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는 윤리와 법의 커다란 변곡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2015년 간통죄 폐지 이후, ‘간통’은 더 이상 국가가 형벌로 다스리는 ‘범죄(Crime)’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민사상 손해배상이라는 법적 책임만이 남겨진 영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많은 이들은 도덕적 해이를 우려합니다. 특히 영미권 국가들과 한국의 배상 체계 차이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처한 영적·윤리적 현실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징벌적 배상과 한국적 위자료 사이의 간극
미국을 비롯한 영미법권 국가들에서 간통은 ‘패가망신’이라는 단어와 직결되곤 합니다. 가해자의 악의적인 행위에 대해 실제 피해보다 훨씬 큰 금액을 부과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와 평생에 걸친 배우자 부양료(Alimony) 제도가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간통은 경제적 파멸을 각오해야 하는 무거운 선택입니다.
반면, 한국의 현실은 사뭇 다릅니다. 간통죄 폐지 이후 형사 처벌의 공백을 메워야 할 민사상 위자료는 대개 1,000만 원에서 3,000만 원 선에 머물러 있습니다. 한 가정을 파괴하고 이웃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볍다는 비판이 거셉니다. 법이 주는 ‘억제력’이 사실상 약화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배상의 원칙: “갑절로 갚으라”
성경은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죄로 인한 피해 회복(배상)에 대해 매우 엄격합니다. 출애굽기 22장의 배상법은 타인의 재산에 손해를 입혔을 때 2배, 많게는 5배까지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단순히 돈을 갚으라는 뜻이 아니라, 깨어진 관계와 공동체의 정의를 회복하라는 준엄한 요구입니다.
만약 소 한 마리를 훔친 죄도 갑절로 갚아야 한다면, 한 사람의 인격과 가정을 파괴한 간음의 무게는 세상의 어떤 위자료로도 산정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가가 정한 위자료 액수가 낮다고 해서 죄의 무게까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세상 법정의 판결문보다 훨씬 더 세밀하고 공의롭기 때문입니다.
‘돈의 위력’이 아닌 ‘하나님 경외’가 억제력이 되어야
영미권처럼 수십억 원의 배상금이 무서워 죄를 짓지 않는 것도 하나의 질서 유지 방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정절은 ‘경제적 손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억제력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와야 합니다.
모세가 살인이라는 뼈아픈 과거를 딛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선포했듯, 우리 또한 연약한 본성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 법이 그어놓은 낮은 문턱에 안주하지 말고, 마음의 동기까지 살피시는 주님의 시선 앞에 서야 합니다. 국가의 형벌이 사라지고 배상금이 적어진 이 시대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진짜 신앙’을 증명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결론: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않는 삶
간통죄 폐지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명확합니다. 세상이 “이 정도 벌금이면 괜찮다”라고 유혹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라는 언약의 절대성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절은 배상금 액수가 결정하는 수동적인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배우자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에 기꺼이 지켜내는 적극적인 거룩함이어야 합니다. 법의 강제력이 사라진 곳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성도의 진실한 정절이야말로, 깨어진 가정이 가득한 이 땅에 던지는 가장 강력한 복음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