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당연히 그 시각은 세계의 구성에 대하여 견지하는 일련의 전제들을 포함한다. 인간은 누구나 세계관을 가지는 피조물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세계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한 각 사람의 해석은 다르다. 세계관에 따라 인생에 대한 시각이 달라질 것이고 자신이 가치를 두는 대상도 달라질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 등의 잡다한 생각들을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데, 세계관은 지극히 종교적인 것이며 그것과 그것의 언어적 형성을 결정하는 최초의 인자는 궁극적인 신앙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미들튼 & 왈쉬, 세상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전)
그렇다면 그러한 신앙의 결단은 다음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방식이라고 정리된다. (1) 나는 누구인가? (2) 나는 어디에 있는가? (3)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4) 그 치료책은 무엇인가? —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은 기본적으로 이론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제임스 사이어는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이란 책에서 잘 갖추어진 세계관이란 최소한 공통적으로 다음의 질문들에 대해 답해 준다고 주장한다. (1)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인간은 무엇인가? (3)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
성경적인 세계관 역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답한다. 성경은 하나님, 창조, 인간의 타락,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구원을 통한 죄로부터의 해방,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회복으로의 완성 등을 통하여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이 하나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신뢰할 수 있다.
미들튼과 왈쉬는 세계관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현실성, 내적인 통일성, 개방성 등으로 정리하는데, 그것들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현실성은 하나의 세계관이 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만약 어떤 세계관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강요한다면, 현실성이 없는 세계관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세계관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과 공의의 문제에 민감하게 만드느냐의 변수 역시 도입할 수 있다. 내적인 통일성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는데, 만약 어떤 한 민족이 자기 민족과 자연의 일치감을 강조하면서 다른 민족에 대한 우월감을 주장한다면, 벌써 그것은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다. 즉 자기 민족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과 일치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지만, 다른 민족은 일치감을 느껴야 하는 자연의 일부가 아닌, 자기 민족의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내적 통일성이 결여된 까닭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이미 수많은 세계관이 존재함을 안다면 그 개방성 역시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의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뭔가를 다른 세계관을 통하여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의 반응은 다음 셋 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1) 기존의 세계관 포기, 새 세계관 선택. (2) 기존의 세계관 고수, 새 세계관 부정. (3) 기존의 세계관과 새 세계관을 융합하여 제 3의 새로운 세계관 형성.
한 사람의 세계관이란 원래 끊임없이 수정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우리가 세계관들을 평가하면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몇 가지를 제시하는데 (신명기 30:15-20),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등이 그것들이다. 여기서 개방성의 문제가 다루어질 수 있는데, 만약 어떤 세계관이 성경이 말하는 선과 생명, 그리고 축복을 깨우쳐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배우고 그것에 비추어서 우리가 이미 갖고 있던 세계관을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 세계관에 대해 고민하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의 세계관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을 성경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여 바로잡고, 의로 훈련시키기에 유익한 책이라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 이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자칭 복음주의적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황당한 일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설교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어야 하는데, 개인의 생각 또는 경험이 성경의 권위를 입고 슬그머니 다가온다. 교회 내에서 처리되는 일조차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과 공의 등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성경적” 기준에 따르지 않고, 자칭 영적 지도자의 교만한 권위에 따른다면 큰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이 성경적이지 못하고 다른 사상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거나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들이 이루는 교회의 모습 역시 성경적이지 못할 수 밖에 없다.
이름만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비성경적인 다른 세계관들이 성경적 세계관을 이루는 작업을 방해하면서 나름대로의 형태로 세력의 확장을 꾀하고 있음을 냉철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기성 교회도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많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기성 교회들의 문제 중의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을 세속적(secular)이라는 넓은 의미의 인간 생활, 즉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하여, 거룩하고(sacred) 종교적인(religious) 일에 국한시키는 데에 있다. 즉 성경적 세계관을 신학이나 개인의 도덕성 문제와 관련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성경은 정치, 예술, 학문 등의 세상의 일(?)에는 기껏해야 간접적인 관련을 맺을 뿐이다. 결국 성경은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교회관(?) 또는 하나님관(?)만을 가르치는 어설픈 책이 되어 버린다. (Wolters, Creation Regained)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견해를 가져야 한다. 즉 이 세상의 잡다한 문제들, 우리 나라의 예를 들면, 노사 간의 갈등, 성범죄, 농작물 가격의 폭락, 땅값의 상승 등에 대해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성경적 범주에 기초하는 세계관에 의해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순수하게 성경에서 뽑아내던가, 아니면, 다른 여러 관점과 해결책들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는 세상의 여러 사상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러한 사상들로부터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리며,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성경적인 근거로써 비판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감히 말한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성경적 세계관의 인식은 교회의 개혁, 세계의 변혁이라는 과제와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중세에 카톨릭이 저지른 엄청난 부패를 보고 그에 맞섰던 루터 등의 종교개혁가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은 성경을 근본으로 하여 교회 개혁의 방향을 용감히 제시하였는데, 그들의 그러한 정신과 행위는 초기 개신교의 지침이었으며 어느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나 모범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교회들은 그러한 정신을 잊어 가는 듯하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세계를 변혁하는,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무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빛과 소금의 직책을 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 참고한 책들:
(1) 리챠드 미들튼 & 브라이안 왈쉬 (황영철 옮김), <세상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전>, IVP, 1987.
(2) A. Wolters, <Creation Regained>, Michigan: Eerdmans, 1985.
※ (4)에 실려있는 번역문을 인용했음.
(3) 제임스 사이어 (김헌수 옮김),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IVP, 1985.
(4) 기독교 학문 연구회(편), <성경적 세계관 자료집>.
by 이기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