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4장에서 마주하는 모세의 얼굴은 경이롭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40일을 대면하고 내려온 그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광채가 감돌았습니다. 얼마나 그 빛이 강렬했던지, 백성들은 그를 가까이하기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그들과 대화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이 ‘수건’은 거룩한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배려하는 ‘자비의 도구’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 장면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명합니다. 그는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가 “장차 없어질 영광의 결국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통찰합니다. 즉, 율법의 직분이 가진 일시성과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여전히 ‘수건’이 드리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첫째, 우리는 ‘과거의 영광’이라는 수건에 갇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모세의 광채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지는 빛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왕년에 내가 이런 은혜를 받았지”, “그때 그 집회는 정말 뜨거웠어”라는 과거의 기억에만 매몰되어 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박제된 추억이 아닙니다. 사라져 갈 과거의 빛을 붙들기 위해 수건을 쓰기보다, 오늘 나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영광 앞에 서야 합니다.
둘째, ‘종교적 형식’이라는 수건이 본질을 가리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빛나는 얼굴(현상)에 주목하느라 그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본질)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예배의 형식, 직분의 무게,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의 모양새라는 수건 뒤에 숨어, 정작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면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수건은 안전함을 주지만, 동시에 생명력 있는 관계를 방해합니다.
셋째, 복음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를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이 두려워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주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며, 그 영광을 통해 우리 자신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성화의 신비입니다.
모세의 수건은 구약의 한계를 보여주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수건을 찢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가림막이 아니라,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민낯의 신앙’입니다.
오늘 당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수건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시선입니까, 아니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기의(自己義)입니까? 그 수건을 벗어던지고 빛의 근원이신 주님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의 얼굴에는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하늘의 평안과 광채가 깃들기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