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주일 설교] 잠 22:6 사랑의 교육 / 김동호 목사

사랑의 교육

본문 잠22:6 엡5:22-6:4

어린이주일 / 김동호목사 (서울 동안교회에서 설교)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꼽으라고 하면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으로 불리우는 말씀인데 그 고린도 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씀처럼 사랑의 소중함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누리며 산다고 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그처럼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없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결핍되어도 당장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세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가 셋이 되다 보면 가장 위험한 아이가 둘째입니다. 위와 아래로 치어서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세 아이 중에서 둘째가 어렸을 때 손가락을 심하게 빨았습니다. 엄지 손가락에 군살이 박히리만큼 심하게 빨았습니다. 그것은 욕구불만에 대한 나름대로의 표현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같지만 사랑에 대한 결핍은 당장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 아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똑같지만 아이가 느낄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은 달랐습니다.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너무 좋고 기뻐서 늘 아이를 빨리 보기 위하여 뛰어다니다시피 하였습니다. 백일도 해 주고, 없는 돈에 카메라도 사서 열심히 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둘째를 낳았을 때는 아무래도 첫째만큼 대해 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백일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첫째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첫째만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첫째에게서 어느 정도의 욕구가 충족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서적인 안정을 찾은 것이지만, 하여튼 첫째와 둘째는 그와 같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그것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첫째는 손가락을 빨지 않았는데, 둘째는 손가락을 빤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욕구가 채워져 만족하여 조금 게을러진 순간 아이는 부모에 대한 욕구불만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은 그만큼 민감한 것입니다.

 

둘째의 손가락 빠는 습관을 고치기 위하여 제 아내는 참으로 많은 애를 썼습니다. 더 많이 안아 주고, 만져 주고, 놀아 주었습니다. 물론 야단도 쳤지만, 그것은 야단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사랑의 보충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옳지 않으며, 바르지 않으며, 좋지 않은 일의 뿌리는 사랑의 결핍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사랑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치명적인 죄의 문제를 사랑으로 푸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푸신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문제의 열쇠입니다. 따라서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풍성한 삶을 원하신다면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사랑에 투자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하여 늘 기도하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문제아는 없다. 다만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에 문제가 있을 때 아이들은 문제아가 됩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아마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부모의 문제는 그 사랑을 아이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있으며, 그 효율이 아주 낮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100인데 정작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사랑은 10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랑은 전달되지 않으면 거의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부뚜막의 소금과 같아서 아무리 가득히 있다고 해도 넣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많은 부모의 사랑이 마치 부뚜막의 소금과 같습니다. 소금이 가득하게 있다는 것만으로 음식이 짜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다는 것만으로 아이들의 삶이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알 수 있도록,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합니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모르는 것을 사람들은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닙니다. 아이가 철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알고 느끼는 것은 아이의 책임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아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랑의 원칙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내의 책임이 아니라 남편의 책임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모르는 것도 남편의 책임이 아니라 아내의 책임입니다. 모든 사랑은 상대방이 충분히 느끼고 알 수 있도록, 늘 상대방의 이해 수준에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깨닫고, 느끼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또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상처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마음의 상처가 뜻밖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에게 인격이 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의견이 달라서 다툴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대개의 경우 부모들은 일방적으로 자식을 누르려고 합니다. 말도 함부로 막 합니다. 그와 같은 경우, 자식들은 부모에 대하여 최소한의 예의와 규칙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자식에게 예의와 규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감정을 쏟아 붓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의 인격에 폭력을 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부모와 자식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식이라고 옳지 않은 감정을 함부로, 조심성 없이 표현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랑이 무례함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자녀들이 부모의 무례함 때문에 상처를 받아 잘못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어른에 대한 무례함은 그 뿌리가 어른에게 있다는 사실을 우리 어른들은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자식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아이가 잘못할 때는 아이를 꾸짖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를 들 수도 있습니다.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은 부모에게 주어진 권한이요, 또한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만 앞세워서, 그리고 자기는 어른이요, 부모라는 것만 생각하고 무례하게 행함으로 자식에게 상처를 준 많은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사랑의 교육이 이루어지게 될 줄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육은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무례합니다. 예의는 자녀가 부모에게만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알아야만 합니다. 그 상대가 누구든 무례하게 대한다면 진정한 사랑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의를 갖춘 사랑으로 자녀들을 교육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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