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사모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지옥이 되기 쉬운 목회현장
오늘 까지, 이번 달만 세 번째다. 사랑하는 동료 목회자와 사모님이 공황발작을 겪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으며, 정신적으로 무너져간다는 소식이다. “개인의 연약함”으로 치부할 수 없는, 구조적인 신음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자주 오해되는 사르트르의 이 말은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규정하고, 나의 존재를 옥죄어 결국 “내가 나로 살 수 없게 될 때”, 그 관계는 지옥이 된다는 뜻이었다.
 
목사와 사모에게 향하는 시선이 바로 그럴 때가 있다.
목사와 사모는 ‘박제된 성인(聖人)’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흔들리고, 상처받고, 회복이 필요한 ‘살아있는 인간’이다.  물론 목사와 사모에게 더 깊은 성숙과 성화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기대가 언제부터인가 ‘요구’가 되고, ‘기준’이 되고, 결국 ’채점‘ 혹은 ‘판결’이 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그 왜곡된 기준으로 목사와 사모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에 눕히려 할 때, 목사와 사모는 서서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기 상실’이라는 심리적 파산 상태가 기다리고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괴롭다. 제시된 명확한 사랑의 기준들 앞에서 스스로 얼마나 부족한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우리가 ‘사랑 그 자체’가 되라는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생산자가 아니라, 철저히 사랑의 수혜자다. 목사와 사모라고 예외일리는 없다. 그러므로 때로는 사역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도 괜찮아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로, 사역이라 딱지 붙여놓은 모든 활동에서 생산성이 떨어져도 평가받지 않는 공동체 가족의 자리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채점없이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이라 부르시고, ’딸’이라 부르시는 그 자리로. 목사와 사모는 교회 공동체의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 절대적으로.
 
사역 이전에, 삶이 먼저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을 사랑하시기 전에, 아파하고 신음하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신다. 그러니 부탁드린다. 목사와 그 가정에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달라. 조금 덜 완벽해도 괜찮다고 말해달라. 무너지기 전에,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손을 내밀어 달라.
 
망가진 하나님의 창조세계 어디에도 빌런은 있다. 나쁜 목사는 분명 있다. 하지만 대부분 목사, 사모님들 기본적으로 참 좋은 분들이다. 목사도 사모도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아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by 권도근 목사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