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성경해석 원리 교부시대의 3가지 학파

다양한 성경해석 원리 교부시대의 3가지 학파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발전되었습니다.  교부시대에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였을까요? 먼저 교부시대 성경해석 원리와 학파들의 접근 방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부시대(약 2~5세기)는 기독교가 형성되고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시기였으며, 다양한 학파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 안디옥 학파, 서방 해석학파 등의 주요 학파와 그들의 주요 인물들의 성경해석 원리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맥추감사절 설교] 출 23:14, 감사가 생활이 되는 축복

맥추감사절, 감사가 생활이 되는 축복  본문 : 출애굽기 23장 14~17절 설교 : 성완석 목사  맥추감사절 감사가 생활이 되는 축복 그리스의 신화 가운데 보면 한 여인이 스틱스강에 와서 영원한 나라로 건너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뱃사공이 말하기를 “강을 건너가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레테호수의 물을 마시고 갈 것인지, 마시지 않고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 여인은 묻기를 “그 … Read more

이스라엘 역사가 요세푸스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이스라엘 역사가 요세푸스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요세푸스는 예수에 대해      예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증언)   이즈음에 굳이 그를 사람으로 불러도 된다면, 예수라고 하는 현자 wise man 한 사람이 살았다. 예수는 놀라운 일들을 행했으며 그의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 되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그는 바로 메시야 Messiah 였다. 빌라도는 우리 유대인 중 고위층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하는 … Read more

니케아_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_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한 분을 믿는다. 그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시다.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시오,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는 … Read more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씀의 뜻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씀의 뜻은?

1.1 2:18.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치 못하니”. 창세기 1장에서는 창조가 끝난 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했는데 2장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상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이 반려자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주기로 작정하신다. 이 단어는 여성의 종속성을 뒷받침하는데 한 몫을 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원문은 “그에게 … Read more

인간의 영혼, 영과 혼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의 영혼, 영과 혼은 어떻게 다른가?

영과 혼의 비교 1.영과 혼의 기능적 비교 (1)영Ibid., pp. 50-54. 인간의 영은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또는 표현을 바꾸어 말한다면 영은 세가지 주요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양심과 직관과 영교가 그것이다. ①양심 양심이란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분별기관이다.그러나 이러한 분별은 마음에 쌓아놓은 지식의 힘을 빌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양심의 일은 독립적인 … Read more

인간의 구성에 대한 세 가지 이론

인간의 구성에 대한 세 가지 이론

세 가지의 인간관     지금까지 제시되고 있는 인간관은 인성이 몸,혼,영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는 삼분설과,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다는 이분설과,하나의 기초적 실체로 된 것으로 보는 일원론적 인간관이 있다.   1.일원론적 인간관 일원론적 인간관은 최근의 학자들이 지지하는 견해이다. 그들은 몸,혼,영은 인성의 분리할 수 있는 다른 기관들이나 기능들이나 부분들을 지칭함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을 다른 관점으로부터 이해하고 표현한 것 뿐이라 … Read more

순교자의 교회 버가모 교회의 위용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해발 300미터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로서, 로마지배중 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된 총독부가 있을만큼 정치,행정의 중심지요 20만권의 장서를 가진 대규모 도서관이 있는 문화의 도시였다.

이곳은 제우스 신의 생지라는 것과 연관되어 지어진 제우스 신전을 비롯한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과 로마황제 숭배를 위한 3개의 거대한 신당등 갖가지 우상숭배 신전들이 가득차 있었다. 이곳은 사단의 위, 즉 사단이 득실거리는 곳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우상 숭배와 세속화 되어가는 도시 분위기 속에서 사단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아야 했다.

