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출애굽기 22장 25절은 오랫동안 교회 안팎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모든 형태의 이자는 금지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중세 교회는 이자를 본질적으로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했고, ‘돈이 돈을 낳는 행위’ 자체를 죄악시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이 본문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읽어낸다.
그는 이 말씀을 경제 행위의 기술적 규제가 아니라, 가난한 형제를 대하는 신앙인의 윤리로 이해했다.
칼빈에게 출애굽기 22장 25절의 핵심은 ‘이자’가 아니다. 본문이 분명히 지목하는 대상은 “너와 함께한 내 백성 중 가난한 자”다. 즉, 이 말씀은 상업 활동이나 투자 수익을 논하는 조항이 아니라, 생존의 벼랑 끝에 선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묻는 율법이다.
칼빈은 말한다. 이 구절은 “돈을 빌려주되 자비의 손으로 하라”는 명령이며, 궁핍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지 말라는 경고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받는 순간, 그것은 도움이 아니라 착취가 된다. 그때 신앙인은 형제를 ‘이웃’이 아니라 ‘수익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칼빈이 이자 자체를 절대악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성경이 이자를 무조건 금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랑과 공의를 해치는 이자”를 문제 삼았다. 상호 이익이 되는 거래, 가난하지 않은 자 사이의 정당한 금융 행위까지 죄로 묶는 것은 성경의 의도를 벗어난 해석이라고 보았다.
칼빈이 특히 주목한 표현은 본문 속 “채권자같이 하지 말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율이 아니라 태도다. 압박하고, 독촉하고, 상대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채권자의 자세는 신앙인의 삶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돈을 빌려주는 순간에도 형제는 형제여야지, 관리 대상이나 통제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칼빈은 이자를 허용하되, 엄격한 윤리적 울타리를 세운다. 가난한 자에게는 받지 말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 탐욕이 목적이 되지 말 것. 이 기준을 무너뜨리는 순간, 그 이자는 법적으로는 합법일지라도 신앙적으로는 불법이 된다.
결국 칼빈의 해석은 오늘날에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돈을 통해 무엇을 증명하려 하는가. 효율인가, 수익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출애굽기 22장 25절은 금융 제도를 폐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가난을 기회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칼빈에게 율법은 언제나 방향을 가리킨다. 그 방향은 분명하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이며, 이익보다 형제가 앞서야 한다. 이자가 문제가 되는 순간은, 숫자가 사람의 얼굴을 가려버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