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일제식민지 잔재를 벗지 못한 법률 용어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억울한 사정을 안고 재판정에 들어선 시민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현실은 주권자로서의 존엄이 아니라 거대한 ‘언어의 장벽’이다. 판사와 변호사가 주고받는 대화, 집으로 송달된 판결문에 적힌 문장들은 한글로 쓰여 있을 뿐, 실상은 일반 대중이 스스로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문에 가깝다.
얼마 전 언론 보도에 대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에서 재판부는 “보도 내용은 허위이지만, 위법성 조각 사유가 인정된다”며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 이 문장을 보고 뜻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시민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여기서 ‘조각’은 흩어진 파편이나 나무를 깎는 조각(彫刻)을 뜻하지 않는다. 막을 조(阻)에 물리칠 각(却)을 써서 ‘막아서 물리친다’, 즉 책임을 없애준다는 의미다. 기사 내용이 사실과 달라 피해가 발생했더라도 공익을 위해 충분한 취재를 거쳤다면 법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책임이 배제된다”거나 “위법하지 않다고 본다”는 명쾌한 우리말을 두고, 법원은 왜 굳이 ‘조각’이라는 알쏭달쏭한 조어를 고집하는가?
이유는 단순하지만 뼈아프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시절 일본 학자들이 서구 법학을 번역하며 억지로 조합한 조어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재판소를 거쳐 해방 후 한국 법전에 고스란히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어 Rechtfertigungsgrund(정당화 사유)를 일본 법학계가 ‘違法性阻却(이호세소캬쿠)’로 옮겼고, 우리는 그 낡은 번역어를 반세기가 넘도록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대물림해 왔다.
이러한 일본식 법률 조어는 법정 도처에 똬리를 틀고 있다. 법률 문서에서 ‘선의(善意)’는 착한 마음이 아니라 ‘사정을 알지 못함’을 뜻하고, ‘악의(惡意)’는 나쁜 마음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는 일은 ‘독촉’이 아니라 ‘최고(催告)’가 되고, 제때 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하는 행위는 ‘해태(懈怠)’라 불린다. 대략의 사유를 증명하는 일은 ‘소명(疎明)’이 되며, 요건을 갖추지 못한 소송을 물리치는 결정은 ‘각하(却下)’가 된다. 물건을 도로 찾아오는 일은 ‘환취(還取)’, 청구를 타당하다고 받아들이는 판결은 ‘인용(認容)’이라 적는다. 일상 언어와 완전히 괴리된 이 낯선 단어들이 21세기 대한민국 법정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인 언어로 행세한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이 고도의 학술적 정밀성을 담고 있어 섣불리 바꿀 수 없다고 항변한다. 수십 년간 축적된 판례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법적 안정성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정밀성은 ‘모호한 권위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진정한 개념적 엄밀성은 구성원 누구나 오독 없이 뜻을 파악할 수 있는 투명성에서 출발한다. 법학의 본산인 독일이나 프랑스 역시 난해한 라틴어 법률 표현을 자국어로 끊임없이 다듬어 왔으며, 영미 법조계 또한 시민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쉬운 법률 언어 운동(Plain English Movement)’을 법제화했다.
반면 우리 법조계는 왜 여전히 100여 년 전 일본의 제국의회 법전 어휘를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감싸 안고 있는가? 이는 법적 안정성에 대한 고뇌라기보다, 난해한 어휘를 독점함으로써 법적 지식을 특권화하고 시민을 소외시키는 기득권적 타성에 가깝다. 법의 말이 어려울수록 시민은 스스로 권리를 지키지 못하고 법조 전문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언어의 장벽은 곧 사법 접근권의 장벽이며, 민주주의의 후퇴다.
언어는 생각의 틀을 규정한다. 민주공화국의 법은 소수의 전문가 집단이 휘두르는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이 일상의 갈등을 공정하게 조정하기 위해 맺은 ‘약속의 언어’여야 한다. 법전에 박혀 있는 일본식 번역어와 낡은 한자어를 걷어내고 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명쾌한 우리말로 판결문을 쓰는 일은 단순한 국어 순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사법 주권을 주권자에게 돌려주는 가장 기본적인 탈식민적 사법 개혁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