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부족은 본래 켈트족으로, 기원전 3세기에 고향을 떠나 소아시아 중심부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자치 생활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25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국의 행정구역인 갈라디아의 일부가 되었다.
갈라디아 부족이 거주하던 지역(북 갈라디아)은 비교적 좁았으나, 로마 행정구역으로서의 갈라디아(남 갈라디아)는 훨씬 광범위하여 남쪽으로는 지중해, 북쪽으로는 흑해에 이르렀다. 행정 수도는 안카라였다. 따라서 ‘갈라디아’라는 용어는 좁은 의미로는 갈라디아 부족이 거주한 지역을, 넓은 의미로는 로마의 광범위한 행정구역을 가리킨다.
갈라디아 지역은 헬라 및 로마 문화를 받아들였기에 주민들은 헬라어를 사용했으며, 바울이 선교할 때 언어 장벽이 없었다.
갈라디아서 1:2에서 수신 교회가 복수형으로 언급되지만, 이들이 어디에 위치했으며 어떻게 설립되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사도행전 16:6과 18:23에서 바울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제3차 선교 여행 초기에 그곳에 제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탐구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이 대적했던 적수는 누구인가? 둘째, 바울의 생애에서 본서가 전제로 하는 사건들은 무엇인가?
2세기 이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유대주의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본다.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반대하며,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유대 율법을 준수하도록 강요했다(5:23; 6:12). 즉, 유대인의 월력을 지키고(4:10), 구약 율법과 유대 풍습을 따르도록 요구했다(2:19).
이에 맞서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의 권위를 훼손하려 했으며(1:11, 12), 이에 바울은 그들을 ‘교란시키는 자들’(1:7), ‘선동하는 무리들’(5:12)이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그것을 아주 베어 버렸으면 좋겠다”(5:12)라고 강한 표현을 사용했다.
바울은 직접 갈라디아 교회에 방문하고 싶었지만(4:20), 그것이 불가능했기에 이 서신을 보내게 되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모든 서신 중 가장 도전적이며, 바울은 격양된 감정으로 유대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갈라디아 신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고민을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은 목적을 이루려 했다.
갈라디아서는 초대교회와 유대교 간의 논쟁, 그리고 이 논쟁에서 바울이 차지한 역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서신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닌 독립된 신앙임을 선포하는 문서로, ‘그리스도를 통해 낡은 율법이 종결되었다’는 바울의 사상을 명확히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가 법률체제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갈라디아서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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