
내게도 진리가 아니건만, 진리 못지않게 떠받들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프레임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나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욱 글쓰기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를 하다 보면 내게 있는 문제를 자가 진단하는 일이 잦다. 그 가운데는 그릇된 프레임으로 야기된 문제도 상당하다. 이런 점에서 내게 글쓰기는 프레임을 깨닫고 또 깨뜨리는 도끼와 같다.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한 말이다. 책만 도끼가 아니다. 글쓰기도 그에 못지않은 도끼다. 여기저기서 나도 모르게 형성된 틀을 깨부수는 연장일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하나의 글을 탈고할 때마다 하나의 생각에서 탈피한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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