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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창 4:16~24 가인이 세운 성과 문명의 발달

가인이 세운 성 그리고 문명의 발달

본문: 창세기 4장 16~24절

2025.3.28. 소토교회 아침기도회 설교

 

우리가 함께 나눌 본문은 창세기 4장 16절부터 24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가인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떠나, 자기 방식대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후손들과 문명의 계보는 하나님 없는 인류 문명의 본질을 깊이 드러냅니다.

 

  1.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시작 – 놋 땅 (16절~17절)

16절을 보면,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합니다. ‘놋’이라는 이름은 ‘유리함’, 곧 방랑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죄를 떠나 하나님 곁에 머물러야 하는데,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머물게 된 것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은 근본적인 안정감을 잃게 됩니다. 겉으로는 자리를 잡은 것 같지만, 영혼은 늘 흔들립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밖으로 보기엔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성을 쌓고 기반을 마련한 것 같아도 그 안에는 불안과 방황, 고독이 숨어 있습니다.

가인은 놋 땅에서 아내와 동침하고 에녹을 낳습니다. 그리고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을 ‘에녹’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성을 쌓았다’는 것은 가인을 따르는 무리, 즉 공동체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혼자서는 성을 쌓을 수 없습니다.

가인은 더이상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지 않으므로, 자신의 안전을 위해 공동체를 이루고 성을 쌓아 스스로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문명을 만들고 조직을 세우며, 그 성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 ‘에녹’으로 정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을 쌓아 대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지만 적이 밖에만 있을까요? 안에 있는 적이 더 무섭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가인은 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후 가인의 자손들은 대를 이어 계보를 이어갑니다.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계속해서 계보가 이어집니다. 문명도 함께 발전합니다. 유목(야발), 음악(유발), 금속공예(두발가인)와 같은 기술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인류 최초의 문화와 기술의 조상이 됩니다.

하지만 이 계보 속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생명의 반복, 하나님 없는 번성과 진보입니다. 겉모습은 찬란합니다. 예술, 기술, 문명이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과연 복입니까? 아니면 깊은 저주입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은 진보하고 문명은 발전합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인간들은 더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이 빠진 그 삶은 결국 공허, 교만, 그리고 죄로 가득 차게 됩니다.

 

  1. 라멕의 말 – 자비 없는 처절한 복수 (23~24절)

이 계보의 절정은 라멕입니다. 그는 두 아내를 맞이하며 인류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살인을 자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소년을 죽였도다.”

무서운 말입니다. 단지 자신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젊은이를 죽이고, 오히려 그것을 당당히 선언합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칠 배의 벌이 있으려니와 라멕을 위하여는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해하면 일곱배의 벌을 내릴 것이라고 했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칠십칠배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또한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두려고 하는 교만입니다. 또한 이는 폭력의 자기 정당화이며, 자비 없는 복수의 노래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왔습니다. 잔인해야 남들이 자신을 깔보지 않으며, 철저한 보복을 가할 때 다시 자신을 넘보지 않게 된다는 생각으로 인류의 역사를 피의 역사로 물들여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살아남으니 힘이 최고라는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가인을 위한 7을 약속하셨고, 라멕은 이를 비웃으며 77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70의 7배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게 이르노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18:22) 예수님은 라멕이 말한 ‘칠십칠 배의 복수’를, ‘칠십의 칠배의 용서’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단지 가인의 이야기나 고대 인류의 역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문명 위에 삶을 세우고 있습니까? 기술과 문화, 문명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도, 정작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공허한 모래성에 불과합니다. 인간 중심의 문명은 이름을 남기려 하지만, 하나님 없는 그 삶은 결국 죄와 폭력, 그리고 파멸로 이어집니다. 라멕처럼 자기의 상처를 핑계 삼아 복수를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없는 정의, 자비 없는 분노, 용서 없는 명예는 결국 또 다른 고통을 낳을 뿐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방식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이며, 정죄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우리의 가정, 삶, 공동체, 문명을 세워가야 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세운 문명은 눈부셨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 어둠 가운데 빛으로 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용서를 실천하며, 믿음의 문명을 세워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참된 안식과 의미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기를 결단하며, 그 은혜 안에 거하시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내 삶의 중심에는 누가 계십니까? 내 계획과 수고, 성공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혹시 에녹의 성처럼 겉모습은 번듯하지만, 하나님은 빠져 있지 않습니까?
  2.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3. 복수와 용서,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요?

by 박동진 목사(소토교회) 

코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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