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고찰 먼저 두 가지 인용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인용문은 아돌프 슐라이터(1852~1938)의 『신약에서의 신앙』(1882)이라는 책에 수록된 것으로 이 책은 여러 차례 중판(重版)과 재판(再版)이 거듭되었다. 슐라이터는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신앙의 형성과정은 결코 심리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심리학적으로는 정상적 과정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도들의 관심은 오직 신앙의 대상이 되는 자가 누구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 그를 왜 믿는지를 밝히 말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선포될 때 사람의 영혼 속에 신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에 대해 신앙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신앙행위에 대해 심리학적 분석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하더라도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동시에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는 과정은 우리의 고찰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느낌도 드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꿰뚫어 본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형성과정을 살펴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형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성령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임재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열려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말씀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믿음의 문'(행 14:27)을 열어 주실 때 말씀은 능력을 발휘한다.”
둘째 인용문은 스위스 사람 요한 카스파 라바터(1741- 1801)의 책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자의 일기』에 수록된 것이다. 라바터의 1772년 12월 23일의 일기에 이런 글이 있다.
“귀하신 나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단순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곧 믿음을 믿음 이상의 것으로 오해하는 것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인용문 속에는 신구약성경에 일치되어 나타나는 사실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곧 신앙이란 하나님의 행하심이며 성령의 은사라는 사실이다. 신앙은 증거될 수 있고 신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는 없다. 여기에 또 하나 첨부해야 할 것은 신앙은 신실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신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기도가 있는 것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그의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의 주석에서 이 사실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제2 이사야의 찬양에는 신약에서 믿음이 위치할 곳에, 구약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이 아직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환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히 11:1). 그러므로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개념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신앙이 개념이라면 현실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것이 될 것이다. 신앙은 개념이 아니라 우리를 붙잡고 있는 현실이다. “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신앙에 대한 고전적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은 보지 못하는 것 내지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확인시키는 것 또는 확신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믿음의 반대는 지식이 아니라, 다른(혹은 이상한) 믿음, 곧 두려움이요, 의심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마태복음 14:22~23에 나오는 물 속으로 가라앉는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이다. 베드로는 주님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한 다음 배에서 내렸다.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 서!”(마 14:28).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 있다가 주님에 비해 더 강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힘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0~31)”.
믿음의 반대로써 또 중요한 것은 바라봄인 바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있을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보좌 앞에서 의 영생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우리에게 주어질 것으로 약속이 되어진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또 팔복말씀 중 여섯 번째 말씀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우리가 취급하는 주제와 관련하여 믿음을 올바로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이것이다.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이방인들이 우상의 제물로 바쳤던 짐승의 고기를 기독교인들이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가 취급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지만 항상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믿음에 합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때 믿음이 어떻게 양심이나 인식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가 드러난다. 여기서의 준거점(準據點)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이 심판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과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4:23에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이상의 짧은 논의를 통해 우리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사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믿음은 참된 믿음과 죽은 믿음으로 구별될 수 있는데 후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약 2:17, 26).
신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은 제1계명의 준수 여부에 달려 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루터는 『대요리서』에서 이 계명을 믿음의 의미와 관련하여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루터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문제-이 문제는 다원주의사회에서 자주 제기되는 문제이다-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환난 중에서도 피난처가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인데 내가 여러 번 말한 대로 오직 진심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되기도 하고 우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너의 의지와 신뢰가 옳은 것이라면 네가 믿는 하나님도 옳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의지와 신뢰가 거짓되고 그릇된 것이라면 네가 믿는 하나님도 옳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과 하나님은 함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거니와)너의 마음이 애착을 느끼며 신뢰하는 곳, 거기에 진정 하나님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모든 인간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그가 무엇을 또는 누구를 믿는가, 그의 마음이 어디에 애착을 느끼는가,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또 무엇인지는 이렇게 하여 결정된다.
이 글은 “21세기 다원주의 시대에서의 기독교신앙” – 문화 및 신학주제 학술심포지움 주제강연 – 발표:슬렌츠카 박사/ 독일 에어랑엔대학 교수 번역:김광채 박사/ 개혁신학원 교수의 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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