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연구] 시한부 종말론의 원조 몬타누스주의

몬타누스주의는 왜 이단인가? 

말시온과 몬타누스는 동일시대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안토니우스피우스 황제(Antonius Pius, 138~161 재위) 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새 예루살렘이 곧 임박했으므로 결혼은 금하고 말세를 준비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몬타누스는 자신에 대해 맹종을 요구하면서, “나는 특별한 예언적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시켰다.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르면 새로운 성령이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곧 말세가 온다는 것이다. 1992년 10월 재림설을 주장하다 실패한 이장림 등의 재림파들이 쓰는 용어가 이미 이때에 있었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개하면서, 추종자들은 기독교의 영적 엘리트로 확신을 불어넣었다. 막시밀라와 브리스가라는 두 여제자를 두었고, 소아시아 지방에서 큰 세력을 확보하였다. 막시밀라는 남편으로 하여금 몬타누스를 따르게 하고 자신은 소아시아 프리지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동네에 새 예루살렘이 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세속적인 일을 중지하라고 했다.

“내 뒤에는 예언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오직 세상의 종말이 있을 뿐이다”고 극단적인 종말론은 가르쳤던 이들의 초기사역은 재림에 대한 사도들의 교훈이 생생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에 잘 구별이 안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종결과 함께 몬타누스가 받았다는 ‘새로운 계시’의 정체가 차츰 드러나면서 이단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몬타니스트들은 금욕주의적 생활양식과 순교에의 자발적 참여 등으로 인하여 정통교리가 체계화되지 못했던 초대교회 시대에 정통교회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는 위세를 발휘하였다. 심지어 터툴리안 같은 교부마저도 관련을 가질만큼 큰 해독을 끼쳤다.

몬타누스파의 특징은 계시이다. 몬타누스와 그와 함께 활동한 여예언자 프리쉴라와 막시밀라는 무아경에 빠져 받은 신탁으로 계시를 선포하였다. 특히 이 세 사람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이 은사는 더 이상 계승되지 않고 그들과 함께 끝난다고 주장하였다. 막시밀라는 『내 뒤에는 더 이상 어떤 예언자도 오지 않을 것이며, 종말의 완성이 올 것이다』하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전파한 내용은 전적으로 종말론적이다.

그들은 예언적 영의 선물을 임박한 종말에 관한 기대로 여기는 사도 2, 17. 20을 바탕으로 임박기대를 화두의 실마리로 삼았다. 몬타누스파는 임박기대가 실현되는 장소를 제한하면서, 묵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과 천년왕국이 프리기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마을에 실현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들은 천년왕국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신자들에게 단식, 독신생활, 성생활의 자제, 생식, 자선, 순교를 권하였다. 더구나 몬타누스파는 스스로 선택된 이들이라는 자의식에 차 중죄를 지은 이들에게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의 교회가 예언자들과 영의 소유자들에게 나타난 원시 그리스도교의 열정은 시든 채 세속화되어 가자 이에 맞서 엄격한 극기를 행하였고,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을 강조하여 여성의 성직도 허용하였다. 예언자들과 여예언자들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언과 연계되었으며, 예언적 교회가 제도적 교회에 맞섰다.

막시밀라가 197년 사망한 뒤에도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지 않자, 새 예루살렘에 대한 임박기대를 주장한 몬타누스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몬타누스주의는 예언이 중심이 된 프리기아 지방의 종교, 지리적 특성을 넘어 널리 전파되었다. 이들이 조직을 관리하고 구성하는 데 뛰어났기 때문이다.

서방의 일부 공동체는 새 예언이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와 달리 그리스어권 그리스도인은 새 예언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몬타누스주의는 갈라디아, 시리아, 흑해 연안까지 전파되었다. 200년경 프로클루스는 로마에서 몬타누스파를 대변하였으며, 로마의 주교 빅토르는 몬타누스 사상에 호의적이었던 듯하다.

교회의 많은 주교들은 몬타누스파의 예언이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 감지하였기 때문에 몬타누스파의 확산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주교들은 몬타누스파의 극단적인 순교 열망에 영향받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하였으며,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보다 더 높아지고, 그때 형성되던 신약성서 경전이 몬타누스파 에언자들의 신탁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현실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몬타누스파의 핵심적인 유설을 논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몬타누스파가 주장했던 세상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고, 당시의 뛰어난 저술가들인 밀티아데스, 아폴로니우스가 정통 신앙을 변증함으로써 교회의 정통신앙은 점차 그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더구나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2~3세기경 몬타누스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교회회의를 모집하여 몬타누스파의 여예언자와 추종자들을 단죄하고 공동체에서 쫓아냈다. 마침내 티아테이라를 제외한 프리기아 지방의 중부와 남부 도시들은 정통신앙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 뒤로 이 운동은 급속도로 쇠퇴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몬타누스주의는 프리기아의 일부 지역과 특히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에게서 지속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글은 김재성교수(합동신학교)와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의 글을 참고하여 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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