해발 400m의 가파른 산 위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도시 버가모. BC 400년쯤 형성된 버가모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800년 동안 종합병원으로 사용됐던 아스클레피움 유적. 돌로 포장된 800m의 진입로에는 당시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환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스클레피움 한가운데는 맑은 물이 흐르는 분수대가 설치돼 있고 동쪽에는 지하 원형 치료소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환자들은 이곳에서 목욕과 진흙 마사지, 맨발 걷기, 약재 처방, 식사 조절 등의 치료를 받았다. 또 북쪽에 설치된 야외 극장에서 연극과 음악을 이용한 심리치료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원 규모보다 더 놀란 것은 현지인들이 ‘크즐 아블루’(붉은 건물)라고 부르는 버가모 교회와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주님의 칭찬과 책망을 함께 받은 버가모 교회. 지금은 붉은 벽돌이 무너져내려 폐허가 됐지만 아직도 웅장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도 순교를 각오했던 초대교인들의 숨결이 생생히 느껴졌다.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전으로 건축됐으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버가모 교회로 사용됐다.

초대교회 당시 신전의 제사 연기 때문에 도시 전역이 자욱했다고 한다. 버가모는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과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던 우상숭배의 도시였다. 이 때문에 버가모 교인들의 신앙생활은 단지 입으로만 읊조리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목숨과 바꾸어야 하는 삶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충성된 증인이라고 칭찬 받은 ‘안디바’란 인물은 버가모 교회 초대감독으로 추정된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네가 어디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2∼13)

반면 주님은 계시록 말씀을 통해 세상과 결합해 진리를 잃어버리고 세속화된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15)

바울 사도는 제2차 선교 여행 때 버가모를 지나쳤으나(행 16:17∼18) 그곳에서 행한 일은 기록된 것이 없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고 교훈한 것을 보면 우상숭배는 버가모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초대교회 모두가 안고 있던 문제였던 듯하다.

입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목숨을 위협 받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또 일신의 안락만을 추구해 기독교를 다른 종교 중의 한 분파 정도로 전락시킨 우리 자신의 모습도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새 이름, 새 신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6∼17)

참조: http://livingstonech.net/god/bible_edu/3282

[마22장 혼인잔치비유] 길가는 사람 불러 놓고 예복 타령이라니

민영진목사(대한성서공회총무)

마태복음 22장 1∼1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천국을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시면서 말씀하신 “왕실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온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이미 초청한 몇몇 귀한 손님들을 오라고 했더니, 초청 받은 이들이 모두 오기를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임금은 다른 종들을 또 보내어 혼인잔치에서 대접할 풍성한 식단까지 소개해 가면서 다시 초청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밭일이 바쁘다고 밭으로 가고, 또 한 사람은 상업차 길을 떠나고, 나머지 초대받았던 나머지 손님들은 임금의 종을 능욕하고 죽였다. 그러자 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랐다. 그러면서 임금은, 잔치 준비는 끝났음을 알리고, 이미 초청받은 이들은 이 잔치에 합당한 사람들이 아님을 확인하고,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22:9) 오게 하였다. 그래서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하였다”(22:10).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왔다.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초대받고 들어왔던 그 사람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곳”에 던지라고 한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봉변 당한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통탄(痛嘆)할 일이다. 거리에 있는 사람 억지로 불러다가 혼인 잔치에 앉게 해서 앉은 것뿐인데, 혼인 잔치에 걸맞은 예복(禮服)을 입지 않았다고 손을 묶는 것으로도 모자라 발까지 결박하여 땅 속 어두운 곳에 가두다니! 정말, 당한 사람으로서는 이를 갈 일이다. 미리 초청을 받았다면 예복을 준비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거리에서 돌아다닐 때 입던 옷 그대로 초청 받아 왔는데, 무슨 예복이란 말인가! 또 다른 손님들도 다 마찬가지로 혼인 잔치에 갈 생각도 못하고 거리로 나왔다가 여기 잔치 자리에 온 이들인데, 도대체 그들은 또 언제 어떻게 예복을 준비하여 입고 왔단 말인가?

