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얘기에는 이상한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 경우만 해도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 좋은 일만 하고 우리 좋은 일을 하면 안 되나요?” “우리는 늘 손해만 보면서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수차례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우리의 권리를 포기해서 하나님을 챙겨드리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철이 안 든 애들은 자기가 엄마를 위해서 공부를 해주는 줄 압니다.
“공부하면 뭐 줄 건데?”라고 태연하게 묻습니다.
그만큼 공부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잠깐 성경에 없는 상상을 해보십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중간에 어떤 이방 민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묻습니다.
“당신들은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이스라엘이 뭐라고 답했을까요?
“우리는 본래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나안에 가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로 놀랍습니다.”라고 했을까요?
“말도 마세요. 애굽에서 그럭저럭 살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인생입니다.”라고 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런 노골적인 불평은 아니라도 “몰라요. 피곤하니까 말시키지 마세요.”라고 할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남의 얘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랐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하수인이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죄가 죄인 줄도 몰랐고, 죄 짓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죄를 거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죄를 지어도 불편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죄를 지으면 불편합니다.
전에는 의를 행할 능력 자체가 없었지만 이제는 얼마든지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변화에서 아무런 의미도 못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관심이 이 땅에 속한 문제에만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내가 진작 예수 믿기를 정말 잘했지!”라는 얘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나중에 믿을 걸…”라고 한탄하는 얘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신앙에 만족이 없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신앙에 만족이 없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애초에 물 건너간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는 죽기 3초 전에 믿는 것이 가장 좋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차마 천국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자답게 살 마음도 없다는 뜻입니다.
지난 1995년 1월에 18박19일 일정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역대 파라오의 미라를 한 곳에 모아 놓은 방이 있습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일행 중의 누군가 “어느 바로가 그 바로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그 바로 미라가 어느 것이냐는 얘기입니다.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모세가 동족의 고난을 외면하고 바로 딸의 양자로 만족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를 아들로 삼은 바로의 딸은 투트모세 1세의 무남독녀이며 투트모세 2세의 왕비인 핫셉슈트입니다.
그가 아들을 낳지 못하던 차에 모세를 양자로 삼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왔다가 모세를 보고는 아들을 삼았다는 내용을 보면서 마음씨 착한 아가씨를 연상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무슨 정신으로 양자를 입양합니까?
투트모세 2세는 재위 기간 8년 만에 죽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핫셉슈트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과 첩에게서 얻은 아들을 결혼시켰는데, 그가 당시의 바로인 투트모세 3세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바로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핫셉슈트가 사위를 대신해서 섭정을 했는데 무려 21년이나 애굽을 통치했습니다.
투트모세 3세가 장성한 후에도 권력을 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모세가 바로로 등극했을 확률도 제법 있습니다.
동족의 고통만 무시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 영화, 명예, 권세를 다 누렸을 것입니다.
아무 부족한 것 없이 살다가 죽어서 미라가 되었을 것이고, 이집트 박물관 어느 한쪽에 전시되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성경에 이름이 오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모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모세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화인지를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인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건성으로 세상을 살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by 강학종 목사
(서울 하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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