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밖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성 안’을 지향합니다. 성벽은 안전을 보장하고, 성 안의 질서는 안락함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진영 안(Inside the Camp)은 하나님의 임재와 공동체의 보호가 머무는 거룩한 구역이었습니다. 반대로 ‘진영 밖’은 부정한 자들이 격리되고, 오물과 재가 버려지며, 저주받은 죄인의 처형이 집행되던 소외와 수치의 공간이었습니다.
레위기 4장의 속죄제 규례는 이 장소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제사장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진 수송아지의 피는 성소 안 휘장 앞에 뿌려졌지만, 정작 그 제물의 몸체는 가죽과 고기, 배설물까지 모두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으로 옮겨져 불태워져야 했습니다(레 4:12).
거룩한 성소 안에서는 피를 통한 용서가 선포되지만, 그 죄의 실질적인 대가와 추한 흔적은 성 밖에서 처절하게 소멸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구약의 엄중한 의식은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골고다 언덕에서 완성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인류의 모든 죄책을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화려한 성전 안이 아니라, 가장 비천하고 수치스러운 ‘영문 밖’으로 밀려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오물과 죄의 찌꺼기가 버려지는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 대신 하나님의 진노라는 불길 속에 던져지셨습니다. 그분은 진영 밖으로 쫓겨난 자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스스로 가장 처절하게 쫓겨난 자가 되셨습니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역설이 발생합니다.
주님이 영문 밖에서 죽으심으로 인해, 저주와 수치의 땅이었던 그곳은 이제 주님을 만나는 ‘은혜의 처소’로 변모했습니다. 우리가 죄책감에 짓눌려 스스로를 ‘진영 밖’의 존재라고 느낄 때, 주님은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영문 밖’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세련된 종교적 형식주의의 울타리 너머, 고통받는 이웃의 곁이자, 나의 연약함과 마주하는 정직한 고독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합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안락한 성안에 머물며 세상을 정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문을 열고 고통의 현장으로, 소외된 자들의 곁으로, 십자가의 수치가 기다리는 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치욕을 함께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발을 내디딜 때, 비로소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먼저 길을 닦아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깊은 심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진영 밖은 더 이상 버려진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늘 문이 열리는 기적의 시작점이며, 우리 삶의 가장 추한 재가 씻겨져 영광의 꽃으로 피어나는 성소입니다. 오늘, 당신의 ‘영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그분을 향해 한 걸음 내딛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