언젠가 어느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 서울의 어느 “클럽 하우스”라는 데를 가본 일이 있다. 때는 여름이어서 넥타이를 매지 않는 정장 윗도리를 입고 갔다. 그런데,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식당 종업원이 나의 길을 막는다.
“손님, 죄송합니다. 여기 식당에는 정장을 하셔야만 출입이 됩니다. 초청하신 분께서 이미 말씀하셨을 줄 압니다.”
“네,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 식대로 정장을 하고 왔습니다.”
“넥타이를 매셔야 합니다.”
“이것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 옷인데요.”
“그래도 매셔야 합니다. 여기 규정이 그러합니다. 손님 같은 분을 위해 우리가 넥타이를 준비했습니다.”
종업원이 여러 개의 검은 색 계통의 넥타이를 벌써 어디선가 가지고 왔다. 나는 더 완강하게 버틸 처지도 아니고 해서, 약간은 바보 같은 느낌이 들어도 바보들의 축제에 온 기분으로 노타이셔츠 차림에 목 둘레 맨살에다가 검은 타이를 매고 들어갔다. 나는 우리 일행이 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나의 기괴한 패션에 놀랐다. 나는, “예복을 안 입고 오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날까봐 이렇게 넥타이를 매고 왔습니다” 하고 말했고, 초대받은 손님들은 모두들 나의 바보 같은 옷차림을 보고 한바탕 웃었다. 나는 좌중(座中)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로 이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왕실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도, 거기 뜻밖에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길 가던 사람들이 어느 사이에 예복을 준비하여 그것을 입고 예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혹시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예복을 여기에서 주는 이런 넥타이 같은 어떤 것을 주지 않았을까요? 임금에게 혼난 이 사람은 종업원들이 그런 예복을 입으라고 주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그냥 들어왔다가 임금에게 죄인 취급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고요…”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다. 주석들을 보니, 모두 나처럼 추측을 하고 있다. 혼인잔치를 차려놓고 손님을 초대한 주인은 손님들이 위에 예복으로 걸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그것을 걸치고서야 예식장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하는 풍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리 초대받고 온 이들이 아니고 평상시에 거리에 있던 이들을 초대했을 경우에는 더더욱 주인이 이런 예복을 준비했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예복을 준비했는데도 그것 입기를 거절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초청자인 주인을 모독한 것일 것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유대교에서 특별히 거룩하게 여기는 곳에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들어갈 수가 없다. 거기에 들어 갈 이들을 위한 긴치마와 어깨와 팔을 가릴 웃옷을 입구에 준비해 놓고 그것을 입고서야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곳이 있다.
초대장은 이미 오래 전에 나갔다. 예언자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켜 장차 올 구원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잔치가 벌어졌을 때 초대받은 이들은 초대에 응하기를 거절했다. 기껏 거리에서 초대받은 이들 중에도 예복 입기를 거절해서 쫓겨난 이들도 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그 초대에 걸맞은 삶을 산다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힘드는 것일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도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 글은 대한성서공회 홈피에 있는 민영진 목사님의 글을 옮겨왔습니다.

사도행전14:3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도행전 14장 3절 ‘자기 은혜의 말씀’이란 무슨 뜻인가?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이영표 간증

사도행전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이라는 곳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두고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은혜’, 헬라어로 “로고테스 카리토스 아우투”라고 표현되는 이 자기 은혜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헬라어를 직역해보면  은혜–나에 대한 은혜입니다. 이를 조금 의역을 하자면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3절, 15장 15절, 갈라디아서 2장 9절, 에베소서 3장 7절 등 여러 곳에서 같은 말씀을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라고.

은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습니다. ‘주의 은혜’라는 말이 있고, 문자 그대로 ‘은혜’라는 말도 씁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은혜도 여러 가지요, 그 중에서도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혜가 따로 있습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은혜에 대해서 간증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사도 바울은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은혜의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바울이 남다른 명예를 가진 사람도 아니요, 과거가 좋은 사람도 아니요, 권세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카리스마적 권위’라고 합니다. 그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같이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가 있을 때에만 남에게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요 자격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것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그 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치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인 것처럼 모두를 사랑하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다, 모든 되어지는 일이 다 나 때문이요, 나를 위해서 있어지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바울은 은혜를 위해서 삽니다. 은혜만을 위해서 삽니다. 나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by 곽선희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집 “교회의 권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