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강한 술람미 여인의 질투

죽음보다 강한 술람미 여인의 질투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8:6)
 
이 세상 사람 몇 명이 죽으면 사람들이 더 이상 죽지 않게 될까?
세계 인구 77억 중에 70억이 죽으면 나머지 7억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생명이 있으면 죽음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모든 생명이 다 죽기까지 죽음은 족한 줄 모른다.
사랑이 바로 그렇다.
사랑은 만족을 모른다.
 
데이트를 하는 커플이 조조할인 영화를 보는 것은 할인 혜택 때문이 아니라 일찍 만나서 오랜 시간 같이 있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침 8시에 만나서 밤 10시에 헤어지면 14시간을 같이 보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와! 오늘 데이트 원 없이 했다.” 하고, 뿌듯하게 여기지 않는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어? 저기 버스 왔다. 갈게!”라는 식으로 금방 헤어지지 않는다.
일단 세 대 정도는 그냥 보낸다.
그렇게 헤어졌으면서도 버스에 타자마자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집에 가면 또 통화한다.
사랑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또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난다고 했다.
아무나 질투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질투를 한다는 얘기는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자기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속성이 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한테 그런 질투를 얘기한다.
솔로몬의 마음을 독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솔로몬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어도 술람미 여인이 질투를 하지 않으면 정숙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이다.
솔로몬한테 관심이 없으면 솔로몬이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든 상관이 없다.
이 얘기는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솔로몬만 술람미 여인한테 질투의 대상이 아니다.
술람미 여인 역시 솔로몬의 질투 대상이다.
 
여호수아가 유언을 남기면서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백성들은 입을 모아 자기들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하신 것을 밝히 아는데 왜 다른 신을 섬기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여호수아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장하다. 너희가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겠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전혀 엉뚱한 말을 한다.
“아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여호수아의 말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섬기는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애인이 있으면 주말에만 시간을 비우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몰랐다.
 
요즘말로 바꾸면, 교회에 등록해서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비추면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인 줄 알았다.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줄 몰랐다.
부자 청년으로 얘기하면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준 다음에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줄 몰랐다.
 
이런 얘기가 부담스러운가?
우리가 하나님을 부담 없이 섬겨도 하나님이 늘 우리를 맞아주었으면 좋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애완견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다.
애완견한테는 자기가 기울이는 사랑과 동등한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다.
적당하게 애교만 부려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으로 대접하신다는 뜻이다.
 
by 강학종 목사
(하늘교회 담임목사, ‘거룩한 에로스 아가’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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