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자 무너졌던 재단이 다수 수축되고, 잠잠했던 주일학교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남한에서는 이러한 부흥이 일어났으나, 북한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1947년 1월 14일, 서울에서 주일학교 재건 운동이 시작되었고, 1948년에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붕괴되었고,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다시 재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주일학교연합회’가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개칭된 후 사업을 지속해 왔으나, 주로 출판 사업에만 집중하였다. 그 결과, 주일학교 운동은 각 교파별로 따로 움직이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 시기의 주일학교는 교육철학에 기반한 원리가 부족했다. 어린이 설교와 동화가 구별 없이 사용되었고, 교회의 분열로 인해 신학 노선이 달라져 각 교파별로 계단공과(교재)가 따로 발행되어 사용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196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교육신학 이론과 교회 교육 현장 사이의 거리가 너무 컸고, 한국교회의 상황에 맞는 교육신학이 정립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교회교육은 방향성을 잃고 말았다.
그 결과, 교육 내용의 빈곤, 교육 시설의 미비, 교육 방법의 혼란, 교사의 낙후성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시골 교회의 교회학교 교육은 적절한 교사를 찾기 어려워, 교역자들이 교육 계획조차 세우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
주일학교 교육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급증하였다. 그 당시 교육 관련 잡지들이 많이 창간되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염려와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일학교 교육에서 뚜렷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일학교 무용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존 웨스터호프는 1986년 제6회 연세대 주최 목회자 학위 세미나에서 주일학교의 종말을 여러 차례 경고하였다.
현재는 오히려 관심이 부족한 상황에 처해 있다. 교계나 신학계조차 주일학교의 현실적인 상황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거나 논평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 “1993년과 1994년 신학 논문 중 주일학교에 대한 논문은 하나도 없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의 교육정책 변화도 교회학교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홍익인간’론을 기점으로 강화된 학교 정책은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전형, 1974년 고교 추첨제, 1980년 고교 내신제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사립학교의 존립을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건교이념을 기독교 교육에 두었던 기독교계 학교들은 교육적 위기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1969년 이후 성경 과목은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만 가르치도록 지시되었고, 고교 추첨제 이후에는 성경 교육을 과외로 옮겨야 하는 문제와 교목의 교사 자격 문제가 제기되었다.
결국 고교 내신제가 도입된 이후에는 성경 과목이 고교 성적에 반영되지 않아, 학생들로부터 점차 외면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기독교 학교가 기독교 교육의 근거를 상실하기 시작한 것은, 교회에서 시행하는 주일학교에도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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