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의 ‘부정하다’는 저주가 아닌 회복과 보호를 위한 조치

고대 이스라엘의 법전인 레위기를 읽을 때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낯설게 느끼는 단어 중 하나는 단연 ‘부정(不淨)하다’일 것입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 피부에 생기는 종기, 출산과 생리 현상에 이르기까지 레위기는 일상의 수많은 자리에 ‘부정하다’는 낙인을 찍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레위기의 하나님을 차갑고 까다로운 분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부정한 자를 진영 밖으로 격리하고 공동체로부터 멀리하게 한 법문들은 마치 엄격한 배제와 기피의 명령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문맥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너머에 숨겨진 하나님의 진짜 음성을 귀 기울여 들으면, 전혀 다른 따뜻한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레위기에서 ‘부정하다’는 선언은 그 상태로 영원히 낙인찍어 이웃을 기피하라는 ‘종결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너진 존재가 다시 정결해질 수 있도록 돕는 ‘정함으로 가는 과정(Purification Process)의 시작’이자, 한 생명도 포기하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회복의 디자인’입니다.


1. ‘부정함’에 담긴 오해와 진실: 징벌이 아닌 보호

레위기가 말하는 부정함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죄(Sin)나 위생적인 더러움(Dirty)의 개념과 결이 다릅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온전한 질서 자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함에 나아가기 위해, 잠시 신체적·의식적 상태를 점검하는 ‘제사의식적 기준’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구약의 이 방역 율법들이 당시 백성들에게 거대한 안전망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악성 피부병 환자를 격리한 것은 감염병 확산을 막는 고대의 완벽한 ‘강제 격리(Quarantine)’ 조치였고, 출산한 산모나 유출병이 있는 자들의 접촉을 제한한 것은 노동이 곧 생존이던 유목 사회에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공식적인 휴식과 산후조리의 시간’을 법적으로 보장해 준 것이었습니다.

즉, “부정하다”는 선언은 환자나 약자를 공동체에서 쫓아내기 위한 정죄가 아니라, “지금 이 사람은 아프고 취약한 상태이니, 안전하게 보호하고 몸을 씻으며 푹 쉬어 건강을 회복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가장 실질적인 보건 의학적 배려였습니다.


2. 정함으로 가기 위한 대가: 가난이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

하나님이 부정한 상태를 ‘기피의 대상’이 아닌 ‘회복의 과정’으로 보셨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정결례를 치르는 제물의 차등제에 있습니다. 피부병이나 유출병에서 나음을 입고 다시 ‘정함’의 상태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만약 율법이 차가운 교조주의에 불과했다면, 제물을 바칠 돈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평생 진영 밖에 버려진 채 부정적인 존재로 소외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14장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특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 둡니다.

“만일 그가 가난하여 이에 미치지 못하면… 그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레위기 14:21-22)

하나님은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값비싼 어린 양 대신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비둘기로 대속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돈이 없어서 치료와 회복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정함’을 향한 길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려 있었으며, 공동체는 그가 다시 정결해져 돌아올 수 있도록 물질적·정서적으로 연대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3. 격리를 넘어 환대로: 제사장의 발걸음이 향한 곳

레위기 14장 정결 의식의 첫 구절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립니다. 피부병 환자의 치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제사장은 성막 안에 가만히 앉아 환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레위기 14:3)

거룩한 직무를 맡은 제사장이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진영 밖, 즉 ‘부정한 영역’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소외된 자의 살을 직접 만지고 살피며 그가 다시 공동체로 돌아올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이 적극적인 태도야말로 율법의 진정한 정신입니다. 부정함은 기피하고 도망쳐야 할 자리가 아니라, 공동체가 적극적으로 찾아가 격려하고 씻겨주며 회복을 도와야 하는 ‘긴급 구조 신호(SOS)’였던 셈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 부정함의 법칙을 역전시키다

이 정함으로 가는 아름다운 여정은 신약 성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완전하게 완성됩니다. 구약의 율법 하에서는 부정한 것이 정한 것에 닿으면 정한 것마저 부정해지는 ‘오염의 법칙’이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행동하셨습니다. 주님은 레위기 법상 결코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 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셨고(마 8:3), 12년간 혈루증(유출병)을 앓아 접촉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들던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으며(막 5:41), 죽은 야이로의 딸(시체)의 손을 움켜쥐셨습니다.

예수님이 부정해지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 안에 있던 완전한 ‘거룩함과 생명의 능력’이 부정한 자들에게 흘러 들어가 그들의 부정함을 삼키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부정한 자를 기피하던 소극적 태도를 넘어, 부정한 자를 적극적으로 정하게 만드시는 ‘사랑의 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 공동체가 가져야 할 적극적인 태도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는 영적으로 아프고 허물 많아 ‘부정해진’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나의 정결함을 지킨다는 핑계로 그들을 정죄하고 소외시키며 기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레위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거룩함은 차가운 격리가 아니라 따뜻한 회복의 연대입니다. 누군가의 부정한 상태, 즉 삶의 무너진 자습을 보았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성경적인 태도는 소극적인 기피가 아닙니다. 그가 다시 정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곁을 지키고, 상처를 싸매어 주며, 하나님의 은혜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미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부정함은 정함으로 가기 위한 터널일 뿐입니다. 그 터널의 끝에서 양손 가득 정결케 하는 제물을 쥐어주시고 마침내 온전한 품으로 환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또한 깨어진 이웃들을 기피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정하게 하려 하셨던 예수님의 대담한 사랑을 살아내는 거룩한 치유